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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미래 - 10년 후, 나는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린다 그래튼 지음, 조성숙 옮김 / 생각연구소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끊임 없이 미래를 알려고 노력한다. 단순히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불안함과 공포에 어떻게 든 미래를 알기 위해서 노력한다. 두 눈을 감고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한 발도 쉽게 때지 못하는 것처럼,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인생에 모험이라는 것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부모님이 정해 놓은 길이나 아니면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그저 따라 갈 뿐이다. 인생에 자기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길을 개척하려 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려고 한다. 그래도 떠나지 않는 불안감과 그 길에서도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앞서 사려는 욕망에 끊임 없이 미래를 알기 위해서 노력한다. 미래를 알려는 우리의 욕망은 불확실이라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공포다.

 

그렇게 공포를 떨치려는 노력은 과연 얼마나 성공할까? 각 분야마다 수 많은 예측과 예언이 난무하지만, 실제로 정확하게 맞추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 백 개의 예측과 예언 중에 몇 개가 우연히 맞아 떨어지기라도 하면 대중들은 그 사람을 추종한다. 그가 틀린 수 많은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그가 맞춘 소수의 예측이나 예언 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 기억으로 그들을 열렬히 추종하고 때론 맹신한다. 키케로는 "미래를 안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그것은 소득 없이 자기를 괴롭히는 불행이다."라고 했다. 미래를 알려는 노력보다는 현실의 자신에 충실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현실의 자신에 충실하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 같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안정이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한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대단한 열정으로 현실과 사회에 도전해야 하는 청춘들이 막연한 두려움에 스스로 자신의 열정을 꺾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한다. 그 현실이라는 것이 지금의 현실일 뿐이지 미래의 현실이 아닌데, 그 현실을 마치 미래의 현실로 생각한다. 꿈이 공무원이라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냥 안정해서 좋다고 선택하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추구하는 많은 청춘들은 우리 사회의 어디 한 구석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청춘들이 두려움에 자신의 열정을 꺾어버리도록 만드는 사회 현실과 구조를 무시한 채, 공무원만을 추구하는 청춘들을 나무랄 수가 있을까?

 

미래는 오늘의 현실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 진 것이다. 열정과 희망의 현실이 쌓인 미래와 좌절과 현실 안주가 쌓여서 만든 미래의 차이를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지금 만들어가는 미래는 희망이 있는가 아니면 절망인가? 아직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 만큼 미래는 불확실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런 거시적인 미래보다 자신의 미래에 집중해 스스로의 미래를 명확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개인의 미래는 꿈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에 일이다. 어떤 미래를 꿈꾸듯 우리의 그 꿈은 바로 일이다. 베짱이 처럼 일하지 않고 놀수 있는 미래면 좋겠지만, 현실은 개미처럼 일을 해야만 누릴 수 있는 미래가 더 많아진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꿈이 뭐야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대답은 미래의 직업에 대한 것들이다.

 

시대의 변화 만큼 급변하는 것이 바로 일의 종류다. 신 기술에 의해서 새로운 직업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는 직업이 생기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꿈은 당시 현실에서 인기있는 직업일 뿐 우리는 성인이 되면서 지금 현실의 직업에 초점을 맞추고 일을 선택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막연한 꿈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현실적이고 구체화 된 형태로 다가온다. 그 구체화 된 형태의 일이라는 것은 연봉이나, 적성, 능력 등 다른 여러 조건이 고려되어서 선택되어 진다. 거기에 일의 장래성까지 같이 고려되면서 우리는 오랜 시간 심사숙고 하고, 선택이라는 것을 한다. 그 신중한 선택을 해도 어느 순간에 사회의 변화에 의해서 좋지 않은 결과를 얻기도 한다.

 

