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서재의 방문자 숫자가 말도 안되게 껑충 뛸때가 있다. 마치 예전에 싸이월드를 하면서 방문자 숫자를 헤아리는 마음이 절로 나게 한다. 요즘 한국이 매우 더운 탓인지, 월드컵 탓인지, 이곳 시간으로는 오전, 한국 시간으로는 깊은 밤을 지나 새벽이 한참이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클릭질의 흔적을 볼 수 있다. ergo "밤을 잊은 그대에게." 불특정 다수에게 그냥 던지는 한 마디인 것이다.
이곳, 그러니까, 미국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날씨,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는 넓은 권역을 포함하니까, 말 그대로 이곳 SF일대의 여름은 일단 습하지 않다. 여름에는 거의 비를 볼 수 없는 다소 dry하고, 거기에 바다에서 가까운 일부 지역은 해양성으로 해는 뜨겁지만 하루 중 선선한 시간대에는 거의 여름을 느끼지 않고 산다. 더위를 많이 타는, 게다가 한국을 떠난지 오래되어 이미 열대지방의 여름으로 바뀐 한국의 계절에 적응하기 힘든 나로써는 이곳의 날씨가 꽤 마음에 든다. LA처럼 무식하게 덥지도 않고, 뉴욕이나 DC처럼 보다 예전의 한국 여름과 같이 습하지도 않은 이 날씨는 그러나 한 가지가 부족한데, 이는 내가 기억하는 예전 한국 여름의 낭만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다. 시간이 지날만큼 지나면 어지간히 힘들었던 일들은 모두 잊혀지고, 그 시절의 아스라한 잔영만 '좋았던 옛 시절'의 설탕가루를 뒤집어 씌운 아름다운 기억만 남는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렇게 윤색되는 것인데, 정확성의 유무와는 별개로 그리 나쁜 현상만은 아니다. 과거를 돌아볼 때, 예전의 안 좋은 것을 기억하고 끄집에 내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고, 피곤하며 파괴적일 수도 있기 때문인데, 과거의 나쁜 기억에 얽매여서는 절대로 앞으로 나갈 수 없음은 익히 알고 있음이다.
내게는 한국의 여름하면, 장마나 태풍으로 인한 장대비가 시원하게 내려주는 늦은 오후나 저녁의 풍경과 한밤중의 빗소리가 떠오른다. 내가 마지막으로 한국의 여름을 경험한 것은 2004년의 일로 이미 10년이 훌쩍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아마 지금의 날씨는 그때와는 또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더운 낮을 지나서, 편안하게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무렵의 장대비는 먼지를 가라앉히면서 풍기는 냄새로 시작해서 귓전을 때리면서 치맥을 생각나게 하는 등 오감을 잔뜩 건드려준다.
그렇게 빗소리를 들으면서 tv나 라디오를 배경으로 깔아놓고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면 으례 배가 고파지게 마련이다. 이때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마트에 가서 무엇을 사오거나 drive-thru밖에 없지만, '배달민족'의 후예답게 한국, 그것도 대도시에는 24-7으로 판을 치는 수 많은 먹거리를 골라, 심지어는 맥주와 함께 배달을 시킬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그렇게 배가 부르는 대로 치킨이던 중국음식이던, 정체불명의 '까스'들이던 시켜서 한상 펼쳐놓고 맥주캔을 따는 순간 적어도 그 잠깐의 시간속에서는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다. 생각해보면 치킨이나 중국음식 보다는 이곳에서 자주 접하기 어려운 '까스'들이 술안주로는 제격이었던 것 같다. 달러 기준으로 그리 비싸게 느껴지지 않았고, 개인적으로 모자라느니 넘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어서 항상 모든 것이 다 포함된 '정식'을 시켜 맥주와 함께 배둘레민족에게 조공으로 바쳤던 것.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2004년이면 law school 마지막 학년을 남겨둔, 그러니까 그 뒷날의 bar exam과 취업 등 오만가지 잡스러운 일들이 닥치기 전, 그야말로 내 청춘의 마지막이었구나 싶다. 그때까지는 내가 사랑한 김모형도 건강하게 자기의 일을 하고 있었고, 방송국 PD로써 어려운 스케줄에도 여러 번 만나서 술 한잔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비슷한 기질의 사람이라서 항상 웅심을 키울 수 있는 대화를 하고 꿈을 꿀 수 있었던 형인데, 이런 사람을 살면서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하면 참 울적하다.
무더운 여름이고 열대성 스콜이 쏟아지는 황당한 기후로 변한 한국이지만, 그래도 여름은, 아니 정확하게는 여름의 장마가 쏟아지던 늦은 저녁부터 새벽까지의 시간은 그렇게 나에게는 또하나의 이상향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지금도 잠못이루로 뒤척이는 이가 있다면, 한번 정도 그렇게 시원하다 못해 머리가 뻥 뚫어질 것 같이 차가운 맥주를, '까스'정식을 안주삼에 한밤중에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책도 한 권 있으면 좋겠는데, 이럴때엔 깊은 철학이나 문학보다는 가벼운 추리소설, 그저 읽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이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책을 한 권 벗삼아 그렇게 더위를 잊어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