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는 비가 오는 날도 간혹 있지만, 이제 이곳의 날씨는 거의 완전한 봄이다. 눈이 가렵고 콧물이 잦은걸 보면 확실히 봄은 봄이다. 쌀쌀한 듯해도 해가 중천에 뜬 정오부터 오후까지는 꽤 따뜻한 것이 절로 밖에 나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간만에 객기를 부려봤다. 그간 열심히 달리기를 해온 결과 야외에서 한번에 뛸 수 있는 최대거리는 2.25마일로 늘어났다 (기계 위에서는 3.5마일을 30분 정도면 완주할 수 있다). 아무래도 피부가 타는 것이 걱정인 아시아계라서 보통은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뛰는데, 오늘은 정말 12년만에 정오에 작렬하는 캘리포니아의 태양을 맞으며 뛰어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2.25마일을 뛰고 약 1마일 정도를 걸었는데, 방향에 따라서 그늘도 있고 간간히 바람도 선선해서 아주 좋았다. 다만 실내에서 뛸 때와는 다르게 야외에서 뛰고 땀을 흘리면 좀 따끔거린다. 피부에 바른 것들이 땀에 녹아내리면서 소금기가 피부로 들어가서 그런 건지, 바람을 많이 맞아서 그런지 알 수 없다. 그저 조금씩 늘어가는 지구력에 감사하고, 여전히 꾸준하게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정직하게 일해서 벌어 먹고 사는 것이 감사하단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지난 주에 여러 가지로 시달린 덕분에 약간 우울했던 기분이 밝은 햇살을 맞고 나서 좋아진 것 같다. 역시 동물이나 식물이나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대부분의 것들은 해를 받아야 살 수 있다.
조정래선생의 필력은 대단하지만, 기실 '태백산맥'과 '아리랑', 거기서 조금 더 무리해서 포함시키면 '한강'까지를 끝으로 어느 정도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선생이 최근에 쓰신 책들을 몇 권 볼 기회가 있었는데, 여러 모로 아쉬움이 많았었다. '유형의 땅'은 신작이라기 보다는 그간 다른 책으로 엮어 나왔었던 단편들을 다시 모아놓은 책이다. 습작에 가깝다거나 다른 중편의 모티브로 보이는 이야기도 있고, 예전에 집에 있던 10권짜리 조정래 문학전집에서 본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전쟁과 근현대사의 이런 저런 장면들이 다양한 인간들의 삶속에 묘사되어 있기에 이 책을 보면서 지금 한국이 처한 상황의 시작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살아보고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한국의 지금에 대한 기시감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2차대전 이야기는 당분간 'Band of Brothers'를 넘는 것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같은 프로덕션에서 만든 'Pacific'도 그냥 그랬으니까. '언브로큰'은 조금 더 다르게, 개인의 서사로 태평양전쟁을 비춰보았다. 읽으면서 떠올린 몇 가지 포인트를 정리해 보았다.
1. 그냥 보통 미국애들: 기껏해야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까지가 대부분이었고, 태어나서 자기 마을 한번 못 벗어나본 애들도 많았다. 특히 태평양전선으로 나간 군인들의 경우에는 모든 면에서 자기들이 살아온 삶에서는 거의 경험할 수 없었던 아시아문화, 그것도 군사적인 면에서 매우 야만스럽기 그지 없던 일본군과의 조우, 그들의 전투방식이나 포로를 대하는 자세까지, 고생이 심할 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과 친구의 경우도 간신히 살아남는데, 이유는 주인공의 유명세 덕분이지, 안 그랬다면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처형되어 전혀 알려질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2. 인종차별: 미군이 일제와 싸우느라 적이 되었고, 일제와 적인 우리와는 적의 적은 우리편이라는 공식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 백인종들이 아시안을 차별하는데 있어 일제와 한국사람을 구별한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이들이 차별한 것은 황인종이고, 유색인종이었으므로.
3. 포로학대: 일제의 포로학대는 그 상상을 초월할 만큼 악명 높았는데, 일부는 물론 포로가 되는 것보다는 장렬한 전사를 권장하는 문화의 탓도 있었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냥 일제의 군대는 basically 현대식 살상무기를 든 중세의 군대 같은 점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벼락부자가 되어 온갖 이상한 짓을 하는 졸부처럼, 문화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서구화를 통해 현대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였던 것이 이들이 아닌가 싶다. 고문, 생체실험, 구타, 이유없는 괴롭힘, 학살 등 현대전에서 그래도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수준에도 못 미치는 포로대우를 보면서,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가한 온갖 악행은 더욱 끔찍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4. 책 곳곳에 강제로 징용된 조선인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심지어 성노리개로 삼아졌었던 조선과 아시아의 여자들에 대한 언급도 나오는 점은 좋았다. 보통 일본에 대한 책을 쓰면 서구열강의 입장에서 자기들이 입은 피해, 기껏해야 중국의 남경학살 정도를 다루는데 비해, 조금이지만, 더욱 포괄적인 일제의 전쟁범죄를 다룬 점이 신선했다.
5. 와타나베 무츠히로: 주인공을 끔찍하게 괴롭힌 드라마적으로는 안티히어로에 해당하는 변태. 전쟁이 끝나고 용케 숨어다니다가 천수를 누렸다고 하며, 전범죄로 처단되지 않은 사형수 수준의 변태전범. 책 끝에 이 놈이 하는 소리를 보면서, 보편적인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코스프레가 떠올랐다. 백번은 넘게 괴로운 생으로 다시 태어나길.
6. 상어: 남태평양의 더운 바다엔 상어가 많다. 아주 많아서, 배가 가라앉거나 비행기가 떨어지면 상어 때문에 큰 피해를 보았다고 하는데, 주인공이 표류 중일 때 겪었던 일은 진짜 믿어지지 않을 만큼 끔찍했다. 구명정을 건드리고 시험해보면서 타고 있는 사람들을 노리는 장면은 정말 무서웠다. 물속에 들어가면 큰 상어도 무섭지만 작은 상어라도 물리면 대부분 출혈과다로 죽기 때문에 하와이 같은 곳에서도 늘 조심해야 한다. 죠스 수준의 괴물이 아니라도 상어는 무섭다.
7. 책을 읽으면서 일본에 핵이 떨어진 건 결국 그들 탓이라는 생각을 했다. 인류사적인 관점에서, 순수하게 인간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핵이 떨어진 건 큰 비극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일제와 그에 부역한 일인들이나 암묵적으로 동의한 대다수가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고 본다. 전후처리도 그렇고,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미쓰비시 같은 일본의 대기업들, 극우 혹은 그에 기운 사관을 가진 자들을 보면서, 언젠가 그 나라엔 핵이 다시 한번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오전에 산뜻하게 운동하고 일찍 업무 몇 개를 처리하고, 점심시간에 뛰고나니, 적절한 페이스로 다시 일을 할 수 있다. 역시 움직이고 부지런히 다녀야 하는 팔자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