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딸을 이해하기 시작하다 - 나이젤 라타의 나이젤 라타의 가치양육 시리즈
나이젤 라타 지음, 이주혜 옮김 / 내인생의책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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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몇 가지 오해한 것이 있다. 첫 번째 오해는 저자가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남자요 두 아들의 아버지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빠들이 읽기에 아주 적합하다. 여자(딸)에 관한 책이지만 남자들이 충분히, 그리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 오해는 이 책이 딸 바보 아빠들을 위한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카피에 언급된 딸 바보 아빠는 이 책과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다. 딸을 어렸을 때부터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다면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딸의 사춘기도 늦게 올 것이고, 오더라도 가볍게 지나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오히려 딸에게 무관심했던 아빠들에게 필요한 책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편집자는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아니면 매출을 올리기 위해 살짝 뻥을 치기로 한 것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딸 아이를 사랑하는 아빠들이 아니면 이런 제목의 책을 구입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정말 봐 주기 힘든 것은 책 표지의 디자인이다. 너무 낯 간지럽다. 딸 바보 아빠들이라면 마음이 움직일만한 디자인이지만, 그리고 여성 작가의 책이라면  딱 어울릴만한 디자인이지만, 이 작가가 쓴 책 내용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만화 스타일로 십대 여자아이들의 '악마성'을 잘 드러낸 표지였다면 어땠을까 싶다.


책 내용에 관해 말하자면, 이 작가 정말 마음에 든다. 우선 '솔직하다'. 자신이 두 아들만 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말 대부분은 사실이라 믿어진다. 게다가 유익한 내용들도 상당히 많다. 특히 '십대 소녀들 대부분이 사춘기 시기에는 살짝 미쳐버린다'라는 저자의 지적은 가슴에 팍팍 꽂힌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유모어가 넘치는 저자의 글솜씨는 최상급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지를 보면서 '분명히 지루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이 완전히 기우였다는 것을 머릿말을 읽으면서 알았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위트 넘치는 표현으로 인해 시간 가는 줄 몰를 정도였다. 특히 책의 끝 마무리가 끝내 줬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이런 방식으로 끝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읽고 나서 한참을 웃었다.


오랜만에 자녀 교육과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즐거웠다. 그래서 이 작가의 책은 앞으로 무조건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속편이 나온다니 그것도 꼭 읽어야겠다. '엄마, 아들을 이해하기 시작하다'라는 책이라는데, 또 얼마나 나를 웃겨 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올해 들어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미있는 책이었다. 아마 누구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 같다. 물론 더 깊이 있고 학적인 내용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조금은 아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녀 교육에 별 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가 갑자기 사춘기에 접어들어 악마로 변해버린 딸내미들 때문에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평범한 아빠들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이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재미있기까지 하니 책 싫어하는 아빠들에게도 딱이다.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별 여섯개 주고 싶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이득 한 가지를 더 소개하고 싶다. 이 책이 내 책상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십대에 접어든 딸 아이가 엄마에게 내가 이 책을 읽어 보았는지를 물어 보았다고 한다. 아내가 잘 모르겠다고 아빠한테 직접 물어 보라고 했다는데, 내 책상에 이 책이 놓여 있는 것을 본 것만으로 우리 딸은 내가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듯 싶다. 그 이후부터 우리 딸이 갑자기 나에게 잘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혹시 이 책을 구입했다면 몰래 숨어서 읽지 말고 딸 아이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 두길 바란다. 그것만으로도 나처럼 딸 아이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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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 개정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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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상당히 도발적인 제목이다. 솔직히 개신교 성직자인 나로서는 반감을 가져야 마땅한 제목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읽어 보고자 했던 이유는 '이 책에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기에 수많은 무신론자들이 이 책을 침이 마르게 극찬한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저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몇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 저자의 매력에 푹 빠져 들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는 물론이고 유대교, 이슬람, 몰몬교 등의 다양한 종교를 아우르는 폭넓은 지식과 그 깊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러한 종교들의 기원과 각각의 종교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성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 각각의 종교들과 관련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들에 대한 설명들도 마음에 들었다. 특히 지금까지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이슬람과 몰몬교의 기원에 관해 상당히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설명들 가운데 유대교의 할례 방식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정말로 유대인들이 저자가 말하는 방식으로 할례를 했을까 싶을 정도로 역겨운 방식이어서 당황스러웠다. 궁금하면 한 번 찾아보시도록.)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다양한 지식을 접하고 있다는 기쁨 때문이었을까, 저자의 주장에 대해 별 다른 반감이 들지 않았다. 다양한 종교들이 저질러 온 다양한 죄악들과, 각 종교들의 신뢰하기 어려운 주장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아마도 내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들을 공정한 시각과 잣대를 가지고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책제목이 '신은 위대하지 않다'임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공격을 가하는 내용들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거부감이 덜했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저자는 '신'보다는 '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싶었던 것 같아 보였다.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신의 이름으로 저지른 악한 일들이 저자가 이 책에서 주로 지적하고 있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저자의 지적들은 상당히 타당해 보였다. 물론 기독교와 관련된 내용들 중에는 저자가 오해하고 있고, 또 충분히 반박해 줄 수도 있는 내용들도 있었지만, 기독교가 저질러 온 잘못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어 보였다. 잘못한 것은 분명히 잘못한 것이니까.


