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예정한 두 케이스에서 한 개가 오늘 작업이 완료됐다. 내일 마저 예정한 일정에 맞춰 업무를 진행하면 6월은 그런대로 평온하고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고객들을 독려해서 2-3개 정도를 더 완료하고 마무리하면서 그간 미뤄온 회사 홈페이지 개정이나 다른 promotion작업을 진행하면 좋을 것이다.
마치 스웨덴 버전의 포레스트 검프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간 현대소설은 영미작가를 위주로 읽었고, 기껏해서 프랑스나 독일작가들의 책을 좀 건드려본 수준인데, 스웨덴작가의 책을 보니 느낌이 무척 신선하다. 생각해보면 좋은 책이 꽤 많이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 노인이 100세가 되는 날 생일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창문'을 '넘어 도망'을 치는데서 시작되는 이야기의 주인공 '노인'은 그다시 악하거나 특별히 선한 사람도 아닌 아주 평범한 수준에서 조금 모자라고 특이한 사람이다. 병원에 갇혀 지낸 시간이 너무 지겨워서 달아나면서 생기는 일은 그의 과거회상과 더불어 overlap되면서 다시 노인의 현재를 과거의 인물들과 연결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요나스 요나손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진다.
[하루키의 변]이라고 제목을 붙여도 좋을 듯. 하루키라고 쉽게 말하지만, 엄밀히 말해 내 부모님의 세대인 그는 이제 할아버지 나이가 된다. 하지만 수십년간 꾸준히 마라톤과 수영,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과 건강한 식습관으로 단련된 덕분인지 동년배보다 10년은 젊어보인다. 일본인 특유라기 보다는, 사실 나도 추구하는 삶의 형태인데, 어떤 규칙을 정해놓고, 이를 꾸준히 지켜온 사람에게서 뿜어지는 묵직하고 깊은 울림이 있다. 하루키의 책은 거의 다 봤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는 어쩌면 처음으로 그가 쓴 일종의 자기변명과 설명이 아닌가 싶다. 문학상에 대한 의견도 그렇고, 작풍이나 작가의 세계에 대한 그의 생각도 그렇고, 무엇하나 보편적인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그는 협회관행이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유사질서체계랄까 하는 것에 대해 꽤나 심한 반감을 갖고 있는 듯 하며, 언제나 outsider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인 듯 싶다. 그런 점이 그의 작품세계를 넘어 인간적인 매력 - 결코 가까운 거리를 허용하지 않을 것 같지만 - 을 느끼게 한다. 사람은 이렇게 자유롭게 생활하면 좋은데, 대부분 그렇지 못한 삶을 산다. 자영업자로서, 남들보다 직장이나 인간관계에서의 스트레스를 덜 받는 나조차 하루키처럼 살 자신은 없다. 하고 싶은 말도 갈수록 자제하게 되어 알라딘 서재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오픈하여 내 정치적인 의견을 말하는 경우도 좀처럼 없는데, 나이가 먹고 책임이 늘어가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그나마 내가 하루키를 흉내내는 것은 비교적 규칙적인 생활인데, 이도 어느 정도는 한계가 있다. 읽으면서 특별하게 느낀 점이 많지는 않고, 그저 하루키가 소설과 에세이로 꾸준하게 피력한 자신의 사상(?) 같은 것을 잘 정리해 놓은 점이 눈에 들어온다.
용대운의 걸작 [태극문]을 드디어 책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98년 10월 언제였던가? 당시 3학년으로 편입한 어떤 형한테 받은 CD한장에는 약 3000권 분량의 무협지가 잔뜩 들어있었다. PDF나 워드로, 스캔으로 만들어진 파일은 뷰잉프로그램을 사용해서 컴퓨터 모니터로 볼 수 있었는데, ebook이 활성화된 지금에야 별 것이 아니지만, 당시만해도 무슨 무공비급처럼 귀하게 취급한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때 만난 야설록의 '객'시리즈, 고룡의 '다정검객무정검', 용대운, 운중학, 그리고 좌백 같은 국산무협작가들의 책을 밤을 세워가며 읽곤 했다. 당시에는 한국어로 된 책을 구하는 건 한국에 나갈 때나 가능했는데, 그나마도 가방무게 때문에 10권 정도 사들고 오면 많이 가져오는 정도였기 때문에 읽던 책을 다시 또 읽는 것도 한 두번이지, 늘 새로운 책에 목말라하고 있었었다. 수업스케줄이 괜찮은 학기중반이나 주말에는 어김없이 맥주와 칩을 들고 모니터 앞에 앉아서 그렇게 이야기의 세상에 빠져들었던 기억은 누가 하라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지금에는 참으로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쓰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그 때의 내가 떠올라 살짝 웃게 되는걸 보면, 확실히 이제 내 인생은 looking forward할 것들보다는 looking back할 것들로 balance가 기울고 있는 시점인 것 같다.
가장 강한 무공은 무엇일까? 현란한 초식이 난무하는 수법? 묵직한 내가중수법? 검망을 피워올리는 강력한 검기? 기연으로 얻어진 육십갑자의 내공? 아니면,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도 중독시킬 수 있는 독공? 인간의 솜씨라고는 볼 수 없을 극악한 마공? 이들은 최소한 한번 이상은 작가에 따라, 이야기에 따라 주인공이 휘두르는 최상무공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태극문]의 발상이 멋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전혀 conventional하지 않은, 그러나 생각해보면 매우 논리적인 접근을 통해 최강무도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때문이다. 힌트를 주자면, 대련에서는 무에타이나 극진공수 같은 스타일의 단순하지만 강력하고 반복적인 수련을 통해 얻어지는 힘이 복잡다양한 무술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 [태극문]은 용대운 선생이 평생 자랑스러워해도 될 만한 걸작임에 틀림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