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하게도 친구가 가자마자 업무의 쓰나미가 밀려왔다. 자주 겪는 일이고,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었기 때문에 당황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어쨌든 이번 주는 초반부터 열심히 달리고 있다. 살짝 짜증을 유발하는 일부 업무와 고객 때문에 혼자서 입에 욕을 달고 있을 때도 있지만, 그건 특정한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고, 다행히 듣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저 내 인격이 살짝 깎이는 경험으로 비용을 치루고 만다. 단 어느 정도의 예상에 따라 예정된 스케줄을 잡았던 것보다 좀더 급하게 처리될 일이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더 일하고, 조금씩 더 밀린 일정을 견디는 것이 생각보다 피로도가 높다. 일례로, 어제 꽤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보통은 무리가 없었을 5시 기상 후 새벽운동이 전혀 가능하지 않았던 것. 중간에 잠깐 일어나긴 했지만, 밤에 하필이면 꿈도 많아서 숙면을 취하지 못했고, 덕분에 8시까지 늘어져 자버렸다. 지각출근 후 열심히 일하다 보니 벌써 오후 4시. 더 짜내도 나올 것이 없는 남은 시간이라서 밀린 책정리나 하기로 했다.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을 기준으로 일년 52주를 휴가 없이 열심히 일했다고 할 때의 billing hour는 2080시간이 된다. 그런데, 대형로펌의 경우 연간 변호사 일인당 부과된 required billing hour는 평균 2400에서 2500시간이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규모가 작을수록 billing hour는 내려가서 연평균 1500에서 2000시간 사이 정도로 보는데 이 정도면 꽤 상식적이다. billing hour라고 하면, 고객에서 청구할 수 없는 내부회의, 점심시간, 기초정리 및 리서치 등은 제외하고 계산하게 되어있고, 직급이 낮을수록 고객의 항의에 맞춰 시간을 깎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초기 3-5년은 대형로펌에서 살아남는 것이 매우 힘들다. 공부를 잘해서 바로 대형로펌에 채용됐던 내 친구들 대부분이 첫 3년을 버티지 못하고 나왔는데, 실제로 top 10 로펌의 경우 입사한 신입 변호사들의 90%이상이 첫 해를 넘기지 못하고 퇴사한다.
딱 한 명이 남아서 거의 파트너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 녀석은 늘 우울하고 피곤해한다. 일 자체는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분야라서, 그리고 그 분야가 대형회사들이 관련된 법이라서 작은 사무실로 옮기거나 자기회사를 차릴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언젠가는 나올꺼야' 하면서 버틴게 벌써 10년이 넘었다. 대단한 이 친구가 작년에 billing hour만 2800시간을 채웠고 한달에 반 이상을 출장으로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이고, 아마도 지금 상태에서는 갈 수도 없는 곳이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삶이다. 안정적이고 높은 pay와 대형로펌에 소속된 상대적인 자부심을 빼면 그나 나나 결국 고객을 위해서 일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난 내가 원하는 시간에 퇴근하고 운동할 수 있고, 책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상대적으로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본다.
포와로도 미스 마플도 등장하지 않는 이 간막극은 그 나름대로 훌륭하다. 중간의 플롯설정에 중요한 clue가 들어있는데,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완벽하고 빈틈이 없는 사람은 그만큼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 힘을 주체할 수 없이 한순간에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점을 새삼 상기시켜주는 설정이었다. 죽은 바보가 불쌍한건지, 죽인 사람이 불쌍한건지 아직도 확실하게 맘을 정할 수가 없다.
'아스나로'는 우리식으로 옮기면 '될성싶은 떡잎'정도가 되려나? 아스나로가 대성하지 못하면 그저 아스나로로, 아니면 그만도 못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게 마련이다.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 그리고 패전까지 아유따라는 주인공의 눈으로 바라본 일본의 평범한 풍경을 엿보았다. 기분이 나쁘게도 전쟁의 잔인함이나 식민지조선의 비참함은 주제가 아닌데, 이건 이들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아예 그런 방향으로 생각을 하지 않았을 터. 그런 불쾌함을 그나마 달래준 부분은 다음이다.
"종전 발표가 방송되던 날 아유따는 종전 바로 그날의 거리 모습을 기사로 작성했다...기사의 내용은 아유따 자신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그것은 아유따가 지난 몇 년간 그럴 듯하게 써온 기사들과는 달리 어떠한 의도도 주장도 갖지 않는 가장 기사다운 기사였다...필승의 신념이란 말도, 조국을 지키는 황군이란 말도 필요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유따가 신문기자가 되어 쓴 최소의 기사다운 기사라고 해야 할 지도 몰랐다."
일본이란 나라의 근대화는 군국화에 다름 아니었다고 볼 때, 패전 이후의 일본이야말로 민주적인 자각을 갖게 되는 국가의 형성이 시작된 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항목이다. 이리 저리 쏠리다가 전쟁이라는 인식이 없이 전쟁에 차출되어 죽어나가고, 한쪽에서는 그 전쟁을 찬양하고, 일왕의 자식이 되어 군민일체로 죽고 죽이던 일본의 모습이 수 많은 아스나로들에서 보인다. 거기에 비록 식민지조선의 비참함, 그 상태에 대한 죄의식은 볼 수 없겠지만, 그나마 이 정도라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다. 스토리 자체도 꽤 재미있게 쓰여 있어서 매우 쉽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생각해보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한국의 공장장 김성모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없지 않다. 다작이고 과작이고 매우 빠른 작품생산을 자랑하는 이 두 사람. 김성모는 자타가 공인하는 공장장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아직 그 작업형태가 밝혀진 바는 없다. 이른바 ghost writer나 대리필진이라는게 예전부터 공공연히 있어왔기 때문에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략의 구성과 인물구도를 잡아 놓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작업한다 해도 놀랄 것 같지는 않다. 이미 한국의 많은 베스트셀러 작가들, 특히 non-fiction이나 art계열의 writer들이 이렇게 책을 팔아먹은지 오래다.
책에서 보여진 모티브는 TV 드라마나 영화, 또는 서구의 근대소설에서 많이 다룬 바 있어 하나도 새롭거나 신선한 점은 없었다. 다만 그 반전에 더해진 또 하나의 반전만이 특이했을 뿐이다. 쉽게 머리를 식히면서 읽을 정도의 작품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중에서 특이한 작품도 많고 보다 더 치밀하게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들도 많이 있는데, 이 작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닌 듯 싶다.
토니 세바의 '에너지 혁명 2030'은 다른 책들과 함께 모아 쓰는게 낫겠다 싶어서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