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에 구매해 놓고, 이제서야, 그것도 우연한 기회에 책장에서 꺼내어 읽고 있는 책이다. 찾아보니 이렇게 한글로도 번역이 되어있다.
이 책은 예수회 수도사인 제임스 마틴이 쓴, 자기의 수도생활과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용기가 되었던 성인/성녀들의 일화를, 그때 그때의 본인의 삶, 경험의 에피소드와 함께 엮어내고 있다. 나도 이제 경우 성녀 소화 데레사의 챕터를 읽고 있는 중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소개를 하고 싶어 이렇게 간략한 페이퍼를 쓰고 있다. 간결하고 쉬운 필체와 단어, 눈에 쏙쏙 들어오는 문장이 이 책의 장점이라 하겠는데, 역시 좋아보이는 책은 주머니가 허락한다면 일단은 사놓고 볼 일이다. 신중하게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여 읽어보고 정말 좋은 내용의 책만 골라 산다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책은 빌려보는 것(!)이라고 배웠다는 사람도 있지만, 내 입장에보면 책은 역시 사서 보는 것이 맞다.
내가 만약, 신중하게 골라서 보려고 도서관 대출로 이 책을 미루어 두었더라면, 단언하건데 난 이 책과 인연을 맺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것의 한계도 있거니와 -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좋아보이는 책의 이름을 적고, 이를 다시 도서관에 가서 찾는 것은 시간도 그렇고, 너무 번거롭다 - 책이라는 것도 한번 눈에서 멀어지면, 다시 찾는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생각된다.
개신교에서는 역시 성경의 어느 구절을 인용하여 죽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없는데, 왜 죽은이들에게 기도하냐고 말하는데, 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의 입장과 배움, 그리고 믿음이 있을테니 그렇게 살면 되겠다. 아직 이론적으로 이를 반박할 성서구절이나 가르침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그 이상 말하기는 조금 어렵다, 적어도 지금은. 다만, 좋은 사람들, 우리 삶에, 또는 신앙에 귀감이 되는 사람들을 기념하고 기리며, 그들의 업적을 배워 도움을 받고, 나아가 중재를 구하는 것 (신앙적으로)이 왜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 마음이 그들을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무엇이 문제일까? 예언자 엘리사가 치료한 이교도 문둥병자 장군의 에피소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anyway...
막힌 글빨이 터졌는지, 아니면 마구잡이로 쓰니까, 일종의 brain storming이 되는 것인지, 신년 벽두부터 페이퍼와 리뷰가 마구 쏟아졌다. 뭐 2013년. 이런 시작도 나쁘지 않다. 이렇게 책읽기도, 글도, 일도 바쁘고 보람차게 돌아가는 한 해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013년을 위대한 성인전과 함께 하는 것 역시 우연치고는 참 마음에 드는 우연이다. 다시 한번.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곳은 이제 1/1/2013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