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를 이야기할 때 흔히 '평일 오후 3시에 여의도 공원을 걷'거나 그렇지 못한 것을 기준으로 표현하는 것을 본다.  실제로 이 비슷한 이야기는 누군가가 회사를 그만둔 그날 오후 3시에 여의도 공원을 걸으면서의 맘을 쓴 것인데, 출전은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2016년의 5월.  일단은 일정이 조금 정리가 되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 겨우 조금씩 할 일만 하면서 burnout된 자신을 추스리고 있다. 원래 이런 스케줄이면 오전에는 업무, 오후에는 영문홈페이지작업 등 다가오는 2017년을 위한 여러 가지 행정적인 처리를 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늘 그렇다.  이건 또 다시 맘을 다잡고 적응을 하면서 시간을 나눠야 슬슬 진행이 된다.  


오후에 잠깐 서점을 나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  내가 이곳에서 20년이 넘게 살아왔는데, 5월에 비가 오는 건 처음 보는 듯.  보통 늦어도 4월이면 비가 멎고 11월까지는 비가 오는 걸 볼 수 없는데, 엘리뇨의 영향이다.  그간의 심한 가뭄 탓에 이렇게 비가 오면 그래도 반갑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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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이어쓰기 시작한 건 5/8 일요일.  오전에 잠깐 서점에 가서 bargain으로 나온 책 몇 권을 사서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제 city와 county 도서관 카드를 만들게 되었다.  이들 두 개면 이 지역의 거의 모든 공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가져다 줄 수 있다.  다른 용도는 없고, 심심하거나, 가진 책이 잘 안 읽어질 때, 한국어 막소설을 빌려다 읽을 생각으로 만들었고, 어제 바로 다섯 권의 책을 빌려왔다.  보통 3주 정도 갖고 있을 수 있으니 괜찮은 수준이다.  도서관 branch에 따라 책장 몇 개에서 한 섹션의 한국어 도서를 갖추고 있다.  덕분에 갑자기 책이 더 많아진 느낌이다. 


저자의 팟캐스트 강연을 듣고 산 책.  남자라면 어릴 때 한 번 정도는 공룡에 흥미를 가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도 T-Rex와 트리케라톱스 장난감을 갖고 놀았고, 공룡백만년똘이 같은 만화를 보면서 T-Rex = 나쁜 놈, 트리케라톱스 = 우리의 친구 같은 등식을 꽤 오래 갖고 있었다.  과학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지만, 공룡이란 것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저자에 의하면, 연구가 계속되고 발굴이 이루어질 수록, 그리고 현대에 들어 발전된 scanning이나 modeling기술을 적용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공룡의 모습도 계속 변하고 있으니, 지금 '과학적'으로 올바른 이론이 고작 10년 정도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것이다.  워낙 많은 공룡들이 아주 오랜, 인간에게는 영겁과도 같은 세월 이전에 지구를 지배했었고, 어쩌면 인간종 전체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 이곳에서 진화하면서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었는데, 어림잡아도 이들 공룡이 지구를 지배한 시간은 수 백만 년이 넘는 것으로 안다.  우리가 아는 틀에서, 인간이 그렇게 오래 산다면 엄청난 변화를 겪을 것이 분명한데, 공룡 또한 그랬기에 이 책에서 특정한 것은 가장 유명한 여섯 종의 공룡이다.  사실 공룡은 그 큰 몸체와 아스라한 기억속의 미스테리 덕분에 괴물처럼 인식되기 쉽지만, 이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저 남은 화석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들이 '공룡'인류의 전부가 아니고, 다른 종으로, 그러니까 문명화를 이룰 수 있는 수준의 종으로 진화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했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UFO는 어쩌면 외계로 갔었던 이들의 후손이 다시 고향을 방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득히 먼 시대, 우리의 기억과 역사가 미치지 않는 시절에 지구에 존재했었다는 고도로 발달한 인간종의 기술문명 이전에, 어쩌면 공룡종의 기술문명이 존재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책에서 다루는 건 이런 주제가 아니지만.


저자는 공룡은 멸종하지 않았고, 새와 다른 파충류 생물로 진화해서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 살아있다고 한다. 그런데, 작년 이맘 때 갔었던 타조농장에서 난 이를 실감하는 경험을 했다.  타조의 얼굴과 눈을 보면서, 무엇보다 튼튼한 다리를 보면서 난 새의 조상이 공룡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현재의 학술에 의하면 새는 공룡의 후손 일부로 분류된다고 이 책에 나와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 공룡을 보면서 살고 있는 셈이고, 진화는 학술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읽었던 것 같기도 한데, 장서목록을 보내 내가 갖고 있는 히가시노의 책은 아니다. 아마도 이런 비슷한 모티브의 만화책이나 다른 작품과 혼동한 것 같다.  