여하튼 이 책의 핵심은 '종교는 신뢰할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또한 자신들의 주장과는 달리 세상에 수많은 해를 끼쳐왔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는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하나의 제도에 불과하며, 신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을 섬기는 인간들의 불완전함은 신의 부재에 대한 증거로서 충분하지 않다. 종교가 무지의 시대에 과학적 발견을 억압했었다는 사실 역시 종교가 거짓이라는 증거로서 충분하지 않다. 그저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악한 일을 저질렀을 뿐이고,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무지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위대하지 않은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의 잘못은 인간의 잘못일 뿐,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그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신을 섬기며 선을 행하는 자도 있고, 신을 섬기며 악을 행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므로 신을 섬기는 자들의 행위를 근거로 신의 존재여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물론 신을 섬긴다는 자들의 행위를 통해 어떤 종교가 세상에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종교인가를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 책에서 소개한 내용을 보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이 세상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이 책을 통해 내가 다다른 결론은 '신은 없다'가 아니라 '신을 섬기는 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1장에서 자신의 친구들이 자신을 '구도자'라고 부른다면서, '그 사실에 짜증이 난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저자의 친구들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신' 때문이 아니라 '인간' 때문에 기독교를 버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그에게 진정한 '기독교인다움'을 보여주었다면, 그가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개신교 무신론'을 신봉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내가 보기에도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가 세상에 보여주었던 모습은 아주 글러먹었다. 이에 대한 저자의 비난은 참으로 타당하다. 그리고 그가 그런 비난을 퍼붓는 데에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크다. 그렇다고 저자의 주장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나귀의 말이라도 바른 말이라면 반드시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가지고 있는 종교다. 따라서 바른 소리라면 누구의 말이더라도 반드시 귀기울여 들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비난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귀기울여 들어야 마땅하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는 지금까지 다른 종교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왔다.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라면, 기독교는 결코 진리를 좇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뼈아픈 반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반성을 불러 일으켜 준 책이기에 이 책의 출간이 한편으론 감사하다. 기독교를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나쁜 책이라고 단순하게 평할 수 없는 이유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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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 백지연의 대학토론배틀, 토론이 쉬워진다
2011 대학토론배틀 심사위원 지음, tvN 끝장토론 〈대학토론배틀〉 제작팀 엮음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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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이라는 제목 때문에, 처음에는 '토론 기술에 관한 이론서'일 것이라고 짐작했었습니다. 그런데 목차를 보면서 tvN이라는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했던 '백지연의 끝장토론'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수록된 토론들의 내용을 토씨 하나 안 빠뜨리고 기록해 놓은 대본집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겠더군요. 물론 방송되었던 모든 토론들을 소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디션에서부터 시작해서 32강, 8강, 4강, 결승에 이르기까지의 토론 배틀 내용 중에 '의미있는 토론', 또는 '잘 된 토론'이라 생각되는 토론들만 선별해서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토론 과정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평가도 함께 싣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토론을 잘하는 법'이라던가, '토론에서 피해야 할 태도'와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실 책의 내용이 이미 방영된 방송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보니, 책에 소개된 내용들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들에 대해 말해 보아야 그것은 결국 제작진과 토론 참가자들에 대한 평가가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참신한 