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발칙한 한국학
J. 스콧 버거슨 외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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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J.스콧 버거슨과 친구들'이 지었다고 되어 있는 이 책은, 조금은 특이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1장은 스콧 버거슨을 제외한 여러 친구들이 한국에서 겪은 다양한 사건들을 위트를 섞어 짤막하게 나열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2장은 스콧 버거슨과 다른 친구들의 인터뷰 형식이고, 3장은 다양한 맥락에서 각 친구들이 한국에서 생활한 이야기를 길게 다루고 있고, 4장에 가서야 비로소 스콧 버거슨 그 자신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앞의 장들도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중에 조금은 생각해 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4장이다. 사실 앞의 장들은 어떻게 보면, 다른 외국인들의 책들에서도 많이 다루어졌던 내용들이다. 한국의 어떤 폐쇄적인 부분들, 혹은 외국인의 눈으로 보는 비합리적인 부분들이나,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겪었던 일들을 다루는 글들은 이제는 조금은 식상해진 감마저 있다. 그래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 광우병 파동의 촛불집회 정국에서 자신이 느꼈던 생각들을 스콧 버거슨, 한국명 '왕백수'가 풀어놓고 있는 4장이다.

글쎄. MB의 충실한 지지자나, 조중동 등의 보수신문을 열심히 탐독하고, 그 논지의 정갈함에 감탄해 마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 4장 부분을 읽는 반응은 대체로 2가지로 나누어질 것 같다. 하나는 뭐 외국인이니까,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거지 뭐. 저런 식으로 생각하다니 흥미로운걸...하면서 살짝 웃으면서 지나가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분노하거나 혹은 적극적 또는 소극적인 반박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 생각에는, 스콧 버거슨은 전자의 반응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본인과 한국에 거주하는 다른 외국인들을 '엑스팻(expat)'이라고 부른다. 이 '엑스팻'은 약간은 자조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엑스팻'을 이렇게 정의한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expatriate)을 부르는 말로, 한국에 도착한 이래 이 땅의 이상하고 독특한 매력에 사로잡혀 떠나지 못하고, 혹은 떠났다가도 다시 되돌아오지만 결코 이곳에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가 본인과 다른 친구들을 '엑스팻'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자신들을 그저 '엑스팻'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어떤 반항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이 '내가 외국인으로 보입니까?'라는 Seoul Don(서울 돈)의 글로 시작하여, '한국말로 이야기해요'라는 스콧 버거슨의 글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즉 스콧 버거슨과 친구들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 책에서 내내 본인들을 단지 외국인으로만 치부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간에, 그래서 내가 이 짤막한 리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전자보다는 후자쪽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것이 어떤 외국인의 글이 아니고, 한국인의 글이라고 생각해 보았을 때에, 그의 글은 흥미로운 관점을 담고 있지만, 어떠한 부분은 경직되어 있고, 또한 어떠한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렇게 한국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스콧 버거슨은, 적어도 그의 글로만 놓고 판단하자면, 아직은 엑스팻일 수밖에 없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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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스콧 버거슨이 4장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핵심은 4장 맨 처음의 '종로의 이방인'이라는 꽤나 긴 글 보다는, 그 뒤의 '한국에는 사랑의 여름이 없다'는 짤막한 글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는 그 글에서 1968년을 포함한 1960년대 서양(유럽)에서 일었던, 반(反) 권위주의적인 반(反) 문화적인 혁명의 기운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의 여름 이후 40여 년이 지난 지금, 다른 여름이 여기 한국에 왔다 갔다. 2008년 여름의 짧은 순간 동안, 종로 거리는 신명나는 음악과 기묘하고 새로운 공동체적 기쁨으로 생생하게 살아났으며, 나는 애매하고 단순했던 소비자 권리 운동이 어떤 식으로든 전면적인 혁명으로, 마술처럼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시원찮게, 다소 슬프게 끝나버렸다. 이유가 분명치 않은가? 다시 한 번, 사랑의 정치는 언제나 똑같았던 증오의 정치에 맞설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p.429)  
   


