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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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교 땐 공부 좀 하고, 책 좀 본다는 애들은 헤르만 헤세 작품들을 기본으로 읽었던 것 같다. 나도 어쭙잖이 흉내를 내 본다고, 나름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은 다 찾아 읽었는데, 그 때 읽지 못햇던 것이 바로 <싯다르타> 였다. 난 제목이 <싯다르타>여서, 부처님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막상 읽고 보니 부처의 이야기는 아니더라고. 물론 부처가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그 때 읽고 지금 다시 읽었더라도 물론 좋았겠지만, 과연 그 때 내가 이 작품을 읽었다면 지금처럼 재밌게 읽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간만에 한 줄 한 줄 아껴가며, 한 줄 한 줄 천천히 곱씹어 가며 읽은 책 이었다. 

 

도대체 소설가의 역량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한 명의 소설가를 넘어, 철학자의 풍모마저 풍기는 헤르만 헤세라는 사람에게 경이로움을 느낀다. 삶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과 맞아 떨어지는 기막힌 타이밍 덕분인지는 몰라도 어렵게 느껴졌던 불교 사상이나, 시크릿 류의 책에서 언급되는 개념들  뿐 아니라, 더 나아간 심오한 사상들이 싯다르타의 영적 성장 과정을 통해 - 물론 너무 도식적인 느낌이 살짝 있긴 했지만-  쉽게 와 닿았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한 권의 철학 책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이 책을 십 년 후나 이십 년 후에 다시 읽게 된다면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문득 궁금하다. 시시하게 느껴질까? 아님 더 깊은 여운을 얻게 될까? 헤르만 헤세의 <강물의 노래를 들어라>..

 

*책 접기

 

'자기를 초탈하는 사색을 하는 가운데 경이로움에 마음을 열어 놓는 것'

 

'오 친구,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앎뿐이며, 그것은 도처에 있고, 그것은 아트만이고, 그것은 나의 내면과 자네의 내면, 그리고 모든 존재의 내면에 있는 것이지. 그래서 난 이렇게 믿기 시작하였네. 알려고 하는 의지와 배움보다 더 사악한 앎의 적은 없다고 말이야.'

 

'감각과 사유...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경시되거나 과대평가 되어서는 안되었으며, 그 두 가지로부터 가장 내밀한 것의 비밀스러운 소리들을 들어야 할 것이었다. 그는, 그 소리가 얻으려고 노력해 보라고 명령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리라고, 그 소리가 멈추어 있으라고 권하는 장소 이외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멈추어 있지 않으리라고 마음 먹었다.... 이처럼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오로지 그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처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만반의 태세를 갖추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었으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제가 만약 카마스와미였다면, 쌀 구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안 즉시 잔뜩 화가 치밀어서 황급히 되돌아와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말로 시간과 돈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자초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좋은 나날을 보냈으며, 배움을 얻었으며, 기쁨을 누렸으며, 분노나 성급함 때문에 제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히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언젠가 추후에 나올 수확물을 사기 위해서, 또는 그 밖의 다른 목적으로 그 곳에 다시 갈 일이 있으면, 그 곳의 친절한 사람들이 저를 다정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맞아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그 당시에 성급하고 불쾌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데 대한 보답을 받는 셈입니다.'

 

'자기가 지금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토록 확신에 넘쳐서, 이토록 두려움 없이, 이토록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아의 죽음 때문이 아닐까?.......... 너무 많은 성스러운 구절이, 너무 많은 제사의 규칙들이, 너무 많은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하였던 것이다....이런 사제 기질속으로, 이런 교만한 마음속으로, 이런 정신적 성향 속으로 자기의 자아가 살며시 파고 들어와서는 거기에서 단단히 자리를 잡고 앉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동안, 자기는 단식과 참회로써 그 자아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순간마다 새롭다.'

 

'아주 몇 안되는 너더댓 명의 사람에게만은, 이 강이 장애물 노릇 하는 것을 그만두었던 셈인데, 그 까닭은 그들이 이 강의 소리를 들었으며, 그들이 이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예요.... 고요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영혼, 활짝 열린 영혼으로, 격정도, 소원도, 판단도, 견해도 없이 귀 기울여 듣는 것을 배웠다.'

 

'그러니까 일체의 소리들, 일체의 목적들,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번뇌, 일체의 쾌락, 일체의 선과 악,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합해져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합해져서 사건의 강을 이루고 있었으며, 생명의 음악을 이루고 있었다....그가 고통의 소리에도 웃음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어떤 특정한 소리에 묶어두거나 자신의 자아와 더불어 그 어떤 특정한 소리에 몰입하지 않고 모든 소리들을 듣고, 전체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 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개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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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2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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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의 단편 <진품>을 인상깊게 읽었기에, 꽤 기대하면서 읽은 작품 이었건만, 기대가 너무 컸었나. 한 마디로 실망스러운 작품이다.

