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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프래질 - 불확실성과 충격을 성장으로 이끄는 힘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안세민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10월
평점 :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분명 호기심이 많이 갈 작품이긴 하지만 보지 않는다. 내 취향을 잘 아는 내 친구가 얼마 전, 이 드라마를 왜 안보냐고 물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젊은이는 희망에 살고, 늙은이는 추억에 산다."라는 프랑스 속담을 응용해 이렇게 말했다. "난 아직까지 추억보다는 꿈을 먹고 살고 싶거든". 90년대의 추억을 자극하는 그 드라마의 재미는 보지 않아도 주변에 들리는 이야기 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 드라마가 나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은 추억에 묻혀 현실을 잊어버리기 싫기 때문이다. 그깟 드라마 한번 본다고 현실을 잊기는 하지 않겠지만, 지금 우리사회 전반에 보이는 퇴행적 현실은 추억보다는 꿈과 희망이 더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탐욕이 MB정권이라는 희대의 사기꾼 정권을 탄생시켰다면 박근혜 정권은 기성세대의 추억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희망이나 꿈을 꾸지 않은 기성세대들이 자신들의 추억을 현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젊은이들의 희망과 꿈을 짓밟고 있다. 청년실업의 장기화는 물론이고, 청년정신의 상실로까지 나타난다. 추억으로 현실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졌던 젊은 시절의 희망과 용기를 과소평가하고 현실을 과대평가해 버린다. 그래서 자신의 자식들이 현실에 안주해 편안하게 살기를 바란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사명감 없이 그저 안정된 것을 추구하는 우리세대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조금씩 꿈과 희망으로 사는 젊은이들이 줄어든다. 너도 나도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다 보니 우리 사회의 역동성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계층은 고착화 되어가고, 젊은 이들의 꿈과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어간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대자보의 열풍은 바로 현실이 되어 버린 기성세대의 과거 추억에 대한 갑갑함과 반발의 표현이랄까? 태어나서부터 민주주의를 경험했던 세대와 소수의 민주투사들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민주주의를 체험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던 기성세대 간의 인식차 때문이다. 왜 이런 인식차이가 발생할까? 기억의 왜곡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인간은 스스로가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바꾸는 경향이 강하다. 나쁜 기억마저도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젊은 시절에 불합리에 저항했던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서 꼰대가 되는 이유 또한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경험법칙은 경험을 통해 찾아낸 방법으로 대상을 단순하게 만들어 실행에 옮기기 쉽도록 해준다. 그러나 경험법칙의 중요한 장점은 사용자가 이런 법칙이 완벽하지 않고 편리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장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런 사실을 잊어버리면 경험의 법칙은 위험해진다."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직면한 추억의 현실화는 저자가 말하는 경험법칙이 만들어낸 장점을 잊어버림으로써 나온 것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래질하다. 경험의 법칙의 중요한 장점을 잊어버리고 경험의 법칙에 의존해 그것을 나쁜 현실로 만들어 버리니까. 같은 성공의 반복된 경험은 나중에 커다란 실패로 이어진다. 환경의 변화에 따른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같은 방식을 고수하다 결국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경로 의존성이라고 하는 인간의 심리. 이것은 바로 우리를 프래질하게 만든다. 민주주의 후퇴와 과거로의 회귀는 추억을 좋아하는 꼰대들에게 그저 추억일 뿐 다른 충격에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블랙스완과 같은 예측하지 못하는 충격에만 부러지는게 아니라, 작은 충격에도 무너진다. 소수의 시민들의 희생에 의해서 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왔듯이, 시민 위에 선 과거의 추억에 기댄 정당성 없는 권력이락 작은 충격에도 프래질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이 휘두르는 것은 공권력과 언론을 이용한 탄압이다. 자신의 불법을 감추고 자신을 반대하면 공권력으로 탄압하는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프래질한 권력을 유지한다.