한 마디로 말해서, 2008년 광우병 정국 속에 벌어졌던 종로에서의 시민의 쿠데타(그의 표현이다)는 권위주의인 신화에 맞서는 또 하나의 권위주의적인 신화에 불과했다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권위주의적인 신화화를 깨부수었던 1960년대 서양에 비하자면 여전히 촌스러운 어떤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가 보는 2008년 종로는 그렇다. 그것은 보수진영에 대항하는 진보진영의 어떤 헤게모니 싸움이었으며, 정권을 탈취하려는 전(全) 진보진영이 결탁한 일종의 쿠데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폭력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비겁한 폭력이었으며, 그 시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폭력은 진보진영의 언론에 의해서 교묘하게 감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어떤 신화화적인 기제가 작동하였음을 지적한다. 광우병 쇠고기의 위험성과는 별개로, 그것을 과장하여 전달하는 신화화적인 기제가 시민들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켰다는 것이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를 가로지르는 잠재적 반미감정의 암류는 유명한 '촛불 든 소녀' 로고를 살펴 봄으로써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로고는 잠깐 사이에 광우병 촛불시위 운동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지난 2002년 한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촛불시위는 신효순, 심미선 학생의 죽음이 그 불씨가 되었다. (중략) 내가 보기에 2008년의 '촛불 든 소녀' 로고는 도상학적 측면에서 너무나도 비슷해 2002년 촛불시위를 노골적으로, 적어도 잠재적으로 환기시켰다. 이로써 또 한 번 미국 헤게모니의 사악한 음모와 약탈에 맞서 지켜내야만할 한국의 '무구함'과 '순수함'을 표현한 친숙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심리학적 원형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p.404-405)  
   


스콧 버거슨의 주장은 몇몇 부분에서 들어볼 만한 가치는 있다. MB 정권이 왜 광우병 문제로 발목이 잡히게 되었나를 말하는 부분이나, 386 세력의 어떤 한계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에 어떤 신화화가 개입되어 있다고 논증하는 부분에서는 어떤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확실히 지난 2008년의 촛불시위 정국에서 어떤 광우병의 위험이 약간은 부풀려진 것은 사실이며, 시민들의 시위에서도 폭력적인 부분이 있었고, 시민들의 투쟁에도 어떤 신화화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스콧 버거슨의 말대로, 시위대 중 일부가 예비군복을 입고 나온 것, 그것 역시 어떠한 의미에서는 신화화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그 옷을 입고 나올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의 주장을 귀담아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딱 그 정도이다. 그는 시민들(혹은 진보진영)의 신화화를 깨부수는 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꾸만 그 반대의 진영으로 경도된다. 그리고 급기야는 왜곡된 사실, 혹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어떤 진실인 것처럼 호도해 버린다. 어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반박하기 위해서 다른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나, 왜곡된 사실을 그 논증으로 삼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있겠는가. 즉, 그는 신화화를 깨부수고 반 신화화의 기치를 높이 들기 위해서 또 하나의 신화화를 그의 글의 주요전략으로 구사하는 셈이다. (또한 한편으로, 촛불시위의 모든 부분을 신화적인 내러티브로 해석하는 것 역시 위험한 부분이다. 그가 말한대로, 부시가 이라크 전쟁에 어떤 신화적인 내러티브를 부여하여, 이라크 전쟁을 어떤 현대 문명,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수호로 비쳐지게 했지만, 그것에 어떤 문명전쟁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부당할 것이다. 즉, 2008년 촛불시위에 어떤 신화적인 요소가 있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신화적인 내러티브로 해석하는 것 역시 부당할 것이다.)

   
  나는 2008년 여름 내내 벌어진 주요 광우별 촛불시위에 빠짐없이 참가했는데, 한 번도 경찰이 시위대를 먼저 자극하거나 공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실제 상황은 항상 그 반대였다. 핵심은 늘 전경으로 하여금 어떤 반응을 보이게 자극함으로써 한국의 자유진보세력 미디어(및 그들과 한통속인 수많은 아마추어 '시민기자')가 '보도 자료로 남기는' 것이었다. (p.392-393)  
   

 

   
  또한 광우병 촛불시위를 조직하고 이끄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한국진보연대'가 이미 2008년 1월부터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모의를 해왔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중략) '이명박 정부의 저돌적 추진 과정에서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고리를 포착, 대중적 저항전선을 형성해 투쟁을 전개하자.' 이에 이어진 회의에서 '우리의 목표는 이명박 정부를 주저앉히는 것'이라며 공표했을 때, 그들의 의도는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것이었다. (p.372)  
   