기획의 방송 내용을 책으로 남기고자 한 것은 충분히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론 참가자들에게 훌륭한 기념품이 되리라는 것 외에도 끝장토론을 보며 토론이라는 기술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된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교과서로 활용될 수 있을 만한 책이 되리라는 것이 확실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을 통해 끝장토론을 직접 시청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또한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상적인 토론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그 토론을 보고 싶었던 사람들도 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이와 같은 대본집을 손에 넣어 바둑에서 복기를 하는 것처럼 토론의 흐름을 되짚어 보고 싶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은 참으로 손에 넣고 싶었을 만한 훌륭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방송을 녹화해서 다시 보는 것보다, 또는 파일공유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해서 다시 보는 것보다, 이렇게 문자로 정리된 내용을 보는 것이 더 정확한 분석과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토론에 참가한 대학생들이 언급했던 다양한 용어들 가운데 그 용어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용어들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해 온 공부, 또는 독서가 얼마나 편협하고 치우쳐 있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토론자라면'이라는 항목에서 심사위원들이 지적하고 있는 각각의 주장에 대한 토론의 요지들을 보면서는 그만한 깊이를 지닌 통찰력의 부재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대학생들의 토론 내용은 그렇게 탁월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제법이라 느껴졌던 토론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물론 형편없다고 생각된 토론팀도 있었고, 또 심사위원 중에 함량미달이라 생각되었던 심사위원도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그들 모두를 통해 토론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생 정도 되었으면 이 정도 수준의 토론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오디션을 통과한 팀들 가운데에도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팀들이 있는 것을 보면, 오디션에서 탈락한 팀들은 그들보다 얼마나 더 못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의 교육현실 속에서 토론에 대한 훈련을 받을 기회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에게 토론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배워 볼 수 있게 해 주는 유용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중학생이 읽기에는 좀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아들 녀석에게도 꼭 읽어 보도록 하고 싶은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토론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잘 보고 배워 두었다가 자신이 대학생이 된 다음에 끝장토론과 같은 토론의 장에 자신감을 가지고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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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없다
댄 바커 지음, 공윤조 옮김 / 치우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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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없다'. 상당히 도발적인 제목의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쓴 사람이 전직 목사란다. 그런데 이렇게 목사짓을 하다가 내려놓고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람이 이 사람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소위 '강의석 사건'이라 이름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대광고의 교목실장으로 있었던 류상태씨도 목사직을 내려 놓은 후 이런 종류의 책을 낸 적이 있다. 책 제목이 '당신들의 예수'였던가. 그래도 류상태씨는 소위 '종교심'이라 하는 것을 아직은 버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정통적인 기독교라 하는 종교의 것도 아니고 이런 저런 종교의 것들이 혼합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댄 바커는 아예 종교심 자체를 버렸다. 그는 신이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신 뿐 아니라 이슬람의 신이나 힌두교의 신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상당히 논리적이라 생각되는 다양한 근거들을 토대로 신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신이 없다는 주장을 위해 사용하는 모든 근거들은 오직 '신이 있다는 종교들의 주장을 믿을 분명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지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저자의 논리는 '신이 있고 없고에 대한 증명은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측에 주어진 책임이지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측에 주어진 책임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을 듣다 보면 신이 있다는 측의 주장에는 많은 헛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지적하는 내용 가운데 일부는 충분히 수긍할만하다.