변화의 불확실성은 누구도 미래를 단정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책 "일의 미래"도 그런 불확실성을 반영하듯 쪽집게 처럼, 미래를 단정하지 않는다. 거시적으로 "저탄소 경제의 활성화, 급속한 기술발전, 세계화의 증가, 수명과 인구 통계의 근본적 변화 그리고 중대한 사회적 변화"라는 다섯 가지 힘에 의해서 현재와 미래가 변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이런 다섯 가지 힘이 가져올 변화가 일이라는 직업의 선택에 어떤 고려나 노력을 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다섯 가지 힘은 그렇게 색다를 것이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금 현실에서 작용하는 힘이다. 미래는 오늘의 현실이 쌓여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 책의 내용은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자세를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힘이 아니라 현실에 직면한 힘의 실체이고, 이 실체를 알고 현실에 조금씩 대응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는 세 가지 능력을 배양하라고 한다. "첫째, 관심 있는 분야에서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대부분의 근로기간을 자신의 지적 자본을 함양하는데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우정과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적 자본을 함양해야 한다. 신회할 수 있는 사람들과 깊은 우정을 쌓고, 다른 사람들과 보다 폭 넓은 네트워크를 조화롭게 구축해야 한다. 셋째, 돈과 소비를 일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추구하는 전통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생산적이며 다양한 경험을 누리는 능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인식으로 옮겨가야 한다."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미래에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현실에서 충실히 쌓아가야 하는 것들이다. 그 만큼 지금의 현실을 잘 쌓아간 사람에게 다가올 막연한 미래는 그렇게 두렵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책의 제목은 거창하지만, 지금 현실이 미래다. 하지만 그 전에 개인적으로 '네 일을 하고,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 대해서 몽테뉴가 한 해석을 더하고 싶다. 몽테뉴는 이 말에 대해서 "자신 일을 하려는 자는 먼저 자기가 무엇인가 그리고 자기에게 적당한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아는 자는 남의 일을 자기 일로 혼동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가꾸며, 쓸데없는 일이나 생각을 제안 받기를 거절한다."라고 해석을 더한다. 앞에서 저자가 말한 세 가지는 자기 자신을 먼저 알았을 때 해당되는 말이다. 입시에 시달리는 학창시절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알려고 노력했고 알아 왔을까? 우리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을 현실에서 찾아 만들지 못했다. 자기 자신을. 미래를 꿈꾸고 현실을 충실히 살기 전에 우선 "너 자신을 알라." 그것이 불확실한 미래와 꿈을 용기 있게 해쳐나가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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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정치경제학 - 하버드 케네디스쿨 및 경제학과 수업 지상중계
천진 지음, 이재훈 옮김 / 에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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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면 그냥 경제학고, 정치 경제학이면 그냥 정치 경제학이지 그 앞에 굳이 "하버드"라는 만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시카고 학파처럼 특정 대학 출신들의 경제학자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대학교의 이름이 앞에 붙어서 특정 학파를 대신한다면 모르겠지만, 하버드 경제학이나 하버드 정치 경제학이니 하는 식의 이름은 조금 우습게 보인다. 책 제목만 보면 그렇다. 지독한 학벌주의 사회에 찌든 우리나라에서 하버드라는 학벌을 자랑하기 위한 마케팅 그 이상의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버드란게 특별한가? 하버드 법과 대학원을 졸업한 강용석이라는 인간만 봐도 그렇다. 최고 학벌에 스팩만 쌓아 놓은 인간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하버드라고 특별한거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버드도 여러 인간들의 집합체 일뿐이고, 그 인간들 중에서 하버드의 명성을 드높이는 사람이 있고, 하버드의 명성에 먹칠하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중국인이다. 어떻게 보면, 그도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학벌주의 성향을 보이는 것 같다. 하버드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을 책 여기저기 보인다. 꼭 그런 성향이 우리와 같은 학벌주의 성향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자신의 모교에 대한 큰 자부심 만큼은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는 자신이 배웠던 것을 맹목적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그가 소개하는 내용들은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 큰 맥락에서 통화정책과 미국의 의료체계 같은 현재 가장 많은 관심과 이슈를 이루는 주제들을 가지고 책을 전개한다. 그렇다고 또 일방적이지 않다. 다양한 다른 의견들을 먼저 제시하고 하버드의 교수가 제시하는 의견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국제통화에 관한 부분이다. 저자는 국제 통화의 새로운 트렌드 5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개발도상국이 갈수록 중시된다. 둘째, 독립적인 통화정책, 고정환율제도, 자본시장의 완전한 개방이 동시에 운용하기는 불가능하다. 셋째, 환율 조작에 대한 비난이 줄어든다. 넷째, 물가안정을 목표로 하던 통화 정책이 신용 주기를 대처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다섯째, 달러는 단일 기축통화로써의 지위를 잃을 것이다. 나머지 내용이야 그렇게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두번째와 네번째 내용은 알지 못했던 내용이라 신선하게 다가온다.