결혼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죽은 여자.  그녀의 사촌자매, 부모, 오빠 등의 가족과 약혼자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 곳은 대기업의 오너인 망자 아버지의 별장.  그런데 이 자리는 그녀를 추모하기 위한 자리에서 어떤 계기로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추리를 논증하는 것으로 바뀐다.  다양한 트릭과 장치, 그리고 grand finale까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안배까지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히가시노의 책은 빠른 페이스로 쭉 읽어내려가도 큰 무리가 없고, 추리활극의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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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어쓰는 월요일 5/9/2016.


앞서의 책도 그랬지만, 확실히 요즘 읽는 히가시노의 책은 다소 무리하게 트릭을 배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거의 속임수가 가까운 앞서의 판 뒤엎기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clue를 주더라도 독자에게 허용되지 않은 fact로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만드는 건 반칙이다.  재미있게 읽기는 했고, 책이 나오던 시기의 유행과도 꽤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는 등 반전을 적절히 잘 사용했다는 생각은 든다. 다만 역시 약간 멀찌감치 떨어진 자세로 즐기면 적절한 활극을 벗어나진 못했다는 생각이다.


빅 픽쳐를 보고 재미는 있었지만, 보관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기에 이 책이 도서관에 있는게 반가웠다.  냉큼 집어들었고,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약 한 시간 반 정도에 깨끗하게 끝낼 수 있었다.  요즘 entertainment비용을 생각하면 역시 이제는 책이 가장 저렴한 오락매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예전에 스티븐 킹 소설을 잔뜩 집어들고 헌책방 계산대에 섰을 때 들었던 말 같은데, 정말 그렇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모든 것을 잃고 - 역시 불륜테마 - 파리로 넘어온 중서부 3류대학 교수출신의 주인공이 겪는 희안한 인생유전과 사건.  추리와 서스펜스, 그리고 약간의 호러물을 넘나드는 장르파괴성이야 현대소설에서 그리 낯선 방식은 아니지만, 설마 스토리가 그런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못했기에 반전은 나름 신선했다.  오히려 이전 작품보다 이 책이 소장가치가 있을 것 같다.


해리 보슈 시리즈가 한국에서도 꽤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일전에 읽은 이 시리즈 최신작을 보고 재미는 있지만 내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읽은 '혼돈의 도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추리소설을 보면 일종의 illusionist의 마술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 방향으로 계속 독자의 추리를 몰아놓고 정작 사건의 단초는 엉뚱한 곳에서 나오는 이 작품도 그런 느낌이다.  좀 생뚱맞지만 '적은 혼노지에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산문집. 작가는 처음으로 본 김영현 선생인데, 학생시절부터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바 있다.  박정희정권에서, 그리고 전두환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사상의 바탕을 굳건히 지키고 계시는 듯.  저서를 찾아보니 꽤 많이 나오는데, 동화도 있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책도 있으며, 심지어 선도기공에 관한 책도 있으니 연배에 맞게 상당한 다작인 듯 싶다.  


짧은 글을 모아 책 한 권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깊은 울림을 주는 건, 이분이 작가가 되던 시절만 해도 지금과는 달랐음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사실 모든 것이 제도화되고 규격화되어 찍어나오는 요즘의 세태에 따라 작가도 작품도 그렇게 문창과->문학상등단 혹은 출판으로 이어짐에 따른 공장도 제품의 느낌을 많이 받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지만, 대략 80년대 말까지, 그러니까, 아직은 작가들이 '교수'자리를 차고 앉기 전, 기껏해야 수도권의 이러 저런 글쓰기 강사로 들어앉기 시작한 그 시절까지만 해도 글을 쓴다는 건, 엄청난 세월의 습작과 자기류의 개발에 공을 들인다는 의미였던 것이, 이제는 작가가 되려고 - 다른 무엇과 똑같이 - 대학을 가는 시대가 된 것이다.  거기서 묻어나는 상업성, 규격화, 제도화, 그리고 줄타기까지, 우리말로 쓰인 현대소설에 조금씩 관심과 애정을 늘려가고 있으면서도 가끔씩 이들이 싫어지는 이유가 오직 나의 편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데모하던 시절, 글쓰다 잡혀간 시절, 박정희가 총맞아 뒈지고 좀 살만해지나 싶다가 바로 전두환이 그 자리를 찾이하고 벌인 예비검속으로 죽도록 맞고 또 맞고...글쓰는 사람한테도 이렇게 했으니, 어쩌면 전두환이 80년 5월, 광주를 피바다로 만든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일지도 모르겠다.  보통사람이 집권하고 심지어 문민정부가 들어선 다음에도 사회 뒷편에서는 계속 검거와 고문이 이어졌다는 사실도 김선생의 글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는데, 이제와서 보니 90년대에도 계속 된 화염병 시위와 점거농성은 역시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연대생들을 고사시키려고 물을 끊어버리고, 풀어준다는 거짓말 후 뒷문에서 한 명씩 연행되던 그들의 모습이 시대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  