 

아이들이 본 것이 실제 유령이었다 해도 아이들과 유령과의 은밀한 관계에 도무지 감정 이입될 수 없었고 - 도대체 무엇을 위한 그들만의 만남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전 가정교사와 하인의 관계와 그들의 죽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 더구나 순진함을 가장한 아이들의 깜찍한 연기도 그렇게 공포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들이 미친 가정교사의 망상이라 한다해도, 단지 가난한 목사 집안의 막내딸이잘 생긴 남자 주인의 선택을 받아, 호화스런 시골 저택에서 너무나 사랑스런 아이들을 돌보는 중에 도대체 어떤 심리적 기제에 의해 이런 망상을 일으키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중간 쯤 읽으면서, 이 모든 것이 미친 여자의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에, 마지막 반전이 주는 충격과 공포도 내겐 없었다.

 

제일 짜증났던 것은, 몰입을 방해하는 매끄럽지 못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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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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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팍 도사> 초기에 게스트 고민이었나 아님 고민에 대한 해결책이었나 암튼, 신선하다 아니다를 물어 아니다면 막걸리통으로 머리를 맞는 부분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이 소설에 대한 내 느낌을 묻는다면 내 대답은 "존나 신선하다"이다. 좀 더 길게 말하라면, 트랜스 짬뽕적이게 신선하고, 열라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지지만, 확실한 답을 쥐어주지는 않는, 한 마디로 독자를 제 맘대로 갖고 노는, 똑똑하고 도도한 작품이랄까.

 

알고 보니 결국, 제목이 답인 소설이었더만. 난 나중에 모렐의 대사가 나올 때까지, 알쏭 달쏭한 사건 전개와, 화자의 오락 가락하는 진술들 속에서, 수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며, '나'와 그 섬의 침입자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려야 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화자의 말대로 정신병자? 아님 이상한 약초를 먹고 환각을 일으키는 중? 결국 나의 정체는 <식스센스>의 브루스 윌리스같은 귀신이다라고 결론을 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들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그가 본 모든 것들이 모렐의 발명품이 만들어낸 환영이었다는 것이 밝혀 지면서, 나는 잠시 멍했다. '뭐지 졸라 신선하고 묘한 이 느낌은?' 예상을 깨고, 과학 발명품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었다니. 미스터리에서 시작하여 SF로 넘어가더니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끝이 나더란 말이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작가의 이 놀라운 상상력과 재주.

 

모든 감각이 동시에 작용하면 영혼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 인간의 모든 감각을 재현할 수 있다면, 결국 영혼까지 재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작가는 결국 인간의 본질을 감각의 총합으로 파악하고 있는 걸까? 기계로 재현된 이미지가 인간의 영혼까지 포함 하여, 실제의 나와 재현된 나를 그 누구도 구별할 수 없다면, 나는 과연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이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비현실이며 그 경계는 어디 일까?  인공적인 환영인 포스틴을 사랑하는 나,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진짜 사랑일까? 그 마저도 환영일까? 기계가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면, 기계를 만든 인간이 다시 기계의 피조물이 되는 아이러니가 아닌가? 예술가를 포함해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과학자의 윤리 의식도 묻고 있는 것 같다. 모렐은 그의 동료들의 동의 없이 그들의 일주일을 담았고, 발명 초기 단계에서의 사람들의 이유 없는 죽음도 어쩌면 그의 실험과 관련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창조의 위험, 즉 상이한 의식들을 동시에 균형있게 다루는 것의 위험성과 함께 잔인하기 그지없는 영원한 회귀 - 끊임없는 반복-에 대한 물음들. 불멸, 정확하게 말해 불멸의 사랑을 향한 인간의 욕망들. 인생의 찰나적인 순간의 포착과 반복 재생으로, 우리 삶의 순간 순간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리고 이 생의 삶이 다음 생에 다시 똑 같이 반복된다는 윤회 사상까지.

 

나는 과연 누구였을까? 모렐과 포스틴과 그의 동료들은 언제 그 섬을 방문했을까? 모렐이 정말 모든 사람들을 죽였을까? 그들은 정말 죽었을까? 모든 것이 모호해서, 백가지 독자의 백가지 해석이 가능한 참 신기한 소설이다. 

