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떳떳하지 못하게 로그인도 안하고 댓글달고 휑 가버리면 정작 상처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나요?

휴. 아침부터 이상한 댓글 달아놓고 가버리면 어쩌라는건지?

익명성이 정말 무서운 거군요.

그나저나 그분은 제가 작성해놓은 페이퍼의 맥락, 책을 제대로 읽으시긴 한건지 의문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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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6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방랑 2016-07-26 11:18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cyrus 2016-07-26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로그인 댓글 서비스가 사라져도 무례하고, 몰상식한 사람들이 댓글을 남길 겁니다. 왜냐하면 알라딘 가입 절차에 실명인증이 없고, 이메일 주소가 많으면 두 개 이상의 계정을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이중 계정으로 상대방을 비하하는 댓글을 남길 수도 있어요.
 

여성의 적, 은 남성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많이 다르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인종’이야기의 비중이 꽤 높아지고, 미국에서 유명한 드라마와 영화, 예능의 예시가 많이 나오는데 그런 분야는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진정한 ‘페미니스트’란 무엇인가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
여성 ‘혐오’를 이야기할 때는 늘 조심스럽다. ‘혐오’라는 단어 때문에 약간 어리둥절하게 된다. ‘혐오’라는 것은 무언가를 극도로 싫어하거나 피하는 것 혹은 끔찍하다고 여기는 것, 즉 단어가 갖고 있는 이미지에서 나오는 ‘증오’의 감정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 혐오는 여성에 대한 멸시, 반여성적인 편견, 성 차별, 여성에 대한 부정과 비하, 여성에 대한 폭력, 남성우월주의 사상,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포함한 넓은 개념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나 비하, 부정, 폭력은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다. 그러나 과연 정말 여성과 남성이 100%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에는 복잡한 사회적인 배경이 여러 가지로 얽혀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 혹은 남성 한쪽의 일방적인 책임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사회 혹은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자.)



이 책에 나오는 ‘나쁜 페미니스트’ (Bad feminist)가 되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또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하거나, 반대로 이를 적극적으로 거부할 필요도 없다. 결국은 자신의 선택의 문제이므로.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사람도, 여성이 남성보다 뒤쳐진다거나 여성은 항상 무언가를 해주어야 한다거나 남성의 보조적인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같은 직종에서 같은 위치에서 같은 시간 동안 일할 때, 어떤 사람이든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은 육아의 문제에서 남성에 비해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는 국가 시스템, 예를 들어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복지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 모든 남성을 적으로 만들어서는 이런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 적대시해야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사라질까? 물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무리의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성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듣기 싫은 저질스러운 농담을 마치 유머처럼 포장해서 하는 사람들. 그러나 이들은 남성(물론 여성일수도 있다)이기 이전에 잘못된 성을 학습한 ‘가해자’이다.


-듣기가 거북하네요. 그것은 성폭력이에요.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저는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이런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막상 본인이 ‘피해자’가 되는 순간이 된다면.



여성에 대해서, 그리고 남성에 대해서 우리는 더 많이 알아야 하고 더 많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쪽 극단적인 주의가 아니다.



지금보다 행복하고, 안전한 사회를 위해서.



여성의 적은 남성이 아니다. 남성과 싸우기만 해서는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여성이 적은 여성을 남성과 평등하지 못한 존재로 만드는 사회적인 분위기, 사회적 시스템, 복지 정책, 우리 마음속의 편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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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그리고 남자도. 우리는 좀 더 행복한 사회에 살아야 합니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여자든 남자든,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대해서 거북함을 느끼고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들. 물론 나도 그중에 한명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페미니스트는 남자처럼 행동하고, 여성스러움이 전혀 없으며, 전투적인 이미지였기 때문에. 그런 의미의 페미니스트는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페미니스트’는 되고 싶다.



페미니스트 :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오늘날의 젠더에는 어떤 문제가 있어, 바로 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해야 해, 더 행복한 여자와 남자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해야 해. 이렇게 믿는 사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페미니스트와 관련하여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문제는
-그렇다면 여자를 남자보다 더 존중해주고, 우대해주어야 한다는 것인가?
-여자의 적이 남자라고 생각한 상태에서, 싸우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



아직도 이 문제는 명확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내 선에서는 여자의 적이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자도 결국은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가장으로 짐을 짊어지고, 어떻게 자라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강요받았기 때문에. 여자의 적을 남자라고 돌리는 순간,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멈춘다면 나는 ‘여자마초’가 될 것이다. 남자도 피해자니까 여자가 이해해주자, 로 끝나서는 안 되고 여자가 피해자니까 여자를 더 우대해주자, 로 끝나서도 안 된다.



여자와 남자가 더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사회가 무엇이 문제인지 ‘문제인식’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현재 살고 있는 아이들은 과연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가? 아직도 ‘여자니까’ 오빠의 저녁을 챙겨주거나, ‘여자니까’ 제사에 참여할 수 없고 밥은 남자와 따로 먹어야 한다거나, ‘여자니까’ 옷차림에 신경 써야 한다.