박완서선생과의 추억도 여러 차례 언급이 되는데, 개인적으로 박완서선생의 책을 별로 읽지는 않았고, 한때 이민자들 - 정확히는 IMF당시 한국을 떠나던 사람들을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는 쥐떼로 묘사한 것을 보고 지금까지도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분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문득 이 책에서 또한 여러 번 언급된 김지하를 생각하면서 그가 죽고나면 좋은 말은 별로 못 듣겠구나 싶다.  멀리 있던 나도 생생하던 것이 90년대 운동권의 치열함이고 당위성인데, '죽음의 굿판을...'어쩌고 하던 김지하는 용산을 보고서도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이문열이나 김지하나 얄팍하고 가벼운 문사의 나쁜 모습을 보여주는데, 뭐 그들만 그런가. 박근혜비판에 열을 올리는 도올선생도 잠깐이지만 이명박에게 기대를 했었고, 황석영작가는 역시 엉뚱하게 갑자기 이명박의 중앙아시아 국비낭비출장에 동행하지 않았던가.  괜찮은 작가를 찾은 것 같기도 한데, 내가 받은 impression과 다를까 살짝 두렵기도 하지만, 김선생의 책 몇 권을 더 구해볼 생각이다.  


모어와 모국어가 다른 것임을, 재일조선인의 이슈가 단순한 국가통합이나 민족의 문제 이상의 큰 것임을, 지금까지 이어지는 차별에 있어 한국/북한정부나 일본정부 모두 큰 책임이 있음을 일깨워 준 선생의 책들 중 내가 읽은 3-4번째.  말 그대로 '디아스포라'를 떠돌며 느낀 이야기.  아무리 노력하고 몸부림친들 평생 outsider를 벗어나지 못할 선생의 삶이 가슴아프다.  사이드와 프리모 레비를 주축으로 주류에 편입될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책은 읽는 내내 속이 불편하고 시릴 수 밖에 없었다.  꾸준히 읽게 만드는 힘은 그 절절한 슬픔과 비통함, 그 이상 속 깊이 다가오는 평생의 투쟁에서 오는 피로감이 아닐까.


평생의 싸움이라면 살만 류슈디 역시 초보가 아니다.  '악마의 시'를 발표한 이래 무척 오랜 기간을 살해위협에 시달렸고 이는 호메이니옹이 죽을 무렵에서야 풀린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한들 그 경험이 사라지겠는가.  

보통 읽는 책은 한중일과 미국/유럽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편향되지 집중되어 있어서 그랬는지 인도와 다른 소위 3세계의 일상과 사고를 보여주는 지적산책이 매우 즐거웠다.  기발한 이야기도 있고, behind story를 알지 못해 우화임을 알면서도 너무도 난해했던 이야기도 있다만, 동 작가도 그렇게 같은 시리즈로 편집되는 책을 더 구해보고 싶다.  


금-토-일 주말엔 책만 읽은 것 같다.  그야말로 폭풍독서가 되어버렸는데, 일종의 '도서관깨기'도 생각하고 있다.  San Jose 시립도서관이 본관-지부를 합쳐 24곳, Santa Clara 군립도서관이 8군데로 모두 32곳의 도서관 곳곳에 한국어 도서가 흩어져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연고도서관끼리는 빌린 책을 아무곳에나 반납할 수 있어서 읽은 후 다시 먼곳까지 갈 필요가 없어 더욱 그럴 듯 하다.  내가 가진 책도 많고, 이들도 다 못 읽고 있지만, 남이 디자인한 서재를 보는 건 언제나 새로운 경험이고 눈이 즐거운 한때의 모험이다.  전혀 모르는 작가를 발견하기도 하는 등 좋은 경험을 했고, 공립도서관이 책과 음악 CD, 그리고 영화 DVD/BDVD까지 빌려주는 것을 보면서, 돈이 없이도 많은 것을 즐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른 곳도 좋겠지만, 책을 사랑하는 나는 기부를 한다면 조금이라도 공립도서관에 보내야겠다.  그게 지금으로써는 내가 책의 신에게 보답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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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6-05-10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이 없어도 많은 것을 즐길 수 있구나 하는데서 ( 빙그레 ) :)
계신 곳에서는 한국책 빌려주는 도서관도 있나봅니다. 여기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지 않는 해요. ( 저도 그렇지만 ) 가끔 도서관에 가보면 , 텅-

저도 다시 읽기 생활을 시작해야겠어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transient-guest 2016-05-12 01:31   좋아요 0 | URL
일단 궁금하던 소설을 찾아 읽는 것도 좋구요, 맘만 먹으면 영화나 음반도 빌릴 수 있으니까요, 모두 무료로..ㅎ 여긴 아무래도 아시안 인구가 많아서 한국책도 구할 수 있네요.ㅎ

yamoo 2016-05-1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 진진한 책이 가득하군요! <공룡열전>이 궁금합니다. 교보 갈 때 읽고 와야 겠습니다~ㅎ

폭풍독서...정말 부럽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트랜스님~^^

transient-guest 2016-05-12 01:31   좋아요 0 | URL
나쁘진 않았습니다. 조금 늘어지는 부분도 있는데, 강연을 듣고 읽어서 그런지 괜찮더라구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