 

두번째 내용인 독립적인 통화정책, 고정환율제도, 자본시장의 완전한 개방이 동시에 불가능하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보면 그렇게 낯선 형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통화정책만 봐도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인데, "완전한 고정환율제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변동환율제도도 아"닌 중간적인 환율정책을 운용하는 것을 보면 된다. 이 내용은 각나라들이 왜 환율 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환율을 조절하는 통화제도를 운영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번째 이유인 "환율 조작에 대한 비난"이 줄어든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지금 환율 문제를 두고 각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수면 아래에서 화폐전쟁을 벌이는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너무 이론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국제 통화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식을 제공한다.

 

네번째 내용은 각국의 통화정책의 변화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키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통화정책의 기본은 물가 안정이다. 한국은행의 통화정책과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금 한국 은행의 통화정책에 대해서 상당한 비판을 가하는데 그 바탕은 물가 안정을 기본으로 해야 될 한국은행이 자신의 의무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민들은 고물가에 시름하는데, 한국은행과 정책 당국은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은 물가안정보다는 경제상황에 더 관심을 두고 움직인다. 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일까? 정치적으로 생각하면 경기부양을 위한 정치권력의 영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용 주기에 대처하는 통화정책으로 변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더 쉽게 풀어서 말하면 "금융시스템 내에서 연신 현황을 토대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장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장하준 교수가 책"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들이 성장을 둔화시켰다."고 말했던 것처럼. 물가안정을 위한 통화정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만하지 않을까?

 

이 밖에도 경제와 정치에 대한 많은 내용들이 이 책에 포함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역량이 부족해서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고,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현재에 논의되고 있는 현실성 있는 내용들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를 많이 제공해 준다. 하버드 교수의 주장이 모두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극단적인 주장이 아니라 반대 의견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경제에 대한 이야기도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소양에 대한 이야기랄까, 학벌과 취업이 가장 큰 목표가 되어버린 우리나라 대학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불러 일으키는 내용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한다. "만일 학생들이 대학 진학을 선택하여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되면 학생들의 목표는 개인적인 삶의 문제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학생들은 옳고 그름을 구분하고 주관이 뚜렷한 시민이 되어야 하며 또한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이 되어야 한다.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을 갖고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 그리고 시대정신과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만일 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하고 개인의 삶만 고집한다면 대학을 다닐 필요가 없다.". 사회와 시대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의 현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이 부족해 점점 냉혹해지는 현실. 바로 그 시작은 저자의 말처럼 "개인의 삶"만 고집하며 대학을 추구하는 우리가 만들어낸 문제다. 많이 배운 인간들이 엄청난 비리를 저지르는 현실이 너무나 서글프지 않은가. 이 책에서 말하는 경제에 대한 내용도 정치에 대한 내용도 허투루 버릴 것이 없다. 하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기 전에 저자의 저 말을 먼저 고민하고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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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니치 Niche - 왜 사람들은 더 이상 주류를 좋아하지 않는가
제임스 하킨 지음, 고동홍 옮김 / 더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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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읽었던 "리스크"란 책을 보면 "평균으로의 회귀"라는 것이 나온다. 그 책의 설명에 의하면 "평균으로의 회귀란 큰 것은 무한히 커지는 것이 없고, 작은 것은 무한히 작아지는 것이 없다."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경제 동향을 관찰해보면 그런 경향을 관찰 할 수 있다. 흔히 경제 사이클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경제는 호황과 불황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요즘은 그 사이클이 너무 짧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평균으로의 회귀"라는 단순함으로 경제의 사이클을 이해하기에는 불확실성이 너무나 크다. 그러다 보니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꺼야"라고 단순하게 경제 사이클을 바라봤다가는 불확실성에 숨어 있는 큰 위험에 무방비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현실로 대입해보면 정권이 바뀌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이 잘 보장 된 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그 만큼 다양한 정치적 견해가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정치권력을 수시로 교체 된다. 그래서 장기집권하는 정치권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건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러한 현상은 민주화가 되지 않았던 우리나라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독재 권력에 의해서 무구한 시민들이 유명을 달리했고, 자신의 목소리 조차 쉽게 내지 못했던 그 시대를. 그래서 평균으로의 회귀는 사회의 건강함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다양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평균이 사회를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평균에서 많이 벗어난 것들은 무시되거나 때론 멸시 당한다. 주기가 큰 폭으로 진동하지 않고 작은 폭으로 진동하게 되면서 그 사이에 있는 것들만 사회현상이나 의견으로 인식된다. 정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각 정당들의 공약을 살펴보면 많은 부분 특별한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가장 많은 표본을 차지하는 평균 지점의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내놓는 공약이 비슷해진다. 내용의 정도나 표현의 차이만 존재할 뿐 기본적인 정책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머지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들을 끌어 않기 위해서 정당의 정책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공약을 추가할 뿐이다. 그래서 정당의 정체성이 서로 겹치거나 구분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들은 평균으로의 회귀가 잘못된 지점이나 지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그런지 살펴보면. 첫째, 평균으로 회귀의 과정이 너무 느려서 외부의 어떤 충격에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둘째, 회귀가 너무 강력해서 평균에 도달했을 때 안정적이지 않고 양쪽으로 요동치면서 예측하지 못한 일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셋째, 평균 자체가 불안정해서 전혀 다른 새로운 평균으로 대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평균으로 회귀 한다고 생각해, 언젠가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져서는 안된다. 프랜시스 골턴은 "평균으로의 회귀를 과거에서 가계적인 추정을 이끌어내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보다 나을 게 없다. 현재 내린 가정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 지속적인 의문 없이는 절대로 평균으로의 회귀를 믿지 마라"라고 말한다.

