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4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동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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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1918~2008)의 처녀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었다. 고등학교 땐가 형의 책장에 꽂혀 있던 [암병동] 이후 20년이 훌쩍 넘어 '현대의 도스토예프스키'라고 까지 일컬어지는 이 러시아의 대문호의 작품을 읽은 것은 순전히 유시민씨 때문이다. 유시민씨가 그의 저서 [청춘의 독서]에서 이 작품에 대해 광고 카피처럼 붙인 '슬픔도 힘이 될까.'라는 화두는 강력한 끌림이 되어 책장을 펼치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새벽 기상부터 늦은 오후 취침까지 한 인물의 하루를 이토록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기술한 그 어떤 기록도 보지 못했다. 있다손 치더라도 문학 작품으로서 접하기 쉽지 않은 방식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그 주인공이 일정 공간에 제한된 처지이고 일상이란 것이 그 곳에서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이 무한 반복되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그 이야기를 장편 소설로 쓸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누군가가 단지 타고난 상상력으로만 그 작업에 손을 댔다고 한다면 감정 과잉으로 억지 감동을 끌어내거나 공감할 수 없는 에피소드들을 뒤죽박죽 섞어 놓은 공상과학이 될 공산이 크리라.

 

그렇다. 작가 솔제니친의 강제 노동수용소 경험이 없었다면 독자들에게 슈호프(이반 데니소비치)도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1941년 독일 소련 전쟁 발발과 함께 자원 입대, 포병으로 복무하다가 1945년 2월 '스탈린에 대한 불온한 언사'를 한 죄를 뒤집어 쓰고 8년형을 받아 북극 및 중앙 아시아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징역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때의 처참한 기억이 수용소 문학의 토양이 되었으리라.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60여년전 공산주의 국가 구소련의 강제 노동수용소 일상을 마치 기록 필름을 보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놀랍게도 어떤 선동적인 주장도, 예리한 사상 논쟁도, 의도적으로 꾸며낸 신파적 갈등도 이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영하 3~40도를 오르내리는 극한의 추위, 옷이든 음식이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최소한만 허용된 정치범 수용소, 각자에게 주어진 형기가 종료되더라도 결코 바깥 세상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에서 희망은 허왕된 욕심이고 꿈은 갈 곳 잃은 나그네다. 중요한 것은 생존 그 자체, 현실 그 자체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토록 참혹한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존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보게, 여긴 법이라는 게 없단 말야. 있다면 이 밀림과 같은 거야. 그렇지만 이런 데서도 얼마든지 목숨을 부지해갈 수는 있어. 수용소에서 죽는 놈이 있다면, 그건 남의 죽그릇을 핥으려는 녀석들, 뻔질나게 의무실에 드나들며 편히 누워 있을 궁리만 하는 녀석들, 그리고 쓸데없이 간수장을 찾아다니는 녀석들, 바로 그런 친구들이지."

 

8년째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 슈호프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정치범이란 딱지는 당국에서 덧씌운 것일뿐 그는 정치적 그 무엇과도 관련되지 않았고 그의 관심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새벽 다섯시에 기상을 해서 점호를 마치고 거친 아침식사를 한 후 작업장으로 가서 주어진 작업을 한다. 먹을 때는 먹는 것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작업할 땐 최고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도록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능력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슈호프가 쌓은 별돌은 비뚤어지거나 기울어진 데가 한군데도 없을 뿐더러 연결점의 처리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결국 흠잡을 것이라고는 모르타르가 얇다는 것밖엔 없었던 것이다.  ~~~ 사실 군데군데 모르타르가 얇게 깔린 곳도 없지는 않았다. 좀더 두껍게 까는 게 원칙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첫째, 날씨가 이렇게 춥지 않을 때, 그리고 모든 격식을 맞춰 제대로 쌓아올릴 때에나 할 말이다.

 

슈호프는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강제 노동을 회피하기 위해 꾀병을 부리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리 허기지더라도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구걸하지 않는다. 잠깐의 안락을 위해 동료를 팔아넘기는 일도 절대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고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작은 것에서 최고치를 얻는 방법을 알고있다.

