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 <호프>의 내용 들어 있습니다.
1. 영화가 시작한 후 거의 1시간 가까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파괴다. 무시무시한 파괴. 규모와 범위를 한 눈에 파악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파괴. 우리가 더욱 그 파괴를 배가하여 느끼는 것은 영화는 의도적으로 그 파괴를 일으키는 주체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괴 그 자체를 본다기보다는 파괴의 흔적, 혹은 파괴의 잔해를 본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2가지이다. 먼저 하나는 왜 이 영화는 파괴에 맞서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의 시선을 중심으로 영화를 이끌어가려는 것일까. 이 정도의 파괴를 일으키는 존재라면 사실 최대한 도망쳐 생존을 먼저 도모하는 것이 맞아 보인다. 그러나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들은 일단 맞선다. 거의 효과도 없어 보이는 총을 들고. 다른 하나는 '왜' 라는 질문을 하는 방식, 또는 그 내용이다.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일까.
2. 소통할 수 없는 존재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파괴. 사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한동안 그냥 파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소통할 수 없는 존재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파괴'를 본다. 그것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의도적으로 파괴의 주체를 숨기기도 하지만, 그들이 소통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점에 있다. 그런데 이 소통할 수 없는 존재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파괴는 사실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오늘 이런 파괴를 했을지도 모르니까. 예를 들어 길을 걸어가며 우리는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곤충 혹은 벌레를 밟아 죽인다. 아니면 재미로 벌레의 날개를 뗀다. 그저 한 마리의 벌레 뿐일까. 어떤 경우에는 대규모의 벌레 집단을 파괴하기도 할 것이다. 그냥 우리는 걸어갈 뿐이지만, 혹은 악의없는 장난일 뿐이지만 그때 의도치 않게 한 세계가 파괴된다.
3. 아니, 나는 영화 속의 그들이 아무 의도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설명하는 이유, 혹은 나중에 갖다 붙인 이유는 있을 것이다.) 단지 거꾸로의 입장에서, 소통할 수 없는 존재에게 파괴당하는 자 입장에서는 파괴하는 자의 의도는 사실 중요치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것을 나홍진의 <호프>는 거꾸로 뒤집어서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동물, 혹은 그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있는 무엇인가를 대하는 방식, 소통할 수 없는, 아니 굳이 소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무엇인가를 대하는 방식을 영화는 이상하게 거꾸로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여러 사냥꾼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평소에 사냥하던 사람들은 거의 자신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거꾸로 사냥당한다. 혹은 영화 속에서 가장 먼저 파괴되는 것, 혹은 파괴의 양상을 보여주는 곳은 시장이다. 사냥한 어떤 것, 혹은 길러진 어떤 것, 우리가 강제로 채취한 무엇인가를 사고파는 곳. 즉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사냥당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길러지고 싶었을까.
4. 그런데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단순히 파괴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점은 그래서 영화가 무엇인가 질문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점은 단지 소통할 수 없는 존재로만 보였던 외계인에게 의미심장한 서사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아니, 나는 기독교 상징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많이 이야기된 여러 기독교 상징 같은 것들은 그냥 나홍진의 낚시질이라고 생각한다. 호사가들아 한번 낚여보지 않으련 하는. 나홍진은 이미 그런 전력이 많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외계인의 서사가 등장하는 그 시점이다. 영화가 외계인들의 말에 자막을 부여하는 시점. 그러니까 우리(관객)에게 소통을 시도하는 시점. 그 시점은 그렇게 강해 보였던,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존재로 보였던 그들이 가장 곤경에 빠지는 시점이다. 왜 황제의 함선은 불타서 추락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어쩌면 그들도 그 위에 더 강한 무엇인가에 공격을 받은 것은 아닐까.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신나게 우리를 파괴하던, 혹은 사냥하던 그들 역시도 그 위에서 보면 그저 나약한 존재들 아니었을까. 그들도 인간보다 겨우 강력할 뿐, 그 위에 더 강력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왜 이 때에 이르러 외계인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을까. 아니, 그들에게 목소리가 부여되었을까.