그러나 신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신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아니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우선적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모든 종교의 신은 초월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모든 종교의 신들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신이 직접 인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 이상 인간들이 스스로 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신은 자신이 특별히 선택한 인간들에게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리고 그 선택된 인간들을 통해 신은 다른 모든 인간들에게 알려진다. 모든 종교가 이와 같이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각각의 종교에서 신과 세계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들이 대부분 서로 상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충되는 주장들이 신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각각의 종교에서 숭배하고 있는 신들 가운데 어떤 신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열등한 신이 자신을 최고로 위대한 신이라 주장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 자칭 대리인이라하는 자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존재, 또는 초월적인 존재는 분명히 실재한다는 것이고, 그러한 존재들과 교류할 수 있는 영매(그들의 이름이 선지자든 무당이든)들이 실존한다는 것이며, 그들을 통해서 영적인 존재들의 실재를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과거나 현재에 대해 신점치는 무당들에게 물어보라. 무서울 정도로 놀랍게 그들의 현재에 관해 말해 줄 것이다. 이를 보면 귀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귀신이 존재한다면, 신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거짓이라 할 수 없다.)

 

내가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은 영적인 존재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에 결정한 일이다. 나는 단전호흡을 하면서 영적인 존재의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무당들이 믿는 허접한 잡신을 믿기 보다는 천지를 창조했다는 큰 신을 믿는 것이 더 낫다 싶어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영적인 체험을 해 보았다. 저자가 경험했다고 말하는 것들의 대부분을 나 역시 경험해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들은 결코 내가 믿고 있는 것의 기반이 아니다.

 

내가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친히 선택한 선지자(일반인들의 관점에서는 무당이라 볼 수도 있겠다)들을 통해 예언한 수많은 사건들이 수백년, 또는 수천년 후에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증거가 무수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또한 후대에 조작하거나 삽입해 넣은 것이라 말하겠지만, 그것 역시 증거없는 추론일 뿐이다. 그리고 과거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면서 남아 있는 예언들 역시 성취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기도하는 가운데 경험되는 여러가지 기적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독교의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또 한가지 이유는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보았던 몇 차례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방배동에 있는 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을 때, 10원만 달라며 매일같이 찾아오는 여자분이 있었다. 큰 금액이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달라는 대로 드리다가 어느 날인가 이 여자분이 정신병에 걸린 것인지 귀신이 들린 것인지 확인해 보자는 생각으로 이 여자분에게 성경을 읽어보라고 부탁해 보았다. 그랬더니 이 여자분이 성경을 읽어 가는데, 소름이 쫙 돋는 일이 벌어졌다. 복음서의 일부를 읽으면서 '예수'라는 글자만 나오면 그 글자만 쏙 빼버리고 건너 뛰어 읽는 것이었다. 그 때 이 여자분이 귀신 들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귀신이 예수라는 이름을 두려워한다는 사실도. 그리고 이것은 결코 내가 경험한 사례의 전부가 아니다.

 

저자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지만 나로서는 '신은  존재한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이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그리고 그 외에도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저자에 대해 별로 신뢰가 가질 않았다. 저자가 자신의 역회심에 대해 기록한 내용을 보면, 저자가 한쪽 극단(극단적인 종말론에 사로잡혀 지내던 열광적 은사주의자)에서 다른 한쪽 극단(무신론자)으로 옮겨간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임박한 종말을 준비한답시고 신학대학에 재학하고 있는 동안 신학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고 전도만 하던 사람이 뒤늦게 무신론자들의 책으로 머리를 가득 채운 다음에 기독교를 버리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성경에 대한 지식은 신학대학을 나오지 않은 일반신도들보다 더 깊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둘째로 저자가 무신론을 전파하는 전도사가 된 동기가 석연치 않게 느껴졌다. 그는 목사로 재직하는 동안 음악적 재능을 이용해 많은 기독교 음반 제작에 참여해 왔는데, 저자는 그 때의 생활을 후회하면서 자신의 수고에 비례하는 경제적 대우를 받지 못했음을 안타까와 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과거에 그렇게 낭비한 시간에 대한 보상을 지금의 활동을 통해 받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회심 이후에 그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하기도 하고, 또 이전의 아내와 이혼하고 '종교로부터의 자유 재단' 총수의 딸과 재혼을 했다. 그리고 현재 그 단체에서 주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 그리고 무수한 강연과 집필을 통해 엄청난 강의료와 인세를 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목사로 재직하는 동안 그리 별 볼일 없는 사역자(저자는 기독교 음반 제작에 참여하거나 순회 설교자로 활동했을 뿐 담임목회자로 사역했던 적도 없고 부교역자로 사역할 동안에도 한 곳에 오래 재직하지 못하고 수시로 교회를 옮겨 다녔다. 사역했던 교회의 교단도 각각 달랐다. 정통 교단에 소속된 교회에서는 이런 부류의 교역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로 활동했었다는 것과 비교할 때, 공개적인 역회심 이후의 그는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다.