 

파블로는 곱빼기로 담은 국그릇 앞에, 슈호프는 두 개의 국그릇 앞에 각각 자리를 잡는다. 그 이상 두 사람 사이에는 한마디의 대화도 오가지 않는다. 엄숙한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슈호프는 모자를 벗어서 무릎 위에 얹는다. 한쪽 국그릇 속의 건더기를 숟가락으로 확인하고, 계속해서 또 하나의 국그릇도 확인한다. 웬만큼 들어 있다. 생선도 걸려든다. 대체로 저녁 국은 아침에 비해 훨씬 멀겋게 마련이다. 조반을 먹이지 않으면 죄수들을 부려먹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저녁을 먹이지 않았다고 해서 죄수들이 잠을 못 잘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는 먹기 시작했다. 우선 한쪽 국그릇의 국물만을 단숨에 들이켠다. 뜨끈한 국물이 목구멍을 지나 전신에 퍼지자, 오장육부가 국물을 반기며 요동을 친다. 살 것 같다! 바로 이순간을 위해서 죄수들은 살고 있는 것이다. ~~

두 개의 국그릇에서 뜨끈한 국물만을 마셔버리자, 그는 두 번째 국그릇의 건더기를 첫 번째 그릇으로 옮겼다. 옮겨 붓고나서, 그릇을 손으로 털고 다시 숟가락으로 긁어낸다. 이제야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인 셈이다. 두 번째 그릇이 마음에 걸려서 시종 곁눈으로 흘끔흘끔 바라볼 필요도 없고 한 손으로 국그릇을 감싸 않을 필요도 없다.

 

경건한 의식과도 같이 자기 몫으로 배당된 음식을 먹으면서 슈호프가 느끼는 만족감,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할 것이다. 문득 생각한다. 슈호프가 그렇게 소중하게 받은 음식보다 양이나 질적으로 훨씬 풍성한 음식을 매일 먹고 있으면서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들. 먹는 것에 행복감을 찾기에는 이미 너무 풍족한 우리들은 대체 무엇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을 지 말이다.

 

슈호프는 더없이 만족한 기분으로 잠을 청했다. 오늘 하루 동안 그에게는 좋은 일만 많이 있었다. 재수가 썩 좋은 하루였다. 영창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사회주의 단지'로 추방되지도 않았다. 점심때는 죽그릇 수를 속여 두 그릇이나 얻어먹었다. 작업량 사정도 반장이 적당히 해결한 모양이다. 오후에는 신바람나게 벽돌을 쌓아올렸다 줄칼 토막도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기다려주고 많은 벌이를 했다. 담배도 사왔다. 병에 걸린 줄만 알았던 몸도 거뜬하게 풀렸다. 이렇게 하루가, 우울하고 불쾌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가 지나갔다. 이런 날들이 그의 형기가 시작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만 10년이나, 3653일이나 계속되었다. 사흘이 더해진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끼었기 때문이다.  238~239 p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잠자리에 든 슈호프 더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끼며 잠을 청하고 있다. 역설의 예술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주인공이 말하는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가 읽는 독자에게는 왜 이다지도 슬픈가 말이다. 그것도 만 10년, 3653일이나 되풀이되는 일상이라니. 생각의 자유는 물론 행동의 자유도 없고 가족과는 연락조차 어려우며 기본적인 의식주 조차 보장되지 않는 공간, 감시와 통제 억압만이 있는 곳, 인권을 운운하기에도 미안한 현실, 의미를 잃은 형기 앞에서 희망 마져도 없을 수형자가 느낀 '행복'은, 정말 혼란스럽다. 정말 행복한 것이었던 걸까? 기준 설정점이 어디인가에 따라 달라질 문제겠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 소련 체제의 비인간성이 솔제니친이라는 위대한 작가와 이반 데니소비치라는 고결한 인물에 의해 서방세계에 무엇보다도 절절하게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P.S. 작가는 결국 조국에서 추방당하기 까지 했다니 그의 펜이 무섭긴 무서웠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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