하지만, 저자는 "하향식인 모든 것은 대상을 프래질하게 만들고 안티프래질과 성장을 가로막는 반면, 상향식은 적당한 스트레스와 무질서가 존재한다면 대상을 번창하게 만든다."라고 주장한다. 하향식의 무자비한 권력의 프래질은 꿰뚫어 보고 있다. 북한 서열 2위라는 장성택의 숙청은 하향식 절대 권력의 프래질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까? 정당성과 정의를 상실한 권력은 프래질하고 그 프래질함은 블랙스완이 아니라도 쉽게 깨어진다. 반대로 시민 개개인은 안티프래질한 경향이 강하다. 추억이 아니라 희망과 꿈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어떤 고난에도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모두 안티프래질하다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 그들 중 많은 수는 "안티프래질은 회복력 혹은 강건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회복력이 있는 물체 충격에 저항하면서 원상태로 돌아온다. 반면, 안티프래질한 대상은 충격을 가하면 더 좋아진다."라는 저자의 주장에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상상할 수 없는 희생속에서 사회는 안티프래질하게 변화해 왔던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그것을 추억으로 삼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가 프래질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것은 우리가 현실과 불의에 그저 타협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 아닐까? "타협은 묵인과 같은 의미다. 내가 인정하는 단 하나의 근대 명언은 조지 산타야나가 했던 말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진실함을 가지고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은 도덕적으로 자유롭다.' 이것은 목표일 뿐만 아니라 의무가 되어야 한다."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바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영화 "변호인"에 대한 열풍을 단순히 노무현의 향수라고 치부하고 싶은 집단이 존재하겠지만, 이것은 바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진실함"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에 안티프래질을 추구하는 열망을 살아 있는 것 같다.
교육이라는 문제에서도 우리는 프래질화 현상에 직면해 있다. 잘못된 정보를 교과서로 만들어서 그것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한다. 학생의 다양성을 존중하려던 교육제도가 갑자기 학생의 통실성을 추구하려는 교육제도로 강제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아이들의 삶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줄이려는 시도는 아이들을 이른바 '문화적으로 세계화된 위대한 사회'에 가두고 다양성과 차이를 줄이는 결과를 초래한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유기체와 동적 시스템의 경우, 정상 상태는 일정 정도의 가변성, 무작위성, 정보의 지속적인 교환, 스트레스를 요구한다. 이것은 가변성을 잃어버리면 곧 죽음을 맞이한다는 의미다."라는 저자의 주장을 우리 사회 시스템은 현실에 강요하고 있다. 민주주의란 "시스템 내에서, 멸종을 불러오는 극단적인 충격이 아닌 어느 정도의 잡음과 동요가 빈번할수록 적자생존과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의 효과는 다음 세대의 특징을 규정짓는 데 더 많은 역할을 한다." 중요한 체계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반대로 가고 있다. 사회의 다양성은 그렇게 무너지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대리인들에 대한 강력한 비난을 한다. 리스크를 스스로 지지 않고, 이득을 취하는 위선적인 대리인들이 시민을 기만하고 세상을 안티프래질 하고 만든다는 것이다. 미국발 경제 위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파생상품과 그것을 팔아서 이득을 취한 집단이 바로 리스크를 지지 않고 이득을 취한 사악한 대리인들이다. 그들은 어설픈 합리주의로 세상을 속인다. 저자는 "어설픈 합리주의가 갖는 오류는 인간사에서 두 번재 유형의 지식 즉 학문적 지식의 역할과 필요성을 과대평가하도록 만들고 체계화할 수 없는 것, 더욱 복잡한 것, 직관적인 것,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라고 한다.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괴면으로 일관하는 정치인 평론가 그리고 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4대강 사업은 찬성해 학자적 양심을 팔았던 그들은 지금 거기에 대한 책임조차 없다. 우리의 자연은 그들의 행위로 인해서 프래질해졌는데도 말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의 대리인들이 얼마나 사악한 집단인지를 바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합리주의가 더욱 세련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 세련되고 싶다면, 자신이 세련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말한다. 블랙스완 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현상은 언제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했던 교훈을 이제는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설픈 학문적 권위와 합리주의를 앞세워서 거짓말을 일삼는 대리인들에 대해서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와 사회를 프래질하게 만드는 사악한 집단이다. 프래질한 현실을 타게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저자는 "당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위엄 있게 운명을 맞이한다면, 자신을 작아 보이게 만드는 행동을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것이 우리를 안티프래질하게 만드는 첫 걸음이지 않을까?
이 책은 실제로 방대한 분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렇게 정치적인 현실에 대한 리뷰가 되어 버린 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 교차하는 지금의 현실이 책에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은 바로 저자가 경계하고 있는 프래질화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책을 읽은 것이 저자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 만큼 이 책의 내용은 때론 복잡하고 방대하다. 하지만,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책 속의 세상만 바라보면 제대로 책을 읽은 것이겠는가? "범죄를 중단시키지 않는다면, 당신도 공범자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세상을 패래질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 침묵하고 순응하면 공범이 되는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당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위엄 있게 운명을 맞이해야"하지 않을까? 지금 당장은 안녕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안녕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가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