 

셋째로 자신의 과학을 전공한 전문가가 아님에도 얄팍한 과학적 지식을 근거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태도가 마땅치 않다. 솔직히 2부에서 말하고 있는 다양한 과학과 철학에 바탕을 둔 주장들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어수선하게 느껴졌다. 때로는 말장난 같이 느껴지기도 했고, 때로는 오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저자는 신앙을 지성의 파산이라고 단언하고 있었으며, 성숙한 사람은 휴머니즘의 상대주의로 마음이 편해진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전혀 동의가 되지 않았다. 저자는 영은 힘이 전혀 없으며, 힘 있는 영적 존재는 있을 수 없다(204쪽)고 말하고 있었는데 이 또한 동의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저자의 신념일 뿐 사람들에게 제시할 만한 어떠한 근거도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넷째로 저자가 성경에 관해 말하고 있는 내용은 그저 악의적인 추론에만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성경의 불일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들은 이미 기독교 학자들에 의해 대부분 해결된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안식일에 나무하다 돌에 맞아 죽은 사람에 대해 그저 가족들을 따뜻하게 해 주기 위해 나뭇가지 몇 개를 줍다가 죽임을 당한 것으로 설명하는 데에서는 코웃음이 나왔다. 나무를 한다는 것과 나뭇가지를 줍는 것을 같은 것이라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무를 해서 내다 팔려고 했는지, 가족들을 따뜻하게 해 주려 했는지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근거없는 추론을 의지해서 자신의 논리를 펴는 저자의 태도 때문에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웠다.

 

그리고 저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만약 하나님에게 이성이 필요하다면, 그는 신이 아니다(260쪽)." 그렇다면 하나님이 신이라면 이성이 필요치 않다는 것인가? (정, 역, 이, 대우에서 정이 옳으면, 대우도 반드시 옳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어떻게 이렇게 말이 안 되는 결론을 뽑아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263쪽에서 언급한 '강간에 대한 성경의 명령'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성경에는 강간에 대한 명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훗날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리라는 예언적인 내용이 있기는 하다. 기독교에 대한 저자의 악감이 이렇게 성경에 대해 거짓말을 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또한 기독교인들을 '상명하달식의 정신파탄자들'이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괴물', 또는 '불량배'라 부르기까지 한다. 또 바울 사도를 '예수의 가장 중요한 치어리더'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히틀러를 '진실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악의적인 묘사가 이 책에는 수시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사를 쓴 리처드 도킨스는 저자를 예의 바르고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이 책이 성숙한 무신론자의 너그러움을 보여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울 뿐이다.