 

   
  가장 유명한 예로 촛불시위 초기 다수의 여중생과 고등학생들이 참여한 것을 들 수 있겠고, (중략) 진보적인 손위세대가 가부장적으로 제공한 더 큰 내러티브에 포섭당했을 뿐이었다 (실제로, 386 세대가 대부분인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촛불시위에 참가하라고 '독려'한 사실이 보도된 적도 있다). (p.398)  
   


물론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내용 중의 상당수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거나, 보수진영의 신문들이나 언론들에 의해 과장되고, 부풀려진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일례로, 시위대의 폭력이 있었고, 그것 또한 일부 감추어졌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항상 시위대가 경찰을 먼저 자극하였다고 말하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실 궁극적인 문제는 그보다는 더욱 근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스콧 버거슨이 '엑스팻'을 넘어서 자신을 한국인으로 보아주기를 원하지만, 그의 시각에는 여전히 엑스팻적인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즉, 스콧 버거슨에게는 결국 한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한국인적인 시각, 또는 한국인만이 가지는 특수한 역사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1980년대의 원형(原形)을 악의적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6월 항쟁의 경험이 2008년 여름 광우병 촛불시위 기간 중에 자주 언급되는 것을 이야기할 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아마도, 그것이 한국인에게 왜 자꾸 언급되는지, 한국인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 말이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 얘기한 대로, 그가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맥락을 제거한 상태에서, 2008년의 촛불 시위가 1960년대 유럽의 진보적인 기치에 비추어볼 때 권위주의적이고 촌스럽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이미 엑스팻의 시각을 어느 정도 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오로지 이야기하는 것은 그 현상이지, 왜 그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인 맥락에서(오랜기간 외세의 침입을 받았다는 점, 일제의 잔재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권위주의적인 정부 수립과 남북분단이 이루어졌다는 점 등), 왜 한국의 시위 문화가 여전히 신화적인 내러티브 중심이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담고 있는지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고, 그것이 가능할 때에만 그가 원하는 진정한 한국인에 그는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두 가지를 여기에 더 첨부할 수 있다. 하나는 1960년대의 유럽의 물결이 그가 생각한 대로 마냥 반 문화적인, 반 권위주의적인, 반 신화적인 내러티브였는가. 그것 역시 어느정도 신화화적 요소가 담겨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도 이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는 것. 이른바 '민주주의를 얻기 위한 투쟁의 양상, 혹은 그 투쟁 조직이 왜 어찌 하여 반 민주적인가.') 그것이 가능해야만, 그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미국이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나, 2008년의 반 한나라당 기치가 단순히 헤게모니 찬탈 움직임에 불과하였다는 주장('한나라당'의 역사성에 대해 그가 한번이라도 공부해본 적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할까)이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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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4장에 있는 스콧 버거슨의 글에만 집중한 나머지 책의 다른 부분에 대한 얘기를 거의 하지 못했다. 3장 부분의 엑스팻들이 한국의 살사(salsa) 문화의 성장에 악전고투한 이야기나, 홍대 인디씬에 대한 글은 아주 재미있었고, 흥미로웠으며, 1장의 몇몇 에피소드들도 충분히 공감해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사실 책의 다른 부분들도 살짝 고개가 갸웃해지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책의 중간에 자주 나오는 북한에 대한 이야기들. 이 책의 대부분의 북한 이야기들은 거의 대부분 조롱들로 채워져 있다. 물론 북한 JI 정권이 조롱할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혹시 이 리뷰를 읽고 혹시 나를 빨갱이로 단정할 사람이 있을까봐 하는 얘기인데, 북한 JI 정권은, 나 역시 그 이상한 체제를 이해하거나 (절대) 긍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끊임없는 조롱이 마냥 유쾌한가하면 그것은 아니다. 결국 조롱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언젠가 북한과 우리가 한 나라로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 조롱뿐인가. 그(와 친구들)가 자신을 진정 한국인으로 생각했다면 과연 이러한 조롱이 유쾌할까.

