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6주만에 북쪽에 있는 본가를 방문하여 오랫만에 부모님과 좋은 시간을 보냈다.  목요일 즈음하여 다운받은 박원순 변호사의 아파트 내부의 거실/복도 서재공간을 PC의 배경화면으로 넣은덕에 자연스럽게 현안에 관한 이야기와 책 이야기를 하게 되었었는데, 마침 이날 다 읽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이 책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자연스러웠던 것은 책에 얽힌 아버지의 특이한 기억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인천에서 제일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나셨다.  그 동네의 아버지 연배를 전후로 하여 대학생이 딱 두명이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아버지였다고 할 정도로, 중학교를 마치면 으례 취직을 하고 학업을 중단하는 것이 당연했던 그런 동네였다고 한다. 

학력이 매우 낮은 부모님과 나이차이가 많은 누이 한분이 가족의 전부였고, 특히 생업에 바쁘신 부모님과는 대화가 거의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 시기를 거치면서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내성적인 십대를 맞이했고, 친구/학교공부를 빼면 독서가 유일한 낙이었다고 회상하셨다.  돈이 하도 없어서 주로 해적판을 구해 읽었는데, 낙장, 오타, 오역, 뭐 말도 못했지만, 그래도 무척 재밌게 읽었다고 하셨다.  하기야 지금도 가난한 그 동네에서 책을 빌려 줄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다니시던 고등학교는 책을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의 학교였다 (라고만 쓰겠다...) 

죄와 벌을 보면 주인공인 라스꼴리니꼬프가 전당포 노파를, 오랜 고민끝에, 도끼로 살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죄'의 장면).  아버지는 이 장면, 그리고 이후 병적이고 망상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그의 양심의 가책, 이런 묘사를 보면서 너무도 무서우셨었다고 늘 이야기 하셨다.  우리 남매의 책읽기의 원조는 결국 부모님이기에 간혹 책 이야기도 하고, 내가 읽은 책들을 가져다 놓으면 온 가족이 돌려 읽는 집이기에 문학이나 책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화제가 되곤 한다.  그때마다 들었던 것이 아버지의 '공포'였다.  너무도 무서웠던 십대의 아버지는 '와들와들' 떨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죄와 벌을 읽으셨다고... 

그런데, 정작 나는 이 장면, 아니 작품의 다른 어디에서도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읽는 내내, 무엇이 십대의 아버지를 공포에 떨게 했을까 생각하면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삼십대여서, 그러니까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가 아니어서 그런것일까, 아니면 나는 그냥 그런게 무섭지 않은 걸까...  

이런것들을 가지고 이야기하다가 두가지의 결론에 도달하였는데, 하나는 그 시대보다 폭력, 살해, 이런 장면에 익숙한 우리들이기에 더 이상 '살해'묘사나 장면에 대한 '감흥'이 예전같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첫 번째인데, 어머니께서 주장하는 결론이었고, 나의 주장은 결국 '나이'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의 fact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이 당시 소설에 깊이 몰입했었고 이에 따라 자신도 라스꼴리니꼬프처럼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은 이상한 '기억'을 한참 가지고 있었다고 하셨다.  즉 매우 강한, 본인과 주인공의 동기화/동일시가 소설의 몰입도를 높여,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십대, 그러나 대화할 상대가 없었던, 아버지의 정신에서 허구인 작품이 현실화/형상화 되었던 것이다 (나의 추측이지만). 

역시 나의 추측이지만, 가난했던 아버지는 라스꼴리니꼬프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물론 살인충동을 느끼지는 않았겠지만, 가난한 부모와 누이, 유일한 아들인 자신, 불안한 미래, 이런 요소들이 십대의 아버지를 죄와 벌의 세계, 정확하게는 등장인물의 심리에 빠져들게 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라스꼴리니꼬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마치 자기 자신이 그러는 것 같은 '환각'에 '공포'를 느낀게 아니었을까?   

하여튼, 책이란, 특히나 고전은 정말로 세대와 시대를 뛰어넘는 불변성을 가진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스포예프스키의 다른 작품들 중 일단 '카라마조프의 형제'와 'Demon'을 읽으려한다.  쌀쌀해지고 있는 가을에 어울리는 독서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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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1-10-18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이 아버지를 객관화시키는 어떤 지점. 언제 우리 아들이 커서 알케미스트님처럼 저를 들여다볼까요 ㅎㅎ 저는 일부러 책에다 메모를 남기곤 합니다. 나중에 아들놈이 커서 우연히 서재를 뒤적이다 애비의 흔적을 찾을수 있도록. 제가 이 땅에 없어도 말이죠.

transient-guest 2011-10-19 02:10   좋아요 0 | URL
아드님의 나이 앞자리에 3자가 붙기 시작하면서 시작될 것 같습니다.ㅋㅋ 저도 책보면서 밑줄을 긋습니다. 한 14년정도 된 습관이네요. 너무도 멋진 선배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1516 2011-10-26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잼잇 던데

transient-guest 2011-10-27 07:59   좋아요 0 | URL
물론 재미있죠~ 아버지의 몰입은 모든 점에서 이를 반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