솔직히 리처드 도킨스의 추천사를 보면서 저자가 참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예의바른 태도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어가는 동안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저자의 악의적이고 원색적인 비난을 보면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예의 바르고 좋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그저 기독교에 악감을 가지고 있는 안티크리스천일 뿐이었다. 서평단을 통해 출판사에서 서평을 의뢰받은 책인데다가 출판사 편집장님께서 이 책에 대해 보여 주신 애정을 생각할 때 가급적이면 좋은 평을 해 주고자 했지만, 글 속에 나타난 저자의 태도는 결코 기독교인인 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차마 별 하나를 줄 수는 없었다.)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가 있는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저녁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방법을 찾고 있는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쓰여진 책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결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나눌만한 것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 역시 분명하다. 저자는 그저 자신의 독자들이 자신과 같은 안티크리스천이 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실존을 확신하지 못하는 기독교인이 읽기에는 위험한 책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시험에 든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한 번 쯤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그리고 만약 이 책을 읽으면서 신앙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목회자라면 차라리 목회를 그만 두기 바란다. 그것이 당신이나 교회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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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의 본질
플로이드 맥클랑 지음, 김진선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 그대로 '제자도의 본질'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평생을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살아온 저자의 사역철학이 녹아 있는 역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그를 추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세 가지 가치, 즉 '예배, 선교, 교제'를 삶으로 드러내고자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이 세 가지 가치를 제자도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는 이 세 가지 가치가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대상을 사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예배'로,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선교'로, 또 '믿음의 지체들을 사랑하는 것'을 '교제'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설명을 보면서 제자도의 핵심에 관한 최고의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릭 워렌 목사의 '새들백 교회 이야기(영어 원제는 '목적이 이끄는 교회')'를 읽으면서 교회의 목적에 대해 참 잘 설명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지금은 아니지만). 릭 원렌 목사는 율법의 핵심강령(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과 예수님의 대위임령(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을 근거로 교회의 목적을 '예배, 전도, 교제, 제자훈련, 봉사'의 다섯 가지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책을 덮고 난 다음에 율법의 핵심강령과 예수님의 대위임령을 근거로 다섯 가지 목적이 무엇인지를 기억해 보려 했더니 잘 생각이 나지 않더군요. 특히 '세례를 주라'와 '교제'가 잘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그 둘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봉사' 뿐만 '교제'도 포함되는데, '이웃사랑'을 '봉사'와만 연결짓고 '교제'를 따로 떼어내 '세례를 주라'와 연결지은 것도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통해 릭 워렌 목사의 설명이 조금 억지스럽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가 말하고 있는 제자도의 본질(성도의 사명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사명이라 할 수 있는)은 그 누구라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고 명료하며 정확했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최고의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사랑'해야 할 각각의 대상에 따라 제자로써 행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사명을 분류해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릭 워렌 목사가 말했던 다섯가지 목적 중에서 '봉사'와 '제자훈련'이 빠져 있기는 하지만, '봉사'는 선교와 교제에 자동적으로 포함되는 것이고, '제자훈련' 또한 본서의 '교제'에 포함되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분류가 잘못되었다거나 미흡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예배에 대한 내용에서 저자는 '종교적 행위로부터의 자유, 복종, 주재권(Lordship), 회개, 교만, 신실함, 기도'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특히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주재권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저자는 진정한 사랑의 특성은 헌신이며, 우리 인생을 완전히 헌신한 후에야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인생의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이성을 대하는 자세,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태도, 직장, 다른 인종, 정치 등 모든 것에 대한 태도를 적극적으로 뜯어 고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저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실 때 정치, 창조와 환경에 대한 시각, 세계 경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다'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도 예수님게서 원하지 않는 행위들과 신념이 혼재되어 있을 가능성을 겸허히 인정하고 주를 따르기 위해 늘 배우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하느냐가 중요하며, 예수님에 대한 사랑없이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또 하나의 종교로 변질시키는 것으로써 세상은 그런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헌신만이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인데 그러한 삶으로의 변화되고자 하는 저의 갈망에 강한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또한 신실함에 대한 설명 역시 마음에 와 닿았는데, 아마도 주재권에 대한 내용과 많은 부분에서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느다바' 목사님의 강의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 목사님은 살집좋은(FAT)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Faithful, Available, Teachable'이라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신실하고, 유용하며, 배우려는 태도를 