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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ㅣ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사, 세계사, 음악사, 미술사, 문학사...대부분의 사람들이 ‘-사(史)’로 끝나는 책에 가지는 공통적인 선입견이 있다. 책에는 수없이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과 년도들이 나올 것이며, 그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과 년도들은 종국에는 우리를 매우 지치게 만들 것이라는 점. 하기는 이것은 그간 우리나라의 수많은 교육에서 행해온 방식이기도 하다. 역사 그 자체를 다루는 국사와 세계사 시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어라는 과목도 따지고 보면 결국 하나의 문학사를 배우는 과정이며, 물리나 수학 등도 그간 물리학자나 수학자들이 구축해 놓은 거대한 그 나름의 역사들을 배우는 과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무튼 간에 우리는 1492년과 1592년 중 어느 것이 임진왜란이고, 어느 것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인지 고등학교 이후로 내내 헷갈려하며, 여전히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서양미술사 I>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역시 마찬가지로 겁이 더럭 났다. 이 책에는 또 얼마나 많은 년도들과 작가들과 작품들이 출현하여 머리를 아프게 할 것인가.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단지 진중권의 ‘말빨’ 때문이었다. 그가 여러 지면이나 방송에서 보여주는 현란한 말솜씨를 또 여기서는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는 복잡하고 고루한 이야기들을 또 어떤 방법을 써서 가공하여 들려 줄 것인가. 그리고 그런 나의 기대는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이 책은 각 장을 시대 별로 분류하면서도 교묘하게 시대별 분류가 낳을 수 있는 지루함을 피해간다. 즉 언뜻 보면, 1장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미술을 다루고, 2장은 중세의 예술을 다루는 식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표면상의 시대구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각 장을 구별하는 것은 미술의 근원적인 요소이다. 즉 미술의 근본 요소인 ‘형태’를 1장에서 다루고, 또 다른 근본 요소인 ‘색채’를 2장에서 다루고, 다른 요소인 ‘공간에 대한 투시법’을 3장에서 5장까지 다루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서술이 시대 구분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진중권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미술의 각각 원리들의 발전이 곧 서양미술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형태를 구상하고 그것의 색을 생각하고, 그 형태를 공간에 배치하듯이, 서양 미술은 인체의 적절한 비례 묘사를 중시했던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미술에서부터, 초감각적 빛(색채)을 중시했던 중세의 예술, 그리고 자연과 공간의 재현을 중시했던 르네상스의 예술로 발전해나가는 식이었고, 결국 이 자체가 미술의 역사인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단순한 시대구분을 놓고 서술하는 방식을 벗어남으로써 역사 서술에서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지루함의 함정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각 장을 형태, 색채, 공간, 양식의 변화, 비평 등 하나의 소주제들로 통일성 있게 이끌어갈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동시에 위에서 말했듯이 ‘서양미술사’라는 큰 흐름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구성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를 의도적으로 각 장을 하나의 중요한 미술사의 문헌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1장에서는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논문을 토대로, 각 시대와 문화가 인체의 묘사에 각각 어떤 비례를 사용했는지를 고찰한다면, 2장에서는 로사리오 아순토의 저서를 토대로 미와 예술에 대한 중세인의 생각을 살펴본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은 12장으로 이루어진 서양미술사임과 동시에 12권의 논문(저서)을 효과적으로 재구성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공시성과 통시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하다 보면 이러한 구성이 갖는 단점이 생길 수 있다. 12개의 주제를 12권의 논문을 통해서 살펴보다 보니 책이 어려워지고 방대해지기가 쉬운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생각 외로 상당히 쉽다. 미술에 대한 문외한인 나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유명한지 처음 알았다;) 쉽게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다. 아마도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효과를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는 각각의 내용을 실제의 작품을 놓고 설명하듯이 서술하고 있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자 ○○○의 이 작품을 보자”는 식의 문장이 매우 많이 나온다. 용어나 설명이 어려워도 대부분 그림을 보다보면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 또 하나는 문장력이다. 진중권 씨의 인터뷰 기사 등을 자주 보는데, 그 때마다 내용 자체를 떠나서 비유를 써서 설명하는 능력이나, 주어와 서술어의 일치, 조리 있게 문장을 끊어서 말하는 능력 등에 감탄할 때가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화술’이 ‘문장력’으로 어느 정도 살아나는 느낌이다. (아무리 쉬운 내용도 문장이 엉망이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와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문장이 정확하고 깔끔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예전의 서양 철학 책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용 자체가 난해하기도 하려니와, 엄청나게 난삽한 번역 문장들이 한 몫을 했다면 내가 지나치게 말하는 것일까.)
361페이지로 이루어진 17000원의 책. 책의 가격을 단순히 페이지와 가격의 비례로 따질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비싸다. 그러나 비싼 만큼 값어치가 있고, 게다가 모든 그림은 올 컬러다.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ps. 다만 몇몇 오기나 이상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165페이지의 표에서 ‘해석의 교정원리’를 다루는 부분을 보면, I과 III이 모두 똑같이 ‘양식사’로 되어 있는데, 책의 내용상으로 보면 III에는 ‘상징사’가 들어가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330페이지의 그림 18은 내용상으로 보면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이 아니라 ‘앵그르’의 그림이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