 

 책 "니치"는 평균으로의 회귀를 믿었던 거대 기업들이 어느 날 고객이 이탈하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트렌드 분석가들은 평균적 관점을 믿고 트렌드를 분석했는데, 지금은 그런 분석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정형화된 분석이 대중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변화한 대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의 전략 수립은 물론 새로운 제품들이 기존의 고객들에게 더 이상 환영을 받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새로운 기업들이 엄청난 혁신적인 제품으로 소비자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서 설명하는 기업들은 평균적 고객만을 추구해서 열성적인 고객들이 확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 고객들이 이탈하면서 기업의 매출에 점점 타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균적 소비자를 겨냥한 대기업들이 서서히 시장의 지배력을 상실하고 있는 반면에, 특정한 소비자를 겨냥한 기업들이 부상하고 있음을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내용들은 새롭지 않다. 많은 미래학자들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하는 형태가 앞으로 다품종 소량 생산하는 형태로 변할 것으로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남들이 소비하면 같이 소비를 했던 소비자들이 각자의 개성을 찾아 소비하는 형태로 변하고 있음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각자의 개성을 발휘한다는 것만으로 이런 소비형태를 설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 모호하다. 개인을 억압하던 시대에는 개성이 발현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던 시대에서는 왜 각자의 개성이 소비형태에까지 영향을 주지 못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이러한 소비자의 변화의 핵심에 인터넷이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인터넷이 있었다고 소비자들이 각자 개성이 발현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비슷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하거나 정보를 교환하면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제품에 대해서 열렬한 팬이 된다고 말한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평균적 소비자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가 가진 취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든든한 동료들을 바탕으로 개성있는 소비자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터넷이 없었을 때는 자신에 취향에 대해서 정보를 교환하고 공유하는 형태의 집단이나 모임이 탄생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국경을 뛰어 넘어서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이 거대한 소비자 그룹이 되면서, 평균적 소비자를 쫓던 기업들은 시장의 점유율이 떨어지는 반면, 특정한 계층을 겨냥한 기업들은 무리를 이룬 소비자 그룹의 열렬한 지지를 바탕으로 급격하고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비주류에 주목하고 그 비주류의 특성을 제품에 반영해 "니치"를 개척하라고 말한다.

 

