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내내 나를 괴롭혀온 여러 가지 밀린 일이 하나씩 처리되고 있다. 덕분에 조금 게으름을 피운 탓이긴 해도 말 그대로 게으른 하루를 보냈다. 공식적인 퇴근시간에서 한 시간이나 일씩 나와서 서점에 들렀다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대충 거의 6개월만에 평일에 서점에 다녀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여전히 사람도 많고 책으로 가득한 공간의 한 가운데 카페가 있으니 안정감이 있다만 뭔가 쇠락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8-90년대의 대형화로 시작된 서점의 몰락은 일종의 folding처럼 대형서점이 소형서점을 삼키고 브랜드 체인점이 독립서점을 삼킨 후 다시 아마존이 모든 걸 잡아먹어버린 결과로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은 사실상 헌책방을 겸한 독립서점 몇 군데와 타운 몇 개마다 하나가 있을까말까 한 대형서점, 그리고 아마존으로 시스템이 구성된 것 같고 워낙 책을 읽지 않는 세상이라서 이 다음은 무엇일까 걱정을 하게 된다.


자리값을 하려고 저녁시간이지만 아이스커피를 한 잔 사서 어인 일인지 자리가 넉넉한 카페 뒷편의 bar stool에 올라앉아 예전처럼 노트북을 켰다만 그 예전의 설레임과 즐거움은 느끼지 못하고 그저 다시 서점에 왔음에 감사하면서 조금 더 자주 들려서 한 권이라도 매번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책과 미디어를 여전히 조금씩 모아들인다. 그간 제대로 꺼내 즐기지도 못한 DVD를 버리라는 소리를 많이 듣지만 어렵던 시절, 그리고 미디어가 귀하던 시절부터의 기억이 있어 언젠가 은퇴하면 즐길 생각에 어떻게든 지켜가고 있다. 무엇이든 넘치는 세상이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모든 것이 옮겨가는 시대에 사실 usb driver하나면 가진 모든 것을 소프트웨어로 넣을 수 있는 시대지만 하드웨어를 포기할 수가 없다. 


한가한 김에 박스 몇 개를 열어 용산에서 옛날에 구한 카피본을 몇 개 돌려보니 역시 CD/DVD매체의 한계인 듯 뻑이 난 것들이 있다. 비디오테잎과 달리 망가진 디스크는 구동할 방법이 전혀 없으니 결국 카피지만 돈을 주고 구했던 것들은 언젠가 버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시간을 좀 써서 백업을 만들어 두었을 것인데 아쉽다.


서점에 나와 지금보다 훨씬 불편했었지만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책과 미디어가 귀했던 아날로그의 90년대 초반의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이런 날 '책 산책가' 같은 책을 읽으면 좋겠다. 퇴근 전에 붙잡고 읽다가 집에 와서 다 읽어버린 사람사는 냄새가 가득한 훈훈한 이야기가 그만이었다. 순전히 판타지라고 할 수 없을만큼 아날로그 인간이 처한 퇴물취급과 평생 한 가지만을 해온 사람의 필연적인 변화에 대한 취약함이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작중에서 그려지는 이야기가 더욱 아름답다. 주말에도 몇 권 읽었으면 좋겠는데 요즘은 나도 자주 지치고 집중력도 떨어지는 탓에 쉽지 않을 것이다. 창문을 제외한 사방의 벽에 책장을 세우면 몇 권을 꽂아둘 수 있을까? interior design엔 좀처럼 감이 없어서 사무실도 내가 꿈꾼 멋진 모습과는 거리가 멀고 개선할 방법도 달리 떠오르지 않지만 늙어서 살 집은 조금 달랐으면 좋겠다. 


어떤 책을 한 권 사야 할까. 사실 눈에 들어오는 것이 유난히 없는 오늘이고 바로 엊그제 알라딘에서 새로운 책이 많이 왔으며 아마존에서도 몇 권을 이미 주문한 상태라서. 그러나 죄책감과 의무감으로라도 반드시 한 권을 구해야 한다. 


날을 받아 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건너 건너의 누군가를 보면서 삶이란 언제든 갑자기 끝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사 던져놓고 원하는 삶을 지금부터 살 수가 없는 건 결국 미래가 insecure하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SV를 아직 떠날 수 없지만 뭔가 수익창출은 여기서 하되 사는 곳은 좀 바꿀 생각도 한다. 심리적인 여유가 이젠 너무도 필요한 상태가 되었기 때운에.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서점에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을 하면서...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3-06-10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10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12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13 0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