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레아 기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글을 거의 다 썼다가 Back Space키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싸그리 날려버렸다.  일이 그렇게 되려고 했는지, 마침 임시저장도 되어있지 않았기에, 말 그대로 싹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일단, 쓰던 글을 다시 복제해내거나 되살리지 못한다.  그냥, 알라딘 사이트를 닫아버리는 것이다.  오늘도 그랬다. 그렇게 날려버린 글에 살짝 화가나서 이짓 저짓을 하면서 글을 살려보려고 하다가 결국은 임시저장 옵션만 매 일분간격으로 바꾸고 점심운동을 하러 나갔다 들어와서도, 한참 지난 후에야 다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은, 요즘에, 아니 이전부터, 아마도 블로그가 활성화되고부터는 더욱 많이 나도는 그런 시중의 여행기가 아니다.  멋들어진 사진과 개인적인 사연을 보면 책이 아니라 온라인에 훨씬 잘 어울리는 듯한 그런 책들, 혹은 특정 지역이나 그 지역 관광청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그럴듯한 제목의 책도 아니다.  제목부터가 심플하다 못해, 매우 일반적이기까지 한 '모레아 기행'이다.  '모레아'는 위키에 의하면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 고대의 전쟁지역으로도 유명한 - 를 일컫는 말인데, 중세와 20세기 초엽에 이 지역을 부르던 말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또한 한때 비잔틴제국의 일부이기도 했었다고 하니, 고대 그리스의 유적부터 동로마제국의 유적들까지 볼거리가 참으로 많았을 것이다.  이런 좋은 곳을 카잔차키스라는 대가와 함께 걸어다니면서, 그의 생각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이는 불가능하다, 아니 그와 함께 걸었다고 해도,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속으로 실시간 체널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아직은 가능하지 않으니까.

 

사진이라고는 책 중반부에 실린 초라한 흑백사진들 몇 개가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간 들여다본 많은 여행기들과 블로그들 중 단연 최고의 서술과 깊이를 자랑하는 이 책은, 역시 대가는 괜히 대가라고 불리우는 것이 아니구나를 느끼게 해준다.  일례로 '그리스인은 말라리아와 과대망상증이라는 두 가지 열병에 걸려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인이 떠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말라리아는 좀 생소한 정보이지만, '과대망상증'이라 표현되는 그리스인들의 천박한 허영(?)은 낯설지 않다 (현대의 이탈리아인들도 좀 그렇지 않을까 싶겠지만, 그리스인들만큼은 아닐 것이다). 

 

맘에 드는 문장이나 묘사가 한 두 개가 아니었지만, 일일이 밑줄을 치면서 읽는 것보다 한 호흡으로 읽어내고 싶어서 자제했다.  그 덕에 쓸만한 문장들을 많이 놓쳐서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다음번에 그리스가 떠오를때 하루키의 '먼 북소리'와 함께 읽으면, 그 때에는 꼭 밑줄을 그어가면 읽을 것 같다. 

 

작년에 케이스가 수임될 때마다 조금씩 사들였던 책들 중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이 다수 들어있다.  앞으로도 그와 함께 러시아, 영국, 스페인, 그리고 지중해를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별로 맘에 안들었다.  내가 동양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당시 조선의 위치에 맘이 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카잔차키스를 알게 된 것은 조희봉씨의 '전작주의자의 꿈'에서 나온 이윤기 작가의 번역경력에서 소개를 받은 것이 시작이고, 작품으로는 지금까지 '그리스인 조르바,'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기행까지 포함하면 '천상의 두 나라'까지를 읽었다.  그 덕분에, 자주 인용되는 '조르바' 이야기, 특히 나꼼수에서 인용될 때,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당시 회사의 대표와 회계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인간성을 가진) 내심 우습게 보는 속물적 우월감에 기반한 소시민적인 기쁨을 느낄 수 있기까지 했다. 

 

역시 책이란 끊임없이 읽고 배우며 옮겨다니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서친님들의 책 소개와 이를 통해 알게 된 작가나 책들이 계속 쌓여가고 있는데, 이 행복한 여정을 죽는 날까지 계속 하려면, 열심히 일해서 자금줄을 잇고, 열심히 읽어서 눈과 마음을 채우고, 이렇게 써내려가서 자꾸 남겨야 하는 것이다.  부족한 살림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 책읽기를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신 부모님께 새삼 감사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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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2013-01-11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고 저도 카잔차키스를 전작하고 싶다, 라고 생각했는데
우와! 정말 책이 '너무' 많군요. 이렇게까지 다작한 작가인 줄은 몰랐습니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하지만 사실 전 이윤기님의 에세이를 읽고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윤기님의 번역이라면 믿을만할 것 같아서.^^

보니까 여행기도 많은 편이던데, 읽게 되면 꼭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요.

transient-guest 2013-01-11 02:07   좋아요 0 | URL
'열린책들'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버전이 사이즈나 디자인, 내용 모두 마음에 들어서 계속 조금씩 구입하고 있습니다. 매우 다작의 작가라서, 시간이 좀 걸리네요. 조르바는 역시 이윤기 선생님을 통해 알려지는 경우가 때때로 있군요. 저도 사실상 이윤기->조희봉의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까요. 꼭 읽으시고 같이 나눠요.ㅎ

아이리시스 2013-01-17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레아' 특이하네요. '그리스 기행'도 따로 있는 것 같던데. 저는<영혼의 자서전> 구입해서 묵히고 또 묵히고 또 묵히고 앞부분은 열 번도 넘게 읽은 것 같아요. 몰입해야 하는데 이것저것 겹쳐지다 결국 밀리고 밀리는 건데 절대로 밀릴 만한 문장들이 아니거든요. 제가 나빠요ㅠ.ㅠ

전작하고픈 작가에 저도 카뮈에 카잔차키스를 더하는데(단지 읽는 것에 그치는 의미보다 좀 더 큰 의미로) 종교, 여행 너무 폭넓고 많아서 하루는 날잡아서 책소개만 읽은 적도 있어요. 트란님 전작을 응원할게요!

transient-guest 2013-01-18 00:52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은 가끔씩 그의 문체가 dry하다고 느낄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어떤 때, 무엇인가 click이 되면, 깊이 빠져들게 되더라구요. 문장도 특이하지만, 문장마다 그의 경험, 철학, 성찰 이런게 녹아들어가서 뭐랄까 감칠맛이 나요. 카잔차키스는 여러번 읽어야 비로소 좀 보일 것 같아요. long-term project이지요. 응원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