그러니 이의 연결 선상에서 이 책이 조금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그는 끊임없이 그를 단지 '엑스팻'으로 보아주지 않기를 주장하고, 진정한 한국인으로 대해주기를 원하나, 그의 책에서 계속 나타나는 '엑스팻'적인 시선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와 친구들)가 한국인의 어떤 편협함, 한국 사회의 어떤 폐쇄성, 또는 문화적인 이상함, 특이함에 대해 말할 때, 한국인으로서 말하는 아픈 비판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엑스팻으로 '한국 살람 참 이상해욜..'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왜냐하면 그것에는 한국에 대한 깊숙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이 책 <더 발칙한 한국학>은 엑스팻적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솔직하고 거침없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미수다'보다는 낫다. 그리고 사실 어쩌면 '엑스팻적인 한계를 드러내보이는 것', 그것이 궁극적으로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말이다. 

 

ps. 리뷰의 제목에 대해 말하자면, 'The 발칙한 한국학'이란 결국 잘못된 말, 혹은 외국인의 시선으로 쓰는 잘못된 한국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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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을 걸어나가던 그 불안하고도, 단호한 마지막은 단연 올해의 장면이라 불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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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리뷰를 쓰기가 난감해지는 영화들이 있다. 이야기가 복잡하거나, 구성의 특이점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적어도 되고, 내가 잘 이해가 안 되었던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탐구해보는 내용을 적어도 되고, 그 부분에 담긴 숨은 의미를 읽을 것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적어도 되고, 영화의 어떤 사적인, 공적인 의미가 있으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지만, 어떤 영화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하기가 난감해진다. 어떤 영화적인 기교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 영화, 그렇다고 복잡하거나 난해한 구성도 아닌 영화, 거의 심심할 정도로, 사건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영화들 말이다. 그런 영화들에 있어서는, 내가 그런 류의 리뷰들을 싫어하기는 하지만, 영화의 스틸컷들을 줄줄이 나열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스틸컷만을 줄줄이 늘어놓고, 그 밑에 그 스틸컷 장면의 간단한 설명을 적는 것을 리뷰를 쓰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리뷰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중에서 또 어떤 영화들에 있어서는 아무 말도 안하고 넘어가기란 여간해서는 힘들다. 의외로 드물지 않은 경우지만, 그런 영화들에서 도리어 어떤 '진심'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실하게도, 영화들에게서 읽혀지는 진정성이란 그 영화적인 기교와는 별개인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때로는 현란한 기교가 적시에 터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쾌감도 있지만 말이다.

이 영화 <여행자>가 그런 경우다. 이 영화는 어떤 영화적인 기교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감독이 영화적인 기교에 능숙하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이 영화의 감독 '우니 르콩트'는 이 영화가 데뷔작이다), 어쩌면 그런 부분을 일부러 배제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구성도 거의 평면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보육원에 들어오는 소녀 '진희'의 모습으로 시작해서, 그 소녀 진희가 입양되어, 낯선 공항에 발을 내딛는 것으로 끝난다. 그 안의 이야기들도 그리 특별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사건들은 거의 시간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그 안의 사건들은 우리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사건들이다. 낯선 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녀, 그 안에서 싹트는 우정, 그리고 소녀들간의 다툼, 아버지를 찾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소녀, 반복되는 이별, 입양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들...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어디론가를 한없이 건드린다. 수차례의 반복되는 이별을 경험하고, 진희가 드디어 새로운 곳으로 한걸음 내딛으며, 단호하지만, 불안한 발걸음을 보여줄 때, 상당수의 관객들은 그 소녀의 앞날을, 앞날에 계속될 여행을 응원하는 마음이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비슷한 무게의 무거움이 가슴을 짓누른다. 우리는 또 저런 방식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낯선 공항에 발을 내딛게 했는가. 그 아이들에게 더 좋은 삶을 살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했는가.