현재 살고 있는 어른들은 과연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가? 아직도 ‘여자니까’ 집안일을 해야 하고 (맞벌이인데도 불구하고, 심지어 여자가 더 많이 버는 경우에도) ‘여자니까’ 승진에서 밀려나거나, ‘여자니까’ 결혼 시기를 놓치면 큰일이 난다. 특히 집안일인 경우에는, 남자가 집안일을 하면 “내가 도와줄게”는 성립하지만, 여자가 집안일을 하면 “내가 도와줄게”가 성립하지 않는다. 여자의 일이 당연하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한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난 남자. 집안일을 모두 도맡아하고, 언제나 조용히 참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난 여자.



좀 더 많은 남자가 이 책을 읽고, 좀 더 많은 여자가 이 책을 읽어서 문제를 인식하고, 더 행복한 사회가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보다 좀 더 공정한 세상을, 스스로에게 좀 더 진실함으로써 좀 더 행복해진 남자들과 좀더 행복해진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말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돈이 더 있는 사람이 내는 거야"라는 태도를 취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지금까지 누려온 이점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실제로 돈이 더 많은 사람은 대체로 남자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부터 아이들을 다르게 키운다면, 앞으로 오십년 혹은 백년 뒤에는 남자아이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물질적 수단으로 증명해보여야 한다는 압박을 더는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정책과 법률의 변화 덕분입니다. 그런 변화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태도의 변화, 우리 사고방식의 변화입니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은 남편과 똑같은 학위를 받았고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집안일을 거의 도맡는데, 이건 대부분의 부부들이 그렇죠. 내가 그보다도 놀란 점은 남편이 아기 기저귀를 갈 때마다 아내가 "고마워요"라고 말한다는 거였습니다.


페미니스트 :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나는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맞아,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해야 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


"너는 여자니까"하는 말은 무엇에 대해서든 유효한 이유가 아니라고 거부하겠다고. 나의 가장 진실되고 가장 인간적인 자아로 살고자 애쓰겠다고, 하지만 세상의 인정을 구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억지로 변형시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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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나의 삶을 결정지을 수 없다.


1
검색을 한다. 인터넷 창을 켜놓고 스마트폰으로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검색한다. 유명한 곳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유명한 물건은 한 번쯤은 사서 써 보고 싶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최저시급 6천원을 받는다고 가정한다면, 4만원짜리 틴트 하나를 사기 위해서는 적어도 7시간이나 8시간 정도를 일해야 한다. 그런데 어디 화장품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틴트 하나가지고 되나? 그럼에도 산다. 틴트 하나 정도는 뭐 어때. 이런 소소한 사치는 낭비라고 하기에는 좀 오버스럽지 않을까 하면서.

이렇게 물건을 사는 것이, 내 안에 들어온 물건이 곧 내가 된다. 소비하는 순간, 그리고 그 물건이 내 소유가 되는 순간 비로소 살아있다고 느낀다.





2
이러한 소유는 물건이 아니라 모든 일상에 녹아 있다. 여가시간에, 그러니까 휴일에, 또는 휴가에 우리는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근사한 곳에서 식사를 하거나 혹은 스포츠를 즐긴다거나, 연극이나 영화, 뮤지컬이나 콘서트. 취미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내보이기 위해서인 경우.

생각해보면 정말 지치고 바쁠 때일수록, 나 자신을 잃어버릴 때일수록 상실에서 오는 텅 빈 허전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소유의 생활방식이 심지어 종교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는 이들,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은 ‘선택’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종교는 소유하는 물건과도 같은 것이다.




3
소유냐 존재냐. 소비하지 않는 인간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소비를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소비하는 것이 또한 소유하는 것이 나 자신을 결정할 수는 없다. 소비가 계층을 구별해주는 것이라고 해도, 이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

내가 산 물건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으며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나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나의 삶을 결정지을 수 없다.

1-1
요약하면,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다. 아마도 현대 "잉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소유형태일 것이다. 소비는 이중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써버린 것은 빼앗길 염려가 없으므로 일단 불안을 감소시켜준다. 그런 한편, 점점 더 많은 소비를 조장한다. 왜냐하면 일단 써버린 것은 곧 충족감을 주기를 중단해버리기 때문이다. 현대 소비자는 나=내가 가진 것=내가 소비하는 것이라는 등식에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는지도 모른다. (p50)

소유적 실존양식에서는 나와 나의 소유물 사이에 살아 있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소유물은 물론 나도 사물이 되며, 내게 그것을 소유할 가능성이 주어졌기 때문에 지금 나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관계도 있을 수 있어서, 그것이 나를 소유하기도 한다. (p116)



2-1
존재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깊이 아는 것인 반면, 소유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많이 아는 것이다. (p68)

