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크기는 내가 보는 것들의 크기이지
내 키의 크기가 아니라네."

(4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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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참한 상황은 아무렇게나 이어지는 사색을 기록하느라 조금씩 모아놓은 이 단어들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물을 다 마셨는데도 잔의 밑바닥에 녹지 않고 남아 있는 찌꺼기처럼 나는 모든 표현의 밑바닥에서 무가치한 존재로 살아간다. 장부에 숫자를 기입할 때처럼 세심하되 무심하게 나의 문학을 기록한다. 별들이 반짝이는 광대한 하늘과 무수히 많은 영혼들의 수수께끼, 알 수 없는 심연의 밤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혼돈, 이 모든 것 앞에서, 영혼의 단사을 종잇장에 적는 일과 장부에 숫자를 기입하는 일은 도라도레스 거리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이고 어마어마하게 광대한 우주 안에서 너무나 사소한 일이다.

(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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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가지고 있는 책은 배수아 작가가 번역한 <불안의 서>입니다. 이번에 읽고 있는 책은 문학동네에서 나온 <불안의 책>입니다.

중간에 보니 페르난두 페소아는 한 살에 어머니를, 세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다른 데서 들은 이야기로는, 가명이 여럿인데 책도 많이 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너무 두꺼워서 펼칠 엄두도 못냈었는데, 몇 장 읽다보니, 다른 번역본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문장 중 어떤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만, 왠지 옮기다보면 맥락을 같이 남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분량이 많아집니다.

끝까지 읽어보고 싶습니다. 어떤 글들이 계속 나올지... 55까지 읽었는데요, 정말 빈 공책에 이것 저것 끄적인 것 같은 글입니다. 물론 솜씨가 아주 좋은 작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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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항상 머무는 나무줄기 주위에서 나의 의식적인 무의식을 거닐게 한다. 나는 머물러 있는데 홀로 앞으로 나아가는 내 운명을 거닐게 하고, 나는 따라가지 않는데 홀로 흘러가는 내 시간을 거닐게 한다. 나의 지루함을 달래는 유일한 방법은 지루함에 대한 짧은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나는 감옥 철창 안쪽에 창문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고, 유리차에 어쩔 수 없이 쌓인 먼지 위에 대문자로 내 이름을 씀으로써 죽음과의 계약서에 매일 서명한다.

죽음과의 계약이라고? 아니, 죽음과도 약속하지 않겠다. 나처럼 사는 인간은 죽지 않는다. 시들어버리고, 끝나버리고, 말라버릴 뿐이다. 그런 인간이 살던 장소는 그가 사라진 후에도 남고, 걷던 거리도 변하지 않고, 살던 집에도 누군가가 계속 살아간다. 그것이 전부이며, 우리는 그것을 무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라고 부정하는 비극마저도 박수갈채를 보내는 이들 앞에 내세울 수 없으니, 진실과 삶의 무기력한 표명인 우리, 창틀 안과 밖에 더께로 앉은 먼지 같은 우리, ‘영원한 밤’이 남편인 ‘혼돈’을 잃고 ‘신’과 결혼하는 바람에 신의 의붓자식이 되고 ‘운명’의 손자가 된 우리가 정말 무인지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4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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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로 자유를 얻는다. 독서로 객관성을 획득한다. 나는 내가 되기를 멈추고,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존재가 되기를 그만둔다. 내가 읽는 것은 때로 나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의복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명료함이고, 만물을 비추는 태양이고, 고용한 대지에 그림자를 드리운 달이고, 바다로 이어지는 거대한 공간이고, 녹색 이파리를 흔드는 나무의 견고함이고, 농장 연못에 깃든 평화이고, 포도나무 덩굴이 우거진 해안의 비탈길이다.

퇴위하는 왕처럼 나는 읽는다. 왕관과 망토는 떠나는 와이 땅에 내려놓는 순간에 가장 존엄해지는 법이니, 나의 모든 권태와 몽상의 트로피를 모자이크 타일 바닥에 내려놓고, 본다는 행위의 고귀함만을 들고 계단을 오르낟.

지나가는 사람처럼 나는 읽는다. 고전주의 작가들 속에서, 차분한 영혼들 속에서, 고통받지만 말하지 않는 이들 속에서 나는 성스러운 길손이 되고, 머리에 기름을 붓고 목적 없는 세상에 이유 없이 묵상하는 순례자가 되고, 떠나는 길에 마지막 거지에게 자신의 고독을 최후의 동냥으로 건네준 ‘위대한 망명길에 나선 왕자’가 된다.

(5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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