 이 책은 경제학적 관념으로 비주류의 문화를 주목하고 있다. 그 비주류 문화가 기업의 경쟁력을 올려줄 요소가 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주류 문화라는 것도 평균으로의 회귀가 강력한 사회, 즉 다양성이 상실한 사회에서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다양성이 큰 사회는 다양한 비주류 문화들이 참조 될만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회에서는 참조할만한 비주류 문화가 없다. 기존의 대기업을 위협하는 혁신적인 기업들이 많이 나오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면 인종의 다양성 만큼이나 문화의 다양성이 빛을 발한다. 단순히 기업가 정신이 충만해 혁신적인 기업들이 많은 것이 아니라 다양성이 풍부한 그 나라의 문화를 주목해 봐야 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을 보고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양성이라는 관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학업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개성을 억누르는 사회적 현실과 주류 지향성이 너무나 강한 사회적 현실에 문화적 다양성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단일 민족이라는 의식이 강해서 그런지 몰라도 특히 우리나라는 특정재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 수요에 편승하는 경향이 강한 밴드왜건효과가 크다. 소비 뿐만 아니라 정치나 사회적인 다른 모든 면에서 획일성이 강하고 이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경향도 강하다. 우리 사회는 아직 다양성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니치를 찾는 것보다 다양한 비주류 문화들이 숨을 쉴 수 있는 사회적 다양성 확보에 대해서 먼저 고민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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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퍼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전략 퍼즐 - 비즈니스 스쿨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제이 B. 바니 & 트리시 고먼 클리포드 지음, 홍지수 옮김 / 부키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읽어왔던 것들이 무의미하지 않냐는 회의가 가끔 든다. 책을 읽는 이유가 단순하게 정보와 지식을 습득해 어딘가에 써먹기 위한 것 만은 아니지만, 책에서 보았던 내용을 현실에서 응용해야 될 일이 발생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말처럼, 책과 현실과의 괴리가 존재한다고 해야할까? 책 속의 지식이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를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책에 포함된 내용이라는 것이 현실 중에 일부분으로 어느 정도 증명되고 모두가 공감할 만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복잡한 현실적인 요소들을 다 포함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책의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는데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책의 지식을 현실로 확장시켜야 한다. 단순 암기라는 학습법에 익숙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에서 보면 조금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다. 지금 말하는 내용과는 전혀 상관 없지만, 가끔 "책만 보는 바보"라는 제목을 보면서 그게 나라고 자조한다.

 

이런 생각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의 또 다른 단면이기도 하다. 한 경제신문의 기사에 의하면 기업들이 신입직원을 재교육하는데 평균 38.9일의 기간과 217만원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대기업의 경우는 56.1일의 기간과 406만원이라는 비용이 든다고 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산업현장에서 필요한 내용과 많이 달라서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낭비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앨빈 토플러의 저서 "부의 미래"를 보면 변화의 속도를 이야기한 부분이 있다. 거기서 토플러는 기업은 시속 100마일로 변화하고 있다면 미국의 학교는 시속 10마일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토플러의 말이 맞다면 기업과 학교의 변화 속도 차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신입사원에 대한 재교육의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학교라는 곳의 존재 목적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 있는 것 같다. 학교는 기업에 필요한 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기관이라는 명제를 너무나 당연하게 만들어 버린다. 시민적 소양이나 비판적 지성인을 키워야 될 학교 교육은 기업에 필요한 인력을 키우는 인력 양성소로 변해 버린 것이다. 우리나라의 학교 현실을 보면 더욱 비참하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되고, 대학교에서는 대기업에 가기 위한 것은 유일한 목표가 된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점수 경쟁에 매몰되고, 대학교에서는 스팩 쌓기에 매몰된다.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이라고 생각되면 학과를 마구잡이로 통폐합 시켜버리는 기업 친화적인 교육의 환경은 학문의 다양성을 심각하게 침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찾는 창조적 인재들이 자라기 전부터 짓 밟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의 지금 교육 형태와 문제에 원인을 제공한 것은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평가시스템을 갖추지 못하다 보니, 가장 손쉽게 사람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스팩에만 의존한다. 교육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하는 사회초년생들이 취업을 하기 위해서 그런 평가 시스템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 스팩 쌓기에 몰입한다. 영어로 업무하지 않으면서 왜 높은 영어성적이 필요하며, 재교육 과정을 거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에 높은 학력은 왜 요구해야만 하는지 정작 기업들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 할 것이다. 그냥 편하고 쉬운 관행적 평가 시스템에 익숙하기에 그냥 이런 평가 시스템을 이용할 뿐이다. 기업들은 경쟁이 심한 시장에서는 숨 가쁜 속도로 변화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면에서 기업의 변화 속도는 학교의 변화 속도와 별 차이가 없다.

 