 

* 책 접기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 관객에게는 끔찍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매우 마음에 드는 일이다. 나쁜 소식과 전염병에서 벗어나 그들은 마치 모든 일이 처음 일어나는 것처럼 영원히 살아간다. 그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게다가 조수의 주기적 순환으로 상영이 정기적으로 중단되기 때문에 반복이란 그리 무자비한 것도 아니다. 이제 반복되는 삶을 보는 데 익숙해진 나는 내 삶도 돌이킬 수 없는 우연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내 상황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부질없는 생각이다. 나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으며, 매 순간 그 자체가 유일한 것이고 서로 다른 것이다. 그리고 게으름 때문에 나는 수많은 순간을 잃어버리고 있다. 물론 영상들에게도 다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 순간은 영원한 그 주가 기록되었을 때의 양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그 영상들의 한 주와 같으며 다음 세상에서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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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 - 미국 흑인 시민권 운동의 어머니
로자 파크스.짐 해스킨스 지음, 최성애 엮음 / 문예춘추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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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전기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자서전도 마찬가지. 그나마 평전류는 지은이의 관점이 상당히 반영되긴 하지만, 사료와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쓰여지기에, 어느 정도의 객관성은 확보 되었으리라 믿고 보지만, 자서전은 백퍼 주관적일 수 밖에 없으니 왠지 찝찝한 느낌이랄까. 하긴 자기 이야기를 자기 자신만큼 잘 알고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있겠냐만은, 또 그만큼 의도하지 않은 기억의 왜곡이란 함정에 빠지기도 쉽기 때문이다. 암튼, 지인의 선물로 읽게 된 로자 파크스의 자서전.

 

로자 파크스. 다른 책에서 몇 번 봤던 낯익은 이름이긴 했다.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기사의 요청을 거부한 흑인 여자 정도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고마운 지인 덕분에 그녀의 삶을 조금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분리주의 법의 위헌 판결을 이끌어 내고, 흑인 인권 운동의 도화선이 된 엄청난 사건의 주인공 답지 않게, 시종일관 담담한 톤으로 이야기 하는 그녀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달까. 

 

난 그냥 막연히 1955년 그 날, 그 버스 안에서의, 한 평범한 흑인 여인의 자리 양보 거부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을거라 짐작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흑인 여인은 그냥 평범한 흑인 여인도 아니었고, 본인은 소송을 염두에 둔 계획된 거부가 아니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긴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건 그것은 우발적 결정 이상의 오랜동안의 준비가 현실화된 사건 이었다. 

 

흑인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할아버지와, 어떻게 해서든 딸을 교육시키려 했던 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당시의 흑인 여성답지 않게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엘리트였고, 또한 흑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조직에서 이미 활동 중이던 남편과 함께, 그 자신 조직에서 간사 활동을 하고 있던, 소위 깨인 환경 속의 배우고 행동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물론 로자 파크스 자신은, 버스에서의 그 한 순간의 결정이, 흑인들의 계속된 양보와 부당한 대우에 지치고 신물이 났기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 양보 거부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소송 결정이라는 그녀의 선택이 앞으로 그녀의 인생에 불러올 엄청난 결과, 즉 직장을 잃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다른 주로 피해갈 정도까지의 선택임을 알고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던 힘은, 그녀의 전 생애를 통해,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인가에 대한 교육과 가족들의 지지, 그녀 스스로의 배움과 노력, 활동을 통한 깨어남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여기서 느끼는 것 한 가지. 역시 교육의 힘은 대단하구나.

 

그리고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것은,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흑백 분리법이 위헌 판결을 받은 결정적 이유가 일년여에 걸친 버스 보이콧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버스 보이콧 운동의 성공 요인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의 조직력을 이용한 홍보와 지원등도 인상적이었지만, 인간의 인권을 결정하는 문제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결국 자본의 논리, '돈'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몽고메리 버스 회사의 주 고객이 흑인들이 아니었고, 그들의 보이콧 운동이 버스 회사들의 경영에 결정적 타격을 입히지 않았다면 과연 백인들이 낑꼬나 했을까? 돈의 힘이 정의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렇다, 나는 지쳐있었다. 백인에게 끝없이 양보하고 굴복하는 것에 철저히 신물이 나 있었다. 운전기사는 내가 아직도 좌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더니 일어설 것인지 아닌지를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일어서지 않을 겁니다" 그가 말했다, "당장 경찰을 부를테요," 내가 답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 이 부분을 읽을 때 필경사 바틀비가 떠올랐다. 마치 한 소설의 다른 부분을 읽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래 바틀비도 그랬을 것 같다. 부당하게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 작게는 보스, 회사 조직, 나아가 사회 체제까지, 자신을 버리게끔 강요당하고, 끝없이 양보하고 굴복하는 것에 철저히 신물이 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고 싶지 않다'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야기 했던 것일게다.

 

지금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시하게 받아 들여지는 세상의 시스템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수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어왔다. 우리는 그들을 숨겨진 영웅들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영웅들은 한 순간에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 준 책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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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질 다이어트 - 죽어도 굶거나 운동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에베 코지 지음, 노경아 옮김 / 아름다운사람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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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 돈주고 사서 읽을 필요는 없는 책. 한 마디로 탄수화물 섭취를 제한해서 살을 빼자인데, 문제는 언젠가는 내 몸 속의 탄수화물 귀신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고 면달라, 빵달라를 외친다는 것. 고로 오늘도 라면에 과자 폭풍흡입. 다이어트도 결국은 균형의 문제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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