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도통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덕분에 5월의 첫날인 오늘도 여전히 한 권도 읽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간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것만 같아 무척 불안하다.  사무실의 정리는 아직도 요원하고, 아마도 가구를 다시 배치해서 답답한 느낌을 없애면서도 최대한 많은 책과 미디어를 정리할 길을 찾다 보니 엄청난 노동이 예상되는 바, 일을 하면서 정리를 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그래도 엄청 힘들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고 내가 할 수 있는 행정적인 일은 했으니 이번 주는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있다.  


리커버리판이 아닌 예전에 세 권으로 나온 '모방범;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커버를 보고 무슨 관계가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모방범'사건으로부터 9년이 지난 시점이고 주인공은 지난 사건해결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르포라이터이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느낌은 분명하지만 약간의 오컬트스러운 '사이코메트리' ('사람이나 물건의 혼을 계측하여 해석하는 능력'으로 해석되는)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한 남자아이의 죽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갑작스러운 아이의 죽음, 그 아이의 능력을 알고 있었던 엄마의 의뢰로, 아이가 그린 그림을 토대로 하여 실제로 있었던 일과 아이의 reading을 대조하면서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부모가 딸을 죽인 사건을 미리 본 듯한 아이의 그림.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과거로의 추리와 탐문까지 스토리는 제법 깔끔하게 전개되며 '모방범'이 주었던 불편함과 피로감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부모가 자식의 나쁜 짓 때문에 자식을 죽이는 것, 상황을 볼 때 그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모습, 게다가 희생자(?)인 나쁜 자식이 마치 이를 받아들이는 듯 느끼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일본감성에 그리 낯설지 않은 나로써도 무척이나 기괴하고 이상하게 생각된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바로 아이를 경찰서에 데려가서 자백을 시키는 것으로 시작되고 일단락되었어야 하는 일이, 아이를 살해하는 것으로 아이와 사건을 덮는 것으로 일단 묻히게 되는데, 이를 통해 이 가족은 명분으로는 '둘째'를 보호하지만, 기실 알고 보면 자신들도 보호하는 것이 되며, 마치 '나쁜'자식, 그의 행동으로 받게 될 모든 이들의 피해를 제거하는 것으로 '나쁜'자식까지 '보호'한다는 개념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정당화하기엔 무리가 있다.  내가 잘못 읽었을 가능성은 늘 열려 있지만 내 눈에 들어온 모습은 피라미드구조로 촘촘하게 짜여진 구조속에서 각 단위별로 추문을 덮고 이를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아니 더 나아가서 이를 조장하고 기억속에서 왜곡해버리는 일본인의 습성의 단면을 보면서, 저들의 역사왜곡과 심각한 인식/인지오류가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인지하는 세계에서 완벽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여자가 있다. 남편은 유능한 변호사로서 새로운 파트너가 입사하면서 투자한 자금 덕분에 더더욱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두 딸들은 좋은 가정에서 꼼꼼한 양육을 받으면서 자란 덕분에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오로지 자신의 말과 생각속에서 다른 이의 삶과 비전과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배제되는 병적인 자기중심의 이 여자는 바그다드에서 살고 있는 둘째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런 비로 열차를 타지 못하고 외딴 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곳에서 여자는 끊임없이 자기가 부정하고 보려하지 않던 것들을 하나씩 마주하면서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게 된다. 당연시했던 남편의 사랑과 희생,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살아주면서 점점 빛을 잃어가는 남편의 모습, 그가 원했던 꿈, 소박한 삶, 조금씩 life가 snuffed out 되어가는 듯한 남편의 모습, 자신의 간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딸들까지.  길을 잃은 탓에 환각에 가까운 경험을 하면서 절정을 이룬 이 여자의 깨달음은 그러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깨끗하게 사라져버리는데, 그 찰나의 과정의 묘사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무엇인가 생각할 것을 많이 던져준 애거서 크리스티의 비추리소설 첫 번째.


'희생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무척이나 묵직하게 다가온 문장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휘어감고 놓아주지 않더라.   첫 번째 이야기에서의 집착이 엄마이자 아내였던 한 여자의 것이었다면 이번엔 딸내미의 집착과 엄마의 희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잃어간 엄마의 삶과 그 반대급부로 내던져진 딸내미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엄마가 결혼하려는 상대의 소박하고 무뚝뚝한 모습이 맘에 들지 않고, 그 이상 엄마를 독점하려는 딸의 모해공작과 방해로 결국 엄마와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함께 하려던 남자는 떠나버린다.  그후, 엄마도 딸도 변해버리고, 딸은 질이 나쁜 남자의 소유물처럼 결혼생활을 하게 되고, 엄마는 파티걸처럼 정신없이 놀며 과거의 차분함을 모두 걷어낸다.  그러고 시간이 더 많이 흐른 후 마주치는 진실의 순간.  


엄마와는 달리 딸은 second chance를 부여 받아 떠날 수 있었지만 엄마는 모든 걸 잃어버린 채, 자신과 함께 행복했었을 남자가, 엉뚱한 인연을 만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걸 보면서 '희생'과 '상실'과 딸에 대한 '증오'까지 느꼈을 것이다.  엄마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꿔 버리고, 휘둘러 삶을 사실상 변질시킨 댓가 치고는 싼 잠깐의 막된 삶을 산 딸은 그러나 딸에게 돌아온 '인생'의 '파트너'같은 남자에 의해 '구원'을 받는데, 이런 건 현실적이지 못할 뿐더러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희생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가 계속 지금도 나를 두드린다.


읽던 당시의 느낌을 최대한 떠올리려 했으나 바깥에서는 가구를 조립하는 소음이, 내 방에서는 쌓여있는 박스더미와 업무파일이, 그리고 모든 상황적인 구성이 내 심장을 조여온다.  제대로 정리가 가능할지 지금은 자신이 없다.  한쪽 벽에는 폭이 좁고 긴 책장으로 채우고, 반대편에는 검고 두꺼운 4X4 책장을 세우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되었고, 내 방에도 어쩌편 4X4 하나를 넣고 멋진 장식장은 미팅룸으로 보내고 두꺼운 법률서적과 이런 저런 장식이 될 만한 것들로 채울 생각이다.  어느 정도의 breathing room이 나와야 내 방의 책상도 구해서 설치하고 미팅룸의 테이블과 의자도 셋팅을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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