이 영화의 어떤 영화적인 기교, 혹은 낯설은 문법이 드러나는 순간은 영화의 처음 부분이 거의 유일하다. 영화의 처음, 이 영화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맛있는 것을 사주고, 케익을 사들고 보육원에 들어가, 보육원에 진희를 두고 나오기까지 영화는 대부분 아이의 눈높이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감추며 세상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얼굴이 영원히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두 장면, 영화는 의식적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비춘다. 아마, 그것이 성장한 후에도 진희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얼굴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처음 장면들은 결국 진희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처음이다. 실제로는 아마도 그보다 훨씬 자주 그 상황동안 진희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얼굴들은 기억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진희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겨우 그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영화적 기교는 마지막에, 이 영화의 거의 유일한 플래시백 장면으로 등장한다. 공항에 내딛기 직전에 끼워넣어져 있는, 자전거를 타고 가며 뒷좌석에서 꼭 껴안았던 아버지의 따뜻한 등 말이다. 즉 이 영화의 영화적인 어떤 기교(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고, 그저 영화적인 문법)는 오로지 진희의 기억을 나타내기 위해서만 보여지는 셈이다.

나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진희의 기억을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와 분리시키려는 의도가 조금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우니 르콩트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했던 내용을 보면, 이 영화는 진희, 즉 (어떤 의미에서는)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 아니다. 르콩트 감독 자신이 입양아였고, 영화 속 진희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지만, 이 영화에서의 이야기들은 누구 한 명의 특정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 때의 모두의 기억이 결합된 결과라고 감독은 밝히고 있다. 즉 스트레이트하게 아무 기교도 없이 전달되는 이 가슴아픈 만남과 이별의 반복은, 누구 한 명의 특정의 가슴 아픈 케이스 아니라, 그 당시 많은 우리나라의 어린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이고, 공적 기억임을 이 영화는 들려준다. 그래서 직선적이고, 단순하게 전달되는 듯 했던 이 영화는 개인의 사적 기억을 넘어서, 모두의 공공의 기억, 우리 역사 속에서 가슴 깊숙한 곳에 담아 놓았던 은밀하고 부끄러운 역사적 기억에까지 그 발걸음이 전달된다. 그것을 영화는 타자화된 시선을 통해, 객관적이고, 무덤덤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 무덤덤함은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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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올해 본 영화 중 Best 3을 꼽자면, 이 영화를 꼽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진희가 공항을 벗어나 새로운 부모에게 걸어가는 그 마지막 장면은 단연 '올해의 장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아이는 '여행자'가 되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삶은 결국 하나의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본 여행자.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이 아이에게는 결국 하나의 길고도 짧은 여행이라는 것 말이다. 다른 하나는 '여행자'라는 말이 가진 하나의 비극적인(혹은 무한한) 속성이다. 결국 '여행자'라는 것의 말의 안에는 '영원한'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행자가 여행을 멈추는 순간, 그(녀)는 여행자가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녀)가 여행자로 불리는 그 동안은 그(녀)는 결국 여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 영원히 고향에 정착하지 못하고, 어디론가로 계속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 즉 여행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Camel의 노래대로 'stationary traveller'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떠나는 아이들에게 불러주는 마지막 노래인 '작별'과 '고향의 봄'은 참 서글프고, 인상적이다. 역설적이게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단 한 곳, 고향에서만은 아마도 불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노래는 오로지 타향에서만이 그 의미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노래를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부르게 하는 것은 그래서 상당히 잔인해보이기도 한다.

그 '여행자'는 어떤 의미에서의 여행자일까. 이 영화의 영문제목이 <A Brand New Life>던가. 거기에 작은 희망을 걸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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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1-24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서글픈 이야기였지만
끝에서 강인한 어떤 희망을 봤어요.
진희가 정말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좀 더 단단해져야 할 텐데..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맥거핀 2009-11-25 23:40   좋아요 0 | URL
진희란 이 소녀는 연약하면서도 참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죠.
어린 나이의 김새론이 그 모습을 120% 잘 그려냈다는 것도 경이롭구요.
저도 진희의 행복을 마음 속으로부터 빌어봅니다.
우리가 이 소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겨우 그것 뿐인것 같아요.
 
