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는 왠지 아무리 피곤해도 늦게까지 TV를 본다거나 하면서 밤을 보내다가 잠자리에 들기 일쑤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토요일 밤은 무엇인가 아쉽다. 그렇다고 밖으로 뛰쳐나가서 불타는 토요일을 외치기에는 나이로 보나, 기질로 보나 잘 맞지 않는다. 한국에서처럼 비슷한 또래의 오랜 친구들과 함께라면 모를까, 이곳에 살면 자연히 바른생황맨이 되게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교포사회를 보면 취미라고 해야 골프나 술, 간혹 카지노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통이다. 골프를 치면서 내기를 하는 경우도 많고,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인지라 DUI는 카지노 중독과 함께 이민자 사회의 큰 골칫거리인 것 같다.
12시가 넘은 시간에 침대로 기어들어갔음에도 오전 5-6시면 눈이 떠지는 체질이라서 조금 게으름을 피우더라도 8-9시면 운동을 하게 된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렇게 주말운동을 마치고는 장을 보고 점심을 해먹고는 TV를 보면서 졸다가 책이라도 읽자고 보니 저녁시간이 되어간다. 일견 단조롭게 느껴지는 삶이지만, 이런 평화가 나는 좋다. 도시의 화려함이나 시끌벅적함 보다는 지금 사는 곳보다 더한 교외지역이도 넓고 조용한 땅에 지어진 집에 넓은 서재를 갖추고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파티보다 더 좋다. 사람도 좋지만, 자기 시간을 갖는 것이 조금 더 좋다고 할까?
어제는 그렇게 늦게까지 깨어있으면서 다시 한번 하루키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었다. 책이란 그렇게 몇 번은 읽어야 처음에는 스쳐지나가기 쉬운 표현, 플롯, 수사, 은유 같은 작가가 의도했을, 아니면 의도하지 않고서도 넣었을 것들을 잡아낼 수 있다. 그것도 매우 자연스럽게 말이다.
왜 이 책을 다시 읽었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저 우연한 순간에, 내 손에 그 책이 잡혔고, 펼쳐낸 내용이 맘에 들어 읽기 시작한 것 뿐이다. 작년 하반기에 거창하게 하루키 다시 읽기를 제창하고나서 오히려 한 권도 제대로 읽기 힘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역시 자연스러운게 좋은거다.
강신주 박사는 하루키의 책을 가리켜 문학적인 포르노라고 했다. 그의 전 작품을 빗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상실의 시대'가 지금까지도 잘 읽히는 까닭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고 신랄하게 까던 것이 생각난다. 강신주 박사의 독설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부분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그만큼 철학에 미쳤거나 책을 많이 보지는 못했을 것이고 삶에 대한 깊은 고민 또한 없었기에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하루키 문학에서 풍기는 설익은 것에 대한 냄새가 좋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하루키의 시작과 끝은 이 책이다. 이 책으로 데뷔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들어 있는 것이다. 옴진리교 사건을 모티브로 한 1Q84를 제외하면 그의 유명한 작품의 모티브는 이 책에 거의 전부 들어있는 것 같다. 이 책의 한 문장이나 문단이 훗날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이 되기도 했고, 이 책의 문장을 키워 만든 두 번째 책이 다시 세 번째에는 더욱 긴 작품으로 나온 것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렇게 보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하루키라는 작가의 처음과, 어쩌면 마지막이 마치 시공간이 얽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한 순간에 존재한다는 아득한 4차원의 무엇처럼 그렇게 이 책 하나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연 익히 알려진 그의 말처럼 진구구장에서 어느날 갑자기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바로 작품활동에 들어간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하루키 문학사에 있어 빅뱅의 순간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작가인생이 거의 40년이 되어간다는 사실에서 놀라움과 세월의 무상함을 동시에 본다.
또 무엇인가 붙잡고 읽을 시간이다. <마의 산>이, <2001: Space Odyssey>가, <분신>이 그렇게 반 정도 읽힌채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는 마무리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 읽을 수 있다. 책과 운동을 위해 일하는 삶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