가진'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온전히 구비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으면서도 정곡을 짚어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아프리카 지역의 부유하고 사치스럽고 위세를 떠는 목회자들의 잘못된 리더십을 지적하면서 아일랜드를 섬겼던 패트릭 선교사의 일대기를 소개해 주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통해 깊은 감동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패트릭 선교사의 삶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을 가장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회의 문을 열어 주시면서 동시에 시험을 동반시키신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택하셨다고 해서 안락한 지위와 권력, 직책, 영향력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차원에서 섬김의 도를 배우라는 초청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사울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었는데 주일 오전예배 시간에 사무엘상을 설교하면서사울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고 있었던 터라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또한 기도에 관한 설명에서는 평소에 기도의 의의라고 생각해 왔던 것에 대해 정확하게 일치하는 설명을 해 주고 있어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겸손의 전형적인 태도는 기도이며,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기도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관계를 행위로 대체하지 않고, 영적 진실을 종교적 열심으로 대체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기도밖에 없다'고, '기도는 종교적 행위를 넘어서서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고 하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저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자의 설명이 제가 믿고 있는 것보다 조금은 약하다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말하고 있는 이를 만나 본 것이 처음이라 마음에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 저자가 제시한 일곱 가지 기도의 방법에 관한 설명들도 마음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이러한 설명 가운데에서 저자는 '기도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을 때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것(기도 시간에 떠오르는 잡념은 무조건 나쁘다라는)과는 완전히 다른 입장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또한 '글쓰기를 통해 드리는 기도'와 '성경말씀을 기도제목으로 삼는 기도'와 같은 방법은 매우 신선한 기도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교에 관한 내용에서는 '예수님께서 무리와 교류하시면서 일관되게 피하신 일은 제자가 되라고 사람들에게 강요를 하지 않으셨다는 것인데, 전체 무리를 상대로 제자가 되라고 요청하신 적이 없으셨고, 그 일을 하실 때에는 일대일로 만나셨다'는 설명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사람들이 무리로 있더라도 사람들의 영적 각성을 불러일으키고자 애쓰셨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인생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꿈과 기대를 갖도록 그들의 마음에 호소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성도들을 전체로서 대해야 할 때와 일대 일로 대해야 할 때, 각각 어떻게 대해야 할 지에 대해 분명하게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또 저자가 복음을 전할 때에 언급해야 할 것들에 대해 설명해 준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복음을 제시할 때에는 창조, 반역(타락), 희생(구속), 돌아감(회개), 위임(사명)이라는 다섯 가지의 진리가 적절히 포함되게 하고, 이에 더불어 자신의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생활과 예수님을 믿게 된 과정,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난 변화들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었습니다. 복음 제시 방법에 관한 매우 정확하고 명료한 정리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제에 관한 내용에서는 '제자 삼기는 이미 회심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지옥에 침투해서 그 감옥 문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옥에서 구출해야 제자 삼기를 할 수 있다'는 설명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자는 '잃어버린 자들을 자들을 제자로 삼아 회심하도록 하는 것이지, 잃어버린 자들을 회심하게 하고 제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말은 제자훈련이 사역자를 키워내는 훈련이라기보다는 회심자를 만들기 위한 훈련이라는 말처럼 느껴졌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생각해 볼 만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백 투 더 예루살렘을 시작한 시몬 자오라는 인물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통해 백 투 더 예루살렘 운동이 결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성경해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시작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 투 더 예루살렘 운동을 비판하는 분들이 이 내용을 읽어본다면 자신들의 생각을 철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투명성에 대한 설명에서는 '성경에 십자가를 앞두고 고민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기록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친히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맗씀해 주셨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지금까지 전혀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실인데다, 그 설명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훈련을 위한 소그룹인 D그룹 운영에 관한 조언들도 상당히 유용하다고 느껴졌는데, 예전에 유행했던 셀그룹이나 G12의 방식과 많이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평안의 사람'을 찾으라는 권면도 마음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저자는 복음에 적대적이지 않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평안의 사람'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초대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사람들 찾아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라 생각되었고, 이 이야기 덕분에 전도에 있어서 초점을 두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제자도의 핵심에 관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해서, 각각의 영역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들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앞으로 목회를 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지혜를 많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새들백 교회 이야기'보다 더 탁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별 여섯개도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책입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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