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언어의 상징.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한꺼번에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순서대로 햄릿-오셀로-리어 왕-맥베스를 읽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역시 <햄릿>, <오셀로>이다. 번역본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미 가지고 있던 민음사 시리즈로 계속 갈 것인지, 혹은 펭귄시리즈로 새로 구입할 것인지. (왜냐하면 처음에는 민음사의 <햄릿>만 가지고 있었으므로) 혹시 나처럼 고민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 간단하게 적어보자면,
(민음사 <햄릿> 제3막 제1장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펭귄시리즈 <햄릿> 제3막 제1장
사느냐, 죽느냐-그것이 문제구나. 가증스러운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그냥 참는 것이 고귀한 행동일까, 아니면 밀물처럼 밀려드는 역경에 맞서 싸워 이기는 게 더 고귀한 행동일까.)
민음사의 <햄릿>은 원전을 그대로 충실하게 따른다는 의의가 있지만, 부드럽게 읽어넘기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개인의 취향이 있을 수 있겠으나, 어쨌거나 펭귄시리즈로 셰익스피어를 재미있게 읽었다. 극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두려움이나 지루함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놀랍게도!
셰익스피어를 읽고 역시, 셰익스피어다 이런 말은 하지 않겠지만. 전반적인 줄거리보다도 오히려, 시적인 요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시적인 구절. 인생에 있어서 시구, 한 마디만 남겨도 그건 성공한 것이 아닌가.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줄거리로만 본다면 요즘의 막장 드라마나 이런 것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으므로.
<햄릿>
사느냐 죽느냐, 그 기로에서. 아버지를 위한 복수를 망설이는 자신을 자책하는 순간들. 그의 복수는 오필리어를 지켜주지 못했다.
<오셀로>
데스데모나를 향한 오셀로의 사랑, 그러나 그 틈을 노리는 악마는 바로 질투, 질투는 스스로 잉태되는 괴물이다.
<리어 왕>
딸 코딜리어의 사랑을 믿지 못한 아버지 리어 왕. 아버지-자녀와의 관계는 어딜가나 문제.
<맥베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최후의 주인공은 없다. 모두 바보 천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