학문과 현실의 차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토플러가 말한 변화의 속도 차이도 있지만, 기업을 위해서 학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을 위한 노동자 양성이 중요하다면 일반적인 학교가 아니라 특수목적의 기술학교만 있으면 된다. 거기서 기업이 필요한 노동자를 양성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변화"라는 것을 무시한 편협한 시각이다. 특정 기술에 대한 숙련가를 양성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다양한 학문의 통합적 지식(통섭)이 필요로 하는 시대적 상황을 무시하는 형태가 된다. 월터 아이작슨은 "스티브 잡스"의 전기에서 스티브 잡스를 인문학과 공학기술의 교차점에 서 있는 뛰어난 천재라고 설명한다. 잡스가 단순한 숙련가였으면 모두가 놀라는 혁신적인 제품은 탄생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업을 위한 단순한 노동자의 양성보다는 인문학적 소양을 기본적으로 갖춘 인재의 양성이 시대적 화두인데, 신입사원들의 업무함량 미달 만을 지적하는 기업들과 경영자들의 행태는 여전히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문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서 기업이나 사회가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당사자들이 더 많이 느끼게 마련이다. 스팩이라는 것을 쌓으면서 얼마나 열심히 달려온 배움의 길인가. 비록 스팩이라는 것이 보여주기 식으로 남발된 경향이 크긴 하지만, 그들은 기업이 요구하는 조건에 맞추어 힘들게 달려왔다. 그런 그들이 학문과 현실의 괴리에 직면했을 때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기업 내부의 치열한 경쟁에서 오는 압박감과 더불어 자신의 무능함을 한 번쯤은 자책하지 않을까. 이럴 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회사에 있는 선배와 멘토들이다. 이미 같은 길을 걸어왔기에 신입사원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는 존재들이기에. "전략퍼즐"은 서문에서 "실제 현장에서 전략을 수립 실행하는 전도유망한 경영인들, 배움을 응용하고자 하는 경영대학원생들과 실제 경영 현장이 관심있는 일반 독자"를 위한 책이라고 설명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는 이들을 위한 책이라기 보다는 멘토가 필요한 사회초년생들의 위한 책이라는 생각이 더 든다.

 

소설이 1 인칭으로 전개되다 보니, 경영학에 필요한 지식보다는 주인공의 내적 심리나 감정이 더 도드라지게 묘사되고 있다. 처음으로 직무에 들어갔을 때의 설레임을 비롯해 일을 하면서 실수를 했을 때의 당혹감이나 부끄러움이 그대로 드러난다. 저자가 목적에 둔 독자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지만, 학문과 현실의 괴리에서 직면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하고 위로 받으며, 어느 정도 조언까지 받는 책이지 않을까. 주변의 선배나 멘토들에게 위로 받고 조언받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이런 소설이 더 큰 공감을 얻고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책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경영 컨설턴트 현장 속, 그 치열함을 헤치면서 현실에 대한 배움을 얻어 가는 과정 또한 학교에서 사회로 나온 이들에게 필요한 과정이지 않을까. 학문과 현실의 괴리에 두려워하지 마라. 이것 또한 배움의 과정이고 성숙해 가는 과정이다. 사회 초년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완성된 직무 능력이 아니라 현실에 직면한 많은 문제들을 헤쳐가면서 배워나가는 열정과 그것을 견뎌내는 인내다. 이 책은 그런 것들을 주인공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 책이 경영학에 관한 책이기는 하지만, 멘토가 필요한 사회초년생들의 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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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배반 -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다
존 캐서디 지음, 이경남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눈 앞에서 시장의 실패를 경험했다. 탐욕스러운 시장을 그대로 방치했을 때 어떤 결과나 나타나는지를 눈으로 똑똑히 봤고, 점점 더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탐욕스러운 대기업들은 시장의 원리라는 이상한 주장으로 중소상인들과 영세상인들의 영역까지 마수를 펼치고 있으며, 이익의 극대화라는 논리를 앞세워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그런 비정규직을 노예 부리듯 과도한 노동을 강요한다. OECD 최장 근로시간을 자랑하는 높은 노동량에도 불구하고, 법에 정해진 최저임금 조차 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 있는 노동자들이 넘쳐 난다. 시장의 원리라는 이유로 그들은 법에 정해진 최저임금 조차 보장 받지 못한 것을 항의하지도 못한다. 시장에는 그들을 대체할 노동력이 넘쳐 나기에, 그나마 있는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 불안감에 침묵한다. 그런 식으로 탐욕스러운 기업이나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불리하면 시장의 원리를 언제나 앞세운다. 사람들은 시장이라는 것이 마치 절대적인 가치나 되는 것처럼 생각해 그 논리에 그대로 수긍하는 경향을 많이 보인다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이념체제는 시장 규제의 필요성을 말하면 좌빨이라고 극단으로 몰아버린다. 실패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과 대책을 이야기하는 것 뿐인데, 마치 시장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해 버리는 것이다. 그쪽에서는 시장이라는 것은 신성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대기업에 대한 규제, 부동산에 대한 규제에 대한 법적 장치와 제도를 만들고자 한다면 반시장적이라는 말로 격렬하게 반응한다. 그들은 미국의 자유시장주의자들 처럼 시장의 자정능력을 믿는 것일까? 자세히 보면 그들은 시장의 자정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만들어 줄지 모르는 부를 믿는 것 같다. 경제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낙수효과를 마치 진리인 것 처럼 신봉하면서 대기업이 시장에서 마음 놓고 움직여야 자신에게도 떡고물이 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대기업의 시장 활동을 옥죄는 규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미국의 시장주의자들은 누구나 시장에서 노력만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카 드림과 서부 개척시대의 프론티어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우리니라의 어설픈 시장주의자들은 강자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과 그들에게 떡고물이라고 받아 먹으려는 거지근성이 결합한 이상한 형태를 띠는 것 같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비리를 폭로했을 때, 삼성을 비난하기 보다는 김용철 변호사를 비난하던 여론과 논리는 우리나라의 어설픈 시장주의자들의 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회는 민주화를 위해 계속 진보해왔지만, 시장의 뒤에 숨어 있는 기업들은 여전히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비리를 저지를 기업이나 기업가를 쉽게 단죄하지 못하는 법 예외지역에 머무르는 경우도 그렇다. 그런 기업가들이 여전히 국민의 존경을 받는 기업가에 꼽히는 현실은 얼마나 우리가 시장의 원리를 왜곡해 이해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현실은 이런데 mb 정권 초반에 전경련은 우리나라 경제교과서가 좌편향 되어 있다는 이념공세로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경제교과서 수정에 앞장서왔다. 기업이 시장에서 이윤추구하는 것은 기업의 존재 가치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탈법과 불법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젊은 청춘들, 법으로 기업이 노동자를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한 것이 기업의 경영권침해라고 말하는 젊은 청춘들을 너무나 많다. 보통의 사람에게 자유가 있으면 책임이 따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기업의 이윤추구의 자유에 대해서는 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언급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시장=기업이고, 시장과 기업은 인간 위에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로 보는 것 같다

