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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칠드런 - Goodbye Childre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스포일러 있음)
그들의 마지막은 주인공 줄리앙의 입을 통해 몇 마디의 나레이션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관객들의 한숨과 함께, 영화는 끝나고, 슈베르트의 피아노 선율이 울리며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영화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음악은 가정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던 슈베르트의 생애와 겹쳐져 관객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마침내 엔딩크레딧도 끝나고 관객들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무거움과 한숨. 이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무기력함의 공유
영화는 두 소년의 우정을 담담한 어조로 시종일관 그리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영화적인 수식이나 그럴듯한 사건은 없다. 두 소년은 보통의 소년들이 그러하듯이 한 두 가지의 비밀을 공유하며 친해지다가도, 금새 자존심을 내세우며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 말다툼은 주먹다짐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며 이 이야기가 1944년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보네가 유태인 소년이라는 것을 관객들이 알게 되면, 관객은 다가올 파국을 예감하게 된다. 두 소년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세계의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이 위험은 엔딩이 다가오기 전까지 조금씩 이 두 소년 곁으로 다가오지만, 이 파국은 이 두 소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결말이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주인공 보네도 알고 있다. 보네는 담담하게 짐을 싸며 줄리앙에게 말한다. "언젠가는 잡힐 줄 알았어."
이 마지막을 어쩔 수 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은 줄리앙과 보네 뿐만이 아니다. 스크린 밖의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관객은 줄리앙과 함께 보네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이 때부터 관객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저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바라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의 중반부 관객은 한 차례의 위기의 순간을 경험한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된 줄리앙과 줄리앙의 엄마와 형, 그리고 보네. 여기에 일단의 군인들이 나타나 신분증을 검사하기 시작한다. 이곳은 유태인이 출입할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는 곳. 이들은 한 유태인 노신사를 발견하고 그를 다그치기 시작하고 관객은 점점 불안해진다. 다음 차례가 보네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관객은 무기력하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조용히 그들이 지나가기를 바랄 뿐. 다행히 한 독일 군인의 객기로 사태는 무사히 종결되지만, 관객은 서서히 그들의 무기력함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식당 안의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무기력함은 영화의 엔딩에 정점에 이른다. 줄지어 선 소년들은 잊을 수 없는 한 순간을 경험하지만, 그 경험은 오롯이 관객들에게도 전이된다. 무기력함과 공포. 그들에게는 친구를 구하고 싶은 심정과 살아남고 싶다는 심정이 교차하지만, 그 순간 실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저 가는 친구의 손을 한 번 잡아주거나, "잘 가세요. 신부님."을 외치는 정도. 이 경험은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관객은 순간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그 소년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램일 뿐이다. 스크린 밖의 관객의 지독한 무기력감.
이 무기력함은 필연적으로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죽은 자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연결된다.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그래서 그들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어떤 책임이 있다는 그런 생각. 그래서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물었고, 우리 나라의 많은 작가들 역시 "광주 이후에 문학이 가능한가?"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이 무기력함과 죄책감은 자기합리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많은 사람들은 '침묵의 카르텔'을 유지함으로써 유태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방조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이 '침묵의 카르텔'과 자신들의 이성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유태인들과 자신들을 애써 분리시키고, 유태인들이 탐욕스럽고, 자신들밖에 모르는 존재들이라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다.
무기력함의 이후는
결국 비밀을 공유하면서 시작된 주인공들과 관객들의 공유 의식은 엔딩 장면에서의 무기력함의 공유로 이어진다. 이 순간을 어쩌면 영화라는 공적체험이 관객 개개인의 사적 체험으로 전이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고보니 <굿바이 칠드런 An Revoir Les Enfants>라는 제목이 심상치 않다. 이 말은 떠나는 신부가 아이들에게 전해 주고간 마지막 말임과 동시에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스크린 속의 아이들에게 겨우 던져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독한 무기력의 체험 이후는, 즉 엔딩크레딧 이후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아마도 두 갈래의 길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해하는 것. 그러나 홀로코스트에서 겨우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그 때의 경험을 이야기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정당화하는 것과 같'다고. 인간의 의도와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원학적으로도)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즉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이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거기에 줄리앙의 꿈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줄리앙은 오줌싸개이다. 번번이 꿈을 꾸다가 침대보를 더럽히곤 한다. 그가 보네에게 들려준 이유는 간단했다. 꿈 속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는데, 꿈에서 깨어나보면 현실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꿈과 현실의 연결. 꿈에서의 행동으로부터 이어지는 현실에의 결과. 이것을 관객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스크린과 현실의 연결. 스크린에서 벌어나는 일과 비슷한 일들이 관객 각자의 현실에서도 여러 다른 양상으로 일어난다. 그것을 이해하려들지 말고 스스로가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으로 옮길 것. 그것이 스크린 속의 소년들과 스크린 밖의 관객들을 무기력함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