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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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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한국 경제의 활황기 1990년대만 해도 한국의 정치는 아주 쿨하게 나뉘어 졌다. 영남과 호남, 경상도와 전라도,, 군부와 김씨들,,, 그런데, 이 기본적인 패러다임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그런데, 그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던 1990년대에 20대에서 30대를 보냈던 사람들이 그 패러다임을 깨면서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바로 강남 좌파. 

 

단순히 그 나이 또래의 사람들을 모두 강남좌파라고 부르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도 해당 되는 나이지만, 생각도 얼추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강남 좌파의 계열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나름의 생활 수준이 안되니까.. 암튼, 총론은 진보이지만, 각론은 보수이며, 삶의 양식은 부르조아 이지만, 현실 참여적인 면에서는 진보의 성향을 띄고 있는.. 그들이 점차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나름 그들을 비꼬는 듯한 어조로 새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11년을 뜨겁게 달구는 핫 이슈메이커들을 강남좌파라는 패러다임으로 맞추어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강남 좌파라는 그 어정쩡한 입장을 흐를 수 밖에없는 그들의 존재는 그다지 구미가 땡기지 않았다. 내년 대선 이후의 향방이 어떻게 진행 될지 모르고, 더구나 이번 안철수 원장이 일으킨 폭풍이나, 박원순 변호사의 등장은 강남좌파와 딱 들어 맞지 않는 의외의 세력의 부상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내가 이 책을 보고 섬뜩한 부분은 강남좌파의 그 밑면에서는 정말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좌우나 진보 보수의 2분법이 아닌 엘리트와 비엘리트간의 무서운 계급투쟁이었다. 강남 좌파는 엘리트들의 새로운 가면이며, 엘리트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이 흔드는 체에 걸러지지 못한 잔챙이인 우리 비 엘리트들의 비참한 현실에는 비엘리트만이 가질 수 있었던 좌파라는 이름표마져 빼앗겨 버린 느낌.. 

 

아뭏튼, <강남좌파>는 강준만 교수의 2011년과 내년 대선을 마치 여러개의 닭꼬치를 한방에 꿰뚫는 꼬치처럼 시원하게 풀어주는 해설집으로 손색이 없는 것 같다. 늘 그렇듯이 해설집을 숙지하면 출제자의 의도를 나름의 시각으로 꿰뚫어 볼 수 있지 않은가? 이제 나는 그들의 속셈을 훤히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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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문정현 신부는 지금 제주 강정에 있다. 그는 4대강 사업을 막기 위해서 전국을 삼보 일배로 돌았다. 그는 신부이지만, 늘 길에 있었고, 길은 그의 성소 였다. 예수의 삶 역시 길에 있던 적이 훨씬 많지 않은가.. 어쩌면 그의 인생이야말로 예수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인 듯 싶다. 다시 떠나는 그의 길을 따라 가고 싶다. 

 

 

 

 

 

 

 얼마전,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반 지하 단칸방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수 많은 명작 다큐를 만들던 독립 PD들은 아직도 생계를 걱정하며 살아간다. 이 시대에 문화는 소비에는 어마어마한 돈을 가져가지만, 생산에는 너무 박하게 가격을 매긴다. 문화를 즐길 수는 있어도 문화로 벅고 살기에는 불가능한 사회가 아닐까? 때문에, 언제나 우리의 사고의 폭을 넓혀 주었던 우석훈교수의 도전적인 제목의 책에 눈길이 쏠렸다. 

