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TV를 끄고 정말 오래간만에 책을 읽었다. 머리 속에 있는 '아무 생각 없음' 버튼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TV'라는 스위치를 끄고, '책'이라는 스위치를 찾아서 켜는 일은 정말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무거운 몸을 들기 싫어서 애써 발로 전등 스위치를 켜듯이 어찌어찌 해냈다.
그래서 겨우 집어든 것은 며칠 전에 사놓고 던져놓은 이상문학상 작품집이고, 잠들기 전까지 읽은 것은 겨우 대상 수상작인 윤이형의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한 편이지만, 어찌되었건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의 감상이 들었는데, 하나는 이 소설이 대상을 받을만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은 현재의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위로 섞인 작가의 대답이라는 것이다. 사실 '위로 섞인 대답'이라는 말은 조금 웃기는 말인데, 위로면 위로고, 대답이면 대답이지, 위로 섞인 대답일 것은 무엇인가. 그렇지만 나는 결국 작가란 아무도 요청하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을지라도 현재에 대해 무엇인가가 답을 내놓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는 현재의 젊은이들을 서로 날서게 만드는 하나의 문제, - 이른바 페미니즘 이슈 - 라고 통칭할 수 있는 어떤 문제에 대해 무엇인가 작가로서는 대답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답은 또다른 <82년생 김지영>이 아니라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사실 이 소설은 그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아니 어떻게 보면 상관이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우회하는 이 방식이야말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면으로 부딪혀서 말하기에는 이미 많은 것들이 부정확한 사실들과 왜곡된 주장으로 구부러져 있으며, - 구부러진 거울을 정면으로 보면 구부러진 얼굴만 보일 뿐이다 - 하다못해 이런 졸려서 쓰는 잡글을 쓰는 데에도 조심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작가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제는 그만 싸우고, - 그러니까 희은과 정민이 싸우다 지쳐 모종의 결단을 내린 것처럼 - 무엇인가 다른 방식을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아니, 나는 그들이 내린 선택이 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그 결과에 이른 어떤 과정, 그러니까 왜 그 사이에 첫 번째 고양이(의 죽음)와 두 번째 고양이(의 죽음)가 놓여져 있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록으로 끝나는 마지막은 너무 작위적이었기에 그렇게 훌륭했다고 보지는 않지만, 나는 왜 두 가지의 죽음 사이에 이들의 이야기가 놓여져 있나, 그들의 선택에 무엇이 작용했나를 생각했다.
나는 적어도 작가가 이들을 - 그러니까 현재의 남성 젊은이들, 그리고 여성 젊은이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남녀 주인공의 입장에서 비교적(비교적에 이런 구차한 설명을 달아야 한다는 것이 슬프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 무게는 차이가 나고, 여성 작가이니 무게 중심은 아무래도 희은에 더 쏠려 있다.) 번갈아 서술되어 있다는 사실도 그 하나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해하려고 애쓴다는 사실에 있다. 위로는 결국 최소한의 이해, 혹은 이해하려고 애씀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이제 젊다고 말할 수 있기에는 매우 애매해져 버렸지만, 그래도 그 애씀에서 모종의 작은 위로를 받았으니, 그래도 읽기 잘했다고 말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