파주 - Pa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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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안개 그 자체인 영화, 그들에게 그 안개가 걷히는 순간이 오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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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 Pa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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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미리니름이 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낮게 깔린 안개 사이로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그 중 한 대의 자동차 안에는 은모(서우)가 앉아 있다. 그녀는 7년 전에 죽은 언니와 같이 살았던 곳, 그리고 3년 전 같이 살던 형부 중식(이선균)을 떠나 인도로 떠났기전 살았던 그 곳, 파주로 가는 중이다. 그녀의 언니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지금 그 형부 중식이 철거민대책위원회(철대위)를 이끌고 있다. 물론 아직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른다. 필시 얼마 후에 그녀는 형부를 만나게 될 터이니, 그것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아직은 베일에 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흐릿한 안개들 사이로 무심하게 파주를 가리키는 안내 표지판이 나타나며 영화는 시작한다.

시작부의 이 이미지들은 영화를 전체적으로 지배한다. 흐릿한 안개들 사이로 나타나는 은모 얼굴의 클로즈업 숏. 흐릿한 안개들 만큼이나 모든것은 명확하지 않다. 왜 3년 전에 그녀는 도망치듯이 이곳을 떠났는가, 그리고 왜 그녀는 다시 파주로 돌아가는가, 그리고 그녀의 언니는 어떻게 죽었을까, 중식은 왜 아직 거기에 남아 철대위를 이끌고 있는가, 그리고 중식은 왜 굳이 언니의 보험금을 그녀 앞으로 돌려 놓았을까,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질문- 그녀는 그를, 혹은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가. 클로즈업된 그녀의 혹은 그의 얼굴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관객은 처음에는 그 얼굴들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고 애쓰다가 이내 포기하고 만다. 그 얼굴들은,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겪고난 사람들의 얼굴이 그렇듯이, 어딘가에서 표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감독의 자비 뿐이다. 어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주기를-.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친절한 방식으로는 전달되지 않는다. 어쩌면 조금은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 은모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잡으면서 마치는 이 영화는, 도리어 중간에는 은모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상당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은모는 중식이 서울에서 어떠한 일들을 하면서 지내왔는지 모르고(여자 선배와도 어느 정도의 관계였는지 잘 알지 못하고),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중식이 왜 그녀 앞으로 보험금을 돌려 놓았는지도 모르고, 중식이 어쩌다가 철대위를 이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관객들은 그 중 몇몇의 이야기를 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안다고 생각한다. 이 차이, 은모가 모르고, 우리는 알고 있는 것(혹은 알고 있다고 믿는 것, 또는 오해하고 있는 것)의 차이, 이것이 은모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몇 개는 명확하지만, 또 몇 개는 여전히 흐릿하다. 그리고 감독은 시점을 흩뜨리는 것으로 모자라, 현재-8년 전-다시 현재-7년 전-3년 전-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기이한 방식의 연결로 이 흐릿함을 가중시킨다(더구나 시점을 과거로 이동시킨 후에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순간은 명확하지 않다). 이 흐릿함은 인물들의 묘사에도 여전히 이어진다.

간단히 말하면, 중식은 선하고,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고귀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관객은 몇몇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가 은모를 위해서 모든 책임을 떠맡고, 철대위를 이끌고 하는 것들이 단지 어떤 고귀한 희생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 그 이면에는 왠지 다른 것들이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것의 하나는,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은 심한 나약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밑에서 화염병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위에서 돌아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의 표정, 혹은 주차장에서 자동차에 틀어박혀 차를 팔고 있는 그런 모습, 가게에서 혼자 소주병을 앞에 두고 술을 마시는 모습, 아니 그런 사소한 것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영화의 시작 부분을 다시 기억해보자. 그는 수배된 상태로, (아마도 자신을 대신해) 감옥에 간 선배의 부인(이자 또다른 선배)에게 얹혀 살고 있다. 아마도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게다가 그는 그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몇 가지들로만 그를 비난하는 것도 온당치는 않아 보인다. 그는 몇 개의 이질적인 것들이 교묘하게 배합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이 그를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것을 운동권 지식인의 일반적인 나약함으로만 연결시키는 것 역시 또한 부당할 것이다.)