 

 

 

 

자본주의의 특성 중에 하나는, 비싸면 안 쓰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세금을, 가격을 비싸게 정해놓으면 안쓰게 만들 수 있다고 오해하지만,, 석유 값이 아무리 올라도 우리는 석유를 쓰고, 탄소 배출권이라는 무형의 가치에 가격을 매겨도 거래를 할 수 있게 만든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속에 누군가는 이득을 얻고 독점을 해버린다는 점이다. 이 먹이사슬을 끊을 수가 없단 말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신 중의 가신이자 너무나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두 정치가 안희정과 이광재. 그들을 뭉치게 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왜 그들을 중용했는지, 그들의 대장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없는 이 시점에서 그들의 정치적 행보는 어떻게 변화될지 짚어 보고 싶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라고 했다.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인간이 좋은 답을 만들 수 있고, 좋은 질문에 대한 이해가 그 답의 수준을 결정한다. 때문에,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은 질문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학생들에게 가장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좋은 질문, 좋은 시험은 불 필요한 사람을 떨어뜨리는데 집중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합한 사람을 골라내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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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 2011-09-10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문정현 신부님...!!

지금 제주 강정에서는, 문정현 신부님을 포함한 많은 신부님들을 경찰들이 쓰레기 버리듯이 들어서 갖다 버리고, 그러면 신부님들은 또 돌아오고...이런 사태가 반복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인데, 몇 달 전 명동성당에 머무르고 계시던 문정현 신부님을 우연히 뵙고 고해성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영성이 깊으시고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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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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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 문화비평이라는 '장르'에 전문가라는 인물들과 소개, 주장, 언급, 비판은 너무나 많아졌다. 결국 장르가 되었다는 것은 경쟁 시스템이 되어 버린 것이고, 평가 받아야 하며, 도태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평가의 기준이라는 것은 언제나 모호하다.어쩌면, 나가수라는 TV프로그램 처럼, 청중을 감동시키면서 성대를 극한으로 밀어 올리는 노래만이 인정 받는 코드가 있듯이 문화 비평이라는 장르 역시, 비평으로서 필요한 코드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이 책 <이것이 문화비평이다>는 적어도 한가지의 코드는 확실한 것 같다. 그 깊이 면에서는 말이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철학과 비평 사이, 사회와 정치 사이, 문화와 인물 사이 로 나뉘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 챕터 명을 잘 지은 것 같다. 철학과 비평이락고 하지 않고 그 '사이' 라고 지은 것 말이다. 바로 이 사이가 문화가 아닐까? 저자는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문화에 대한 깊숙한 이해와 얼개를 보여주는 글들로 책을 채우고 있다. 그러나, 다만 독자로서 조금 혼란 스러웠던 것은, 그가 다루는 모든 주제는 이 시대 한국의 뜨거운 감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공정하고 차디찬 심판의 시각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독도, 이명박 대통령, 천안함, 그랜저 광고 등등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하여 비평임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일갈을 듣지 못하고 있는 느낌(나만의 느낌일지도 모르지만,,)이다. 깊이는 엄청나게 깊은데 시원함은 없는 우물 같은.. 색다른 시각들은 많이 들린다. 촛불 집회의 원인이 이명박 대통령만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였다는 내용이나, 독신 주의는 실패한 결혼의 산물이 아니라성공한 결혼의 증상이라는 등의 내용도 신선했다.하지만, 책의 전반에 흐르는 깊이의 무거움에 그동안 읽혀왔던 문화 비평의 쉬움? 또는 가벼움? 을 조금 그립게 됐다. 아이템의 현장성, 즉각성은 쉽게 읽기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들어가면 갈 수록 좀 허우적 댔다고나 할까.. 책을 덮으면서 환청이 들리는 듯 했다. 당신은 문화비평이라는 것을 너무 쉽고 가볍게 흘려 보내고 있었던 거야! 라는 저자의 일성이 말이다. <이것이 문화비평이다>라고 자신있게 외친 저자의 자신감을 이해하고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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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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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듣기만 해도 섬뜩한 단어다. 한나 아렌트 그녀는 왜 이런 단어로 악을 설명했을까? 히틀러의 부하로 나치주의자 였던 아돌프 아히히만을 진단 하며 내린 병명(?) 