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다 읽었는데, 후기는 오늘에서야 겨우 남기게 되었다.  문제는 내용이 가물가물하다는 것, 나아가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도련님' 같은 작품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문체로 쓰여진 몽환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작품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지만, 일차사료로써 일본의 평범한 사람들이 대륙에서의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을 유추할 수 있는 단락이 있다.  알다시피 일본의 '전쟁 피해자' 가면놀이는 유명한 일본의 파렴치 덕목이라고 하겠다.  전쟁을 일으키고 이를 지지했다는 점은 어느새 뒤고 빠지고, 교묘한 교육과 기억의 조작을 통해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부풀리고, 나아가서 자기들이 전쟁의 희생양이라는 점을 피력할 때 흔히 드는 예가 일본의 일반 대중은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설'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도 지적한 바가 있지만, 이는 완전한 허구이다.  분명, 대다수의 일본 대중은 전쟁을 지지했었고, 전쟁이 가져다 줄 넓은 땅과 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책에서도 이런 점은 전쟁에 징집되어 나가는 젊은 남자를 바라보는 촌로의 발언에 반영되어 있다.  읽는 내내 이 부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한국의 한심한 현 정권의 행태와 일본의 세습 정치인들의 작태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1%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노동자'이다.  그런데, 이 절대다수의 '노동자'들 중 비교적 중상층부에 위치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본가'인줄로 착각하고 있다.  또한 일반 노동자들 역시 자본가 계층으로 편입할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식화가 아닌 '탈의식화', 그러니까 우편향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미래로 가는 길이다. 

 

일부 발언은 너무 '쟁의'나 '투쟁'에 대한 부분에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에 공감이 어려웠지만, 분명 나 자신도 '노동자'라고 생각하고 사는 바, 확고한 목적의식과 사고를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분열이 아닌 단결된 힘을 갖고, 뚜렷한 목적의식에 입각한 투표를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꾸는 그 시작이 가능하다.  부정선거에 의한 박근혜의 당선, 하지만, 꽤 많은 노동자 계층이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탈의식화'는 요원하지만, 꼭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까지 읽고서는 3-4일을 아무것도 제대로 읽지 못하였다.  간혹 찾아오는 독서불감증이 도진 것인데, 여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너무 바쁘거나, 너무 안 바쁜 경우, 그리고 삶의 이런 저런 문제들이 각각의 또는 총체적인 원인이 되는데, 여기에 책을 너무 많이 쌓아놓는 것도 독서불감증을 한층 더 심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한 달 전엔가 주문한 문학과 판타지 소설들이 모두 도착했고, 이들은 그 전에 쌓아둔 다른 책들과 함께,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한 동안 신간 주문도 자제해야 할 만큼 많은 책이 쌓여있는 것인데, 일견 행복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이런 때에는 만화책을 읽어주어야 해소가 되는데, 지금 내 주변에는 만화책이 없다. 

 

차선책으로 독서불감증을 해소하기 위해 내가 읽는 책은 독서나 책에 관련된 책이다.  한국의 글쟁이들, 한국의 책쟁이들과 더불어 손쉽게 읽는 책은 지식인의 서재이다.

 

 

 

 

 

 

 

 

 

 

 

 

 

 

 

그런데, '지식인의 서재'를 읽으면서 이번에는 각 '명사'의 얼굴과 상을 보면서 그들이 말하는 바를 되새겼다는 점이 이번의 특이점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읽으면서 과연 그들의 삶이 그들이 책을 매개로 하여 쏟아내는 말과 얼마나 근접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의외로 반 정도는 삶과 책이 따로 논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책에 쓰인 글의 깊은 맛 이상, 이렇게 사람과 그의 말을 비교하면서 음미하는 것도 색다른 감상을 준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받은 느낌이 그렇게 많이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점은 조금 씁쓸했다.  같은 맥락에서 유영익이라는 사람, 이번 교학사의 역사조작의 중심에 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충분히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면 과장일까?  마흔이 되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어린 아이도, 이십대의 젊은이도 자기 얼굴에 자신의 삶이 어느 정도 반영이 된다.  그러니까, 유영익 정도의 나이를 먹은 사람의 얼굴에는 그의 삶의 여정이, 철학이, 사고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좌우를 오가면서 노른자위의 요직을 골라먹고 사는 모 대학 총장 출신의 모씨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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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10-23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국 노동대중들도 제국주의 시절엔 식민지 거느리는 데 찬성했지요.혹시나 국물이 떨어질까 하고요...부르주아 민주주의란 제국주의 시대와 보조를 같이했기 때문에 좀 찜찜합니다.

transient-guest 2013-10-24 01:12   좋아요 0 | URL
4대강 파괴를 방조하거나 내심 찬성한 다수의 사람들이 가카를 뽑을 때에도 이런 심리였을 것 같아요. 결국 사회 전체의 의식수준이 높아져야만 개혁을 지속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