아마도 그의 반대편에 나이트클럽 사장(이경영)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 은모에게 짓는 그 미소는 거의 악의 화신에 가까운 미소로 보인다. 그리고 그 미소는 종교적인 어떤 것을 생각나게 한다. 공교롭게도 영화를 본 이날은 일요일이었고, 교회에서의 그 날의 말씀의 소재는 창세기에서 하와(이브)가 뱀에게 유혹을 당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알고, 그녀는 알지 못했던 몇몇 일들 때문에, 그녀는 결국 악마의 화신과 손을 잡은 셈이었다. 박찬옥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아마도 이는 '배덕(背德)'일 것이다. 그리고 박찬옥 감독의 좋은 표현대로, 마지막에 그녀는 그녀 안의 괴물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단지 배덕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주저하게 된다. 어쩌면 그녀가 배덕한 것이 아니라, 배덕을 당했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꺼이 파주로 돌아왔지만, 다시 상처를 안고 그곳을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말라'는 이야기까지 들으며.

그러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의 실마리는 은모(서우)가 쥐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결국 중요한 질문은 그녀는 그를, 혹은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는가-이다. 은모는 혼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것을 공유하고 싶지는 않아한다. 그녀와 언니의 사이에 중식이 나타나자, 그녀는 둘 사이를 떠나버렸고, 다시 언니가 죽자 중식에게 돌아왔고, 다시 그들 사이에 중식의 여자선배가 끼어들자, 다시 그들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다시 파주로 돌아왔지만, 결국에는 그를 놓아버렸다. 그녀가 중식에게 한 마지막 질문에 대해, 그녀가 원했던 답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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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이야기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이야기보다도 훨씬 중요해 보이는 것은 그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중요해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계속 반복되는 이미지인 불의 이미지, 들끓어오르는 이미지이다. 이 끓어넘치는 것, 그리고 그것과 연결되는 불은 이 영화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아이에게 쏟아넘쳐 상처를 입히는 뜨겁게 끓어오르는 물, 그리고 죽은 언니의 등의 화상 자국, 가스 폭발 사고, 불타오르는 화염병...계속 물들은 끓어오르고 넘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음에 가깝게 그들을 데리고 간다. 이 끓어넘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장 간단하게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그들의 욕망이다. 무엇인가를 향한 그들의 욕망은 그들, 혹은 그들 주위의 어떤 것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다. 그 욕망들은 그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 끓어오르는 욕망이 없다면 그들은 결코 살아갈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차(茶)를 팔던 중식에게 뜨거운 물이 떨어지던(팔 물이 동나던) 장면은 한편으로는 재미있어 보이기도 한다. 아내도 죽고, 은모도 떠나버린 상태에서 살아갈 희망을 잃고 차나 팔며 살아가는 중식에게, 차를 탈 뜨거운 물이 떨어져 버리는 이 장면은 왠지 중식 그 자신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건물 속에서 필사적으로 화염병들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아래에서 또다른 죽음의 사신들은 그들에게 또 죽음의 물줄기들을 쏟아 붓는다. 그 욕망이 꺼지게 하려고, 그 살고자 하는 치열한 몸부림을 멈추게 하려고 말이다. 

그 물들이 끓어오르다 못해 폭발하는 상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안개다. 결국 안개라는 것은 수증기. 즉 물이 끓어오르다 못해,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破)괴되어 가는 도시이자 흐릿한 안개로 낮게 깔린 도시 파주(坡州)는 끓다가 넘쳐버린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도시이다. 그 도시에서의 욕망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아주 저열한 수준에서는 번쩍거리는 나이트 불빛이기도 하고, 누군가에는 땅을 독점하고 그곳에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거대한 이익을 남기려는 욕망이기도 하고, 누군가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무너져내리는 건물에 들어가 포크레인에 맞서야 하는 피맺힌 욕망인지도 모른다. 그 욕망의 중심의 한 가운데에, 중식과 은모의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혹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것들을 뛰어 넘어야 하는 그런 욕망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들의 운명의 길이란 그저 들끓는 것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들끓다가 못해, 자욱한 안개로 남을 수밖에 없는 그런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야기가 안개가 자욱한 파주에 은모가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해서, 은모가 중식과 아닌 미애와 함께 이곳을 떠나는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마지막 장면에 안개가 있었던가. 기억이 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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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1-19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끓어오르는 것들의 이미지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들
네, 마지막 장면에 안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제겐..
역시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09-11-20 11:5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 마지막에 안개가 남아있었기를 바랍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길을 은모가 달려갔다면,
어쩌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신호일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