5.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 사냥하면서도 우적우적 무엇인가를 먹어야 하고, 똥이 마려우면 똥을 싸야 하는 그런 인간이라는 존재. 우리는 인간이니까 그 인간이 보이지만, 아주 멀리 인간 위에서 보면 혹은 아주 멀리 인간 밑에서 보면 그건 보이지 않는다. 아주 멀리 위에서 보면 나약한 벌레로 보일 것이고, 아주 멀리 밑에서 보면 무시무시한 파괴자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더 아래는 없을까. 그보다 더더 위는 없을까.
6. 그러니까 이 영화는 묘한 계급 혹은 다층적인 구조를 드러내는 것처럼도 보인다. 동물 혹은 곤충 위에 있는 인간,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외계인. 그리고 어쩌면 그 위에 다층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어떤 미지의 존재.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했던 것 중의 하나는 '왜 이 외계인들의 많은 부분이 인간과 그렇게 닮았을까' 혹은 '왜 그렇게 인간의 어떤 속성들과 비슷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관점에서라면 사실 그 외계인이 인간 사회와 비슷해 보이는 것, 즉 인간과 비슷하게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진 형상이며, 걷거나 움직이는 방식도 비슷하고, 일종의 계급을 갖춘 계급 사회고, 애완동물도 있고. 눈물도 흘리고... 그런 것은 어쩌면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니까 나홍진의 외계인은 우리를 닮아야 했다. 결국 우리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것들이 우리를 닮은 것처럼. 영화 <터미네이터>에 인간과 꼭 닮은 로봇이 나와 우리를 파괴하는 것처럼.

7. 그래서 이 책에 좀 끌렸다. 웹 킨의 <동물, AI, 신>. 이 책의 간단한 요약은 이렇다. "인류학자 웹 킨이 인공지능에 관한 질문을 동물과 귀신, 신 등 비인간 존재와 인간의 관계를 통해 살펴본 책이다. 넌오비어스 북어워드 1차 후보작으로 선정됐다. 수십 년에 걸친 현장조사와 문화 간 연구를 바탕으로 무엇이, 그리고 누가 도덕적 고려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오래된 질문을 인공지능의 문제와 연결한다." 우리가 비인간 존재와 맺는 관계를 고찰해 윤리학의 질문을 하려는 책인데, 아직 사놓고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더 이야기하는 것은 오만한 것 같고, 나는 이 책의 설명을 보는 순간 다시 한 번 영화 <호프>를 떠올렸다. <동물, AI, 신>, 그리고 외계인. 우리가 동물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적어도 영화 <호프>에서는 우리가 외계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 닮았다. 바로 파괴라는 방식을 통해.
물론, 이 책은 파괴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우리가 동물 혹은 신과 귀신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우리가 로봇 혹은 AI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말해줄 것이라는 아이디어는 정말 참신하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윤리와 도덕의 질문(누가 도덕적 고려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을 한다는 것. 우리는 로봇과 AI에게 도덕을 기대해도 될까. 영화 <호프>에서라면 이 질문. 우리가 외계인들에게 도덕을 기대해도 될까.
8. '누가 도덕적 고려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라는 책의 질문. 그런 관점에서라면 영화 속에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대사는 여경찰 임성애(정호연)의 대사다. "아무리 외계인이라도 그러면 안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외계인의 도덕, 외계인의 윤리. 그런데 왜 외계인이 그러면 안되지? 왜 그들이 우리와 같은 도덕 관념을 가져야 하지? (만약 책의 질문이라면 '왜 AI가 우리와 같은 도덕 관념을 가져야 하지?') 아니, 더 밑의 관점에서 거꾸로 말한다면, 우리 인간들도 그러면 안되는 거였을까. 그런 거였을까.
덧.
사실 나는 나홍진은 그냥 대충 구조만 만들어놓고 자기가 찍고 싶은 것을 그냥 찍은 것 같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나중에 대강 가져다 붙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카체이싱, 말체이싱, 총격전, 괴수의 파괴, 그냥 자기가 찍고 싶었던 것을 찍은 것 같다. 뭐 사실 그러면 안될 것도 없다.
한 마디 더 하자면, 액션은 액션이 훌륭하면 그 자체로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어떤 숭고한 주제가 더 붙는다고 더 좋은 영화가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상징이나 숨겨진 것들이 많아야 좋은 영화가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액션은 훌륭하고,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액션을 보여준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그간 나홍진의 어떤 영화보다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