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퇴근 루트를 바꿨다. 조금 더 먼 코스로. 이 코스는 예전에 가던 루트보다 더 돌아가기는 하지만, 그만큼 사람이 한적하여 뭔가를 하기에, 예를 들어 책을 읽기에 좋다. 지금까지 다니던 길은 사람들에게 이리 저리 밟히다가 순식간에 밀려나 낙오자의 설움을 맛보는 길로 여기서 책을 읽다보면, 내가 책을 읽는 것인지, 아니면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목표로 하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지만, 이제는 앉아서 올 수도 있고, 조금 더 집중하여 책을 읽을 수도 있다. 덕분에 20분 정도는 일찍 나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차피 무의미한 1시간 30분보다는 조금 더 의미있는 2시간이 낫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때는 늘 이어폰을 꽂는다. 요즘 이어팟이니 뭐니 분리형 블루투스 이어폰이 유행인데, 내가 귀에 꽂는 것은 휴대폰을 살 때 주는 구식 유선 이어폰이다. 한 때 음질이 좋다는 여러 이어폰을 번갈아 바꿔가며 써보기도 했고,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는 거액의 지출이 필요한 이어폰을 구매해서 써보기도 했지만, 사실 지금은 별로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지금의 음악듣기는 일종의 '책읽기의 보조적 수단'이고, 그 외에는 가끔 야구중계를 보기 위해 이어폰을 꽂는 것이 다니까. 아나운서의 신나는 '안타~!' 발음을 조금 더 잘 듣는다고 해도 주자가 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기대감이 더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유선 이어폰을 꽂고, 종이책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있으면 구식으로 보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뭐 별로,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책을 가방 속에서 꺼내들고 읽기 전에 먼저 정성을 다해서 음악을 선곡한다. 이어폰은 별로 안 중요할지 몰라도, 이거는 상당히 중요하다. 내가 책을 읽을 때 주로 듣기 좋아하는 음악들은 메탈 계열의 음악들이다. 헤비 메탈, 트래쉬 메탈, 멜로딕 데스 메탈, 하드 록, 블랙 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얼터너티브 록, 고딕 메탈, 펑크 락, 팝 메탈..뭐라고 불러도 사실 상관은 없고, 아무튼 되도록 우당탕탕 때려대는 시끄러운 음악들을 고른다. 일단 이런 음악들은 자연스러운 차폐의 효과가 있어(따라서 고가의 노이즈캔슬링 기능은 필요가 없다) 지하철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소음을 감소시킨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뭔가 멍~하게 만드는 느낌이 있다. 나는 이것을 눈과 귀를 분리시킨다, 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고 있으면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글자들이 귀 쪽으로 흘러나가지 않고 머리 속으로 곧장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일종의 하이패스 구간이랄까. 언젠가 책이 전혀 읽히지 않을 것 같은 매우 시끄러운 공간에서 책을 읽게 되어, 그 공간의 소음을 이겨내고자 엄청난 음량으로 헤비 메탈 음악을 들었더니 놀랍게도 책읽기에 상당히 효과가 있는 것을 경험한 이후로는 줄곧 이 방법을 쓰고 있다. 뭐 논문 같은 걸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오늘의 책읽기를 위한 선곡은 2014년에 발매된 X-Japan의 <X singles> 앨범이다. 이것만 봐도 내가 메탈이라고 이름만 붙으면 시끄러운 음악은 아무거나 듣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다. 사실 X-Japan은 나에게 일종의 길티 플레져 같은 음악인데, 그것은 아주 시답잖은 이유다. 지금은 (아마도) 사라져 버렸지만, 예전에는 뮤비(뮤직비디오) 감상실 같은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 중에 아주 센 메탈 계열의 음악을 주로 틀어주는 곳이 있었다. 커다란 화면만 보이는 어둠침침한 공간에서 커피(도 주문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무슨 메탈에 커피인가)나 맥주 같은 것을 시키고, 신청곡을 (무려 종이에 펜으로 적어서) 신청하면 주크박스에 계신 분이 틀어주는 구조였는데, 나는 종종 수업을 빼먹고 여기에 들러서 시간을 때우고는 했다. 아무튼 거기에 베놈이나 디무보거, 크래들 오브 필쓰 같은 게 나오다가 엑스재팬 같은 음악이 나오면 저걸 신청한 넘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넘쳐나는 아유소리가 대단했는데, 나는 그 야유소리를 듣는 게 너무 즐거워서 종종 그런 음악들을 신청하고는 했다. 하긴 X-Japan의 'Endless Rain' 라이브에서 소녀들이 떼창하는 소리를 거기에서 들으면 꽤 민망하기는 했지만.
그런 X-Japan과 함께 하는 오늘의 지하철 길동무는 니시카와 미와다. 지난 번 <고독한 직업>을 다 읽지마자, 새로 출간된 <료칸에서 바닷소리 들으며 시나리오를 씁니다>를 샀다. (근데 왜 구글에서는 료칸에서를 치니 '파도소리' 들으며 시나리오를 씁니다,로 자동완성되지? 파도소리보다는 바닷소리가 조금 더 느낌이 서정적인 것 같기는 하지만...) 읽기 전에는 그녀 특유의 글맛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이건 왠걸, 그녀의 개그감과 글을 조직해나가는 솜씨는 조금도 줄지 않은, 아니 도리어 더 늘어난 듯 하다. 책장이 줄어드는 게 아까워 최대한 느릿느릿 읽었다. 사실 말은 쉬운데, 글에 읽는 이의 흥미를 돋우는 적절한 포인트를 찍는 것은 정말 의도한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이게 마치 엄청 쉬운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해서 짜증났다), 중간중간 적절한 (개그)포인트가 글맛을 돋운다. 예전에 네이버에 계시던 모님(여기서의 '모'는 숨기기 위함이 아니고, 닉네임의 가장 앞 자가 '모'다)의 글이 그랬는데, 지금은 글을 다 지우고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리셨다. 돌아와요 모님.
니시카와 미와의 <고독한 직업>을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와 가와카미 미에코의 인터뷰집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를 읽고, 다시 니시카와 미와로 돌아와 <료칸에서 바닷소리 들으며 시나리오를 씁니다>를 읽고 있다. 어쩌다보니 최근의 반일 시국에 역행하는 책읽기를 하고 있으니 이거 문제가 심각하다(심지어는 엑스재팬까지 들었다). 그런데 이를 이쩌나.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를 읽으니 이 인터뷰집의 주된 내용이 <기사단장 죽이기>를 다룬 것이라, 상권만 읽고 버려둔 '긴 얼굴'이나 멘시키 씨를 다시 만나야 할 것 같다. 상권의 기억이 가물거리니 상권부터 다시 읽어야 하려나. 이로써 한동안 내 친일 독서 기조는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