과도 같은 ‘생각이 없다’는 말은 악의 평범성과 맥락을 같이하며 한나 아렌트라는 인물을 대변하는 기호로 사용된다. 악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며 그녀가 설명했던 그 악의 평범성은 21세기에도 같은 의미로 살아 남는 것일까? 아렌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아렌트가 사사한 수제자인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이 쓴 <아렌트 읽기>는 그녀의 책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정신의 삶> 등 3권의 책을 기본으로 현재의 세계에서 어떻게 읽혀야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21세기 미국은 9.11 이전과 이후로 나뉘며 그 성향이 바뀌어 버렸다. 아렌트의 책 <전체주의의 기원>을 도구 삼아 비춰보면 영-브루엘의 해석은 미국은 전체주의 국가로 변해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9.11의 참혹한 사건의 원인은 미국이 1990년 중반 이래 세계질서를 형성하는데 전체주의를 물리치기 위해서 전체주의적 방법들을 도입했고, 그것의 인과응보였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의 기원>과 반대 성향의 아렌트의 다른 책 <인간의 조건>은 전체주의와 반대의 입장에 서서 인간의 행위를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에 정치 행위를 통해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어쩌면 2011년 한국의 대중들이 피부로 와 닿는 역설을 주장한다. 아렌트의 정치 행위는 사적인 삶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공적인 장에 참여하여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수행하는 의사소통의 행위를 뜻한다. 이런 모습은 촛불 집회나 희망버스라는 행위로 쉽게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다른 의미를 찾아 본다면, 영-브루엘은 <인간의 조건>을 언급하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진실과화해위원회와 한국의 예를 언급한다. 사건의 종결만을 위해 모든 것을 덮어 버리려 했던 한국의 방식은 결국 많은 부작용을 낳고 지금도 곪아 터지고 있다. <정신의 삶>을 통해 한나 아렌트는 아히히만을 해석하며 악의 평범성을 언급한다. 인간의 정신은 사유함, 의지함, 판단함의 세 가지 기능을 분리하여 수행되는 동시에 상호 유기적으로 통합적으로 작용한다 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아렌트는 판단함에 대한 원고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무엇이 성실한 공무원을 대량 학살자로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은 아렌트의 사유없음 이란 진단을 통해 나치의 아히히만을 이 시대에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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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최근, '긍정의 배신' 스타일의 열심히 노력하면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당연한 진리'를 쿨하게 거부하는 책들이 눈에 띤다. 이런 책들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개인의 실패의 원인은 오로지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고 사회 체계나 자유 경쟁 시스템은 문제가 없다는데 의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출발점이 갖은 선상에 있지 않으면 경쟁은 무의마 하다는,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긍정심리학이나 자기계발이 그 원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조직이 개인을 희생시키면서 그 고통의 진통제 역할로 전락해 버렸다. 정말 자기계발의 효용성과 그 효과는 있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최근 동아프리카의 가뭄으로 수백만명이 기아와 가뭄에 시달린다는 기사를 보았다. 하지만, 장 지글러의 명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보듯이 이미 총량적으로 식량은 전세계 인구가 다 먹어도 남을 만큼 많이 생산되고 있다. 진실은 식량은 사라지는 거다. 그 식량을 가로채서 이익을 얻는 사람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이유도 명확하게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알면, 우리는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몰라서 막지 못한 것을 아닐까? 그래서 더욱 이 책을 읽고 싶다. 

 

 

 

 

 세상을 비추고 해석하는 도구로서의 책은 인터넷이나, TV, 신문 매체에 비해 훨씬 깊고, 무겁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내공은 다르다. 더우기, 요즘 처럼 아지랭이 처럼 불명확한 언론 때문에, 분별력과 통찰력이 필요한 이 때에 우리에겐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 볼 수 있게 해주는 책들이 필요하다.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에 나오는 책들과 저자들의 서늘한 지혜와 뜨거운 가슴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좀 갈길이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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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1-08-09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가 탐나네요.. 이런 책을 읽고나며, 읽지 못한 책이 너무나 많음에 절망하게 되고, 또 읽고 싶은 책이 너무나 많아 초조해지기도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