일단 신이 우상화되어버리면, 흔히 말하는 신의 특성들은 소외된 정치적 강령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경험과는 무관하게 된다. 우상은 자비의 신으로 칭송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에 못지않게 신의 이름으로 온갖 잔학한 행위를 저지를 수도 있다. 인간적 연대감이라는 명분을 내건 소외된 믿음이 극도로 비인간적인 행위를 의심 없이 자행했던 수많은 예에서 보듯이 말이다. 소유양식으로서의 신앙은 스스로의 모색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확신을 원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절름발이 인간들을 위한 목발이 된다. (p70)

안식일에만은 모두가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듯, 존재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 듯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자신의 본질적인 힘을 쓰기 위해서 사는 것 - 오로지 기도하고 연구하며,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사랑하는 것이다.
(p82)



3-1
중요한 것은 지나친 사치와 빈곤을 근절시키는 일이다. 물질적 자산을 마지막 한 조각까지 양적(量的)으로 똑같이 분배했다고 해서 그것이 평등을 의미할 수는 없다. 평등이란 사회계층이 다르다고 해서 판이한 생활경험을 가져올 정도로 극도로 극심한 소득차이를 없애는 것이다. (p126)


새로운 인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세계를 지배하며, 그래서 결국 자기 소유물의 노예가 되는, 그런 소유에의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믿음과 관계에의 욕구, 관심, 사랑, 주변세계와의 연대감을 바탕으로 한 안정감, 자아 체험, 자신감.
-나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어떤 사물도 나의 삶에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p244)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패배하고 좌절한, 가엾은 인간에 불과하며 그릇된 생활방식의 산 증거물에 불과할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잃을 수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응당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언제이고 잃을 세라 줄곧 조바심 내기 마련이다. (p160)

존재적 실존양식은 우리가 소유적 실존양식 내지는 비존재적 실존양식을 제거하는 데에 비례해서(다시 말하면, 우리가 소유에 매달림으로써 그것에 "안주하고" 자아와 가진 것에 집착함으로써 안정을 추구하고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감소시키는 정도에 따라서) 관철될 수 있다.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중심주의와 아집을 버려야 하며, 신비주의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텅 비워야" 한다. (p131)

존재적 실존양식에서 나의 안정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나 자신의 내부에 있다. 삶에 대한 믿음과 나의 생산적 힘에 대한 신념의 결여에, 퇴보적 성향에, 내면적 게으름에, 나의 삶에 대한 결정을 타인에게 떠맡기려는 것에 등. 그러나 이러한 위험들은 존재에 반드시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상실의 위험은 소유에 항상 내재한다.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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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 주홍색 연구 펭귄클래식 58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에드 글리네르트 주해, 이언 싱클레어 작품해설, 남명성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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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커가 221B. 주소만으로도 우리를 설레게 하는 이름, 셜록.



내가 알고 있는 셜록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왓슨은 마틴 프리먼이다. 현대적으로 해석한 영국의 드라마 셜록. 추리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나는 항상 결말을 먼저 확인한다. 그래야 안도감을 느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읽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소설 셜록은 단순한 추리 소설, 그 이상이다.



<분홍색 연구>에서는 셜록과 왓슨의 첫 만남이 나온다. 왓슨을 관찰하고 그가 어디에서 왔고 어떤 일을 했으며 현재 어떤 상태인지를 이야기하는 셜록. 드라마 <셜록>의 1화에서도 이 장면이 연구실에서 나온다. 현대적으로, 그리고 원작에 충실해서. 원작 소설에서 셜록은 거만하지는 않지만 왓슨의 칭찬을 좋아하는 아이같은 모습은 베네딕트의 모습과 겹쳐진다.



추론의 과학, 이라는 이름으로 셜록이 관찰하는 모습은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주변에 무관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서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이 불룩하게 나와 있고 검지와 엄지에서는 물어뜯은 흔적이 있으며 왼쪽 네 번째 손톱은 유난히 길다는 점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바스커빌 가문의 개>는 셜록과 왓슨의 조합이 환상적이다. 왓슨을 먼저 보내 조사를 시키고 그 뒤를 따르는 셜록. 셜록에게 보내는 왓슨의 보고서, 편지. 왓슨은 조수가 아니다. 왓슨은 셜록을 유일하게 이해하고 인정하는 친구인 것이다. ‘친구’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영혼의 동반자라는 표현은 조금 간지러우니까.



베이커가 221B. 주소만으로도 우리를 설레게 하는 이름, 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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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0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홍색 연구> 후반부에 범인이 과거를 술회하는 장면이 지겨웠습니다. 홈즈 시리즈 장편 중 최고 작품으로 저는 <바스커빌 가의 개>를 꼽고 싶어요. 으스스한 설정에, 왓슨이 혼자서 사건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야기 전개가 흥미로웠습니다. 이제 거의 결말이 나오기 직전에 홈즈가 깜짝 등장하는 장면이 소설의 백미입니다. ^^

방랑 2016-07-06 14:20   좋아요 0 | URL
저도 <바스커빌 가문의 개>가 더 좋았어요. 셜록과 왓슨이 다시 재회하는 부분이 좋았고, 왓슨이 셜록에게 보내는