 

 기업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인간의 가치를 폄하하게 만드는 경제교과서. 전경련이 좌편향이라고 지적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친기업적인 경제교과서인가. 물론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만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노엄 촘스키 교수는 "현행 법률에 따르면 기업은 사람보다 훨씬 큰 권리를 누리는 법인격을 부여받지만 불법 체류자는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 시장주의를 앞세워서 개발도상국과 가난한 서민들을 수탈하는 악날한 다국적 기업들을 비판하면서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시장을 앞세우는 기업의 법인격이 천부인권을 넘어서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다양한 경제적 행위나 문제들을 보면 인간의 존엄성을 뛰어넘는 기업의 법인격을 무수히 목격할 수가 있다. 돈 없는 세입자를 향한 자본의 폭력이 만들어낸 용산참사, 대기업을 무분별한 구조조정에 힘없이 당해야 만했던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여준 한진중공업 사태나 쌍용자동차 사태 등등. 우리는 기업의 인격이 사람의 인격을 뛰어 넘고 있는 슬픈 시대를 무감각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다

 

 신격화 되어 버린 시장. 그리고 그 시장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기업은 시장의 신격화와 함께 인간의 가치를 넘어 버렸다. 대기업은 점점 더 거대해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 현실에 직면했다. 그러다 보니 복지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있고, 시장을 중요하게 외치던 여당마저도 당명을 바꾸고 복지를 새로운 화두로 내세우고 있다역사가 토머스 브래디는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제국의 이익이 사유화된 반면 제국의 비용은 사회화 되었다"는 것을 지적했는데, 어설픈 시장주의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는 대기업의 이익은 사유화된 반면 대기업의 비용은 사회화 된 것 같다. 복지에 대한 요구는 대기업들이 시장을 황폐화 시키면서 만들어낸 반작용이고, 대기업들이 지불해야 할 비용을 사회가 부담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복지비용은 OECD 평균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수준이다 보니 복지에 대한 요구는 당연한 국민들의 권리이기는 하지만, 지금 불고 있는 복지제도에 대한 열망은 광폭한 시장의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라 그들의 이익을 위한 사악한 행동마저도 그것의 존재 목적이라는 이유로 긍정하는 현실은 시장이란 무엇인지 처음부터 고민해야 될 이유를 말해준다

 

  "시장의 배반"은 경제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애덤 스미스를 통해서 시장이 실체가 무엇인지 접근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애덤 스미스가 은행들에 대해서 가졌던 시각이다. 미국발 경제 위기의 과정을 보면 은행으로 대표되는 금융업이 만들어낸 시장의 광기이고 수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애덤 스미스가 말한 시장을 바탕으로 이런 논리를 펴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은행업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작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그런 규제(은행들이 투기적 대출업체에 어음을 발행하지 못하게 하는)는 틀림없이 어떤 면에서 자연적 자유의 침해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소수 개인의 자연적 자유의 행사는 전제적인 정부이든 자유로운 정부이든, 모든 정부법에 의해 제한 받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불길한 확산을 막기 위해 방화벽을 의무적으로 세우게 하는 법률은 자연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제안하는 금융 거래의 규제도 바로 그와 같은 종류의 침해이다."라는 애덤 스미스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금융시장을 합리적이고 자정 능력을 가진 메커니즘으로 보는 시각은 최근 40년 사이에 만들어진 생각이다."라는 저자의 주장을 덧붙인다.

 

그렇게 저자는 경제학 교과서 속에 유명 경제학자들의 이론들을 탐구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자유시장을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학파와 학자들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그들의 이론의 문제점들을 설명할 것 같지만. 저자는 비판적 시선보다는 중립적인 시선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자유시장을 믿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이론들이 얼마나 믿음직한 이론이었는지를 세심하게 보여준다.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에게 보기만 해도 머리 아픈 내용들로 내용을 전개한다. 그러다 보니 쉽고 편하게 읽지 못하고, 지루함과 어려움에 힘든 싸움을 하면서 한 장 한 장 넘기게 된다. 그렇게 시장에 대한 유토피아적 학문과 이론들에 대한 수업이 끝나면 대안적 경제학 이론들에 대한 탐구에 들어간다. 유토피아적 경제학의 모순과 한계를 인식한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이론과 분석을 통해서 현실적 경제에 대한 분석으로 접근한다. 그러면서 시장의 실패에 대해서 다양한 접근을 한다.

 

 "기후변화는 경제 분야에 험난한 과제를 던졌다. 기후 변화는 지금까지 본 것 가운데 가장 크고 범위가 넓은 시장 실패이다."라고 말하는 니컬러스 스턴을 비롯해, 저자가 알기로는 시장의 실패라는 말을 최초로 쓴 프랜시스 베이토가 분석한 시장 실패의 세 가지 원인인 "독과점, 공공재가 생산할 인센트브를 찾지 못하는 점, 과잉효과나 외부효과" 등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렇게 다른 경제학자와 다양한 이론과 사례 그리고 최근에 많이 주목받고 있는 행동 경제학까지 보여주면서. 시장의 불안정성과 실패를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학자 였지만, 미국발 금융위기를 통해서 다시 재조명 받게 된 하이먼 민스키의 '금융발안정 가설'까지 설명해준다. "민스키는 효율적 시장가설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 경제는 태생적으로 보수적인 재정에서 무모한 투기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렇게 지루한 경제학 역사와 이론 공부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미국발 금융위기를 분석하면서 유토피아적 시장을 주장하는 이들에 현실은 이렇다는 것을 설명한다. 머리 아픈 경제학의 역사와 이론 공부에 지친 사람들에게 이 부분은 반갑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미 많은 책들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이 많아서 쉽게 읽히고 이해하기도 쉽다

 

 그렇게 저자는 유토피아적 경제학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면서 "개혁에 대한 정치적 의지가 꺼지기 전에, 월 스트리트의 위상을 바로 잡고 유토피아 경제의 대척점에 대한 현실 기반적인 경제학을 놓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유토피아 경제학의 실패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경제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나라의 어설픈 시장주의자들이 쉽게 시장의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 같다. 대척점에 있는 북한이라는 나라가 보여주는 공산주의의 명백한 몰락과 한계로 시장주의가 최고라는 이분법적 믿음의 자리를 대체제가 아직 없기 때문에 그 믿음이 절대적일 수 밖에 없다. 결국 단순히 시장의 실패를 보여주면서 시장의 한계와 정부나 사회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그들을 쉽게 설득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믿음을 대체할 아니면 대척점에 서 있을 수 있는 새로운 현실 기반의 경제학에 대한 고민이 필요함을 이 책은 가르쳐 준다. 우리 사회의 고민 지점은 단순히 복지의 강화가 아니라 인간을 시장 앞에 세우고, 인간을 기업 위에 세울 수 있는 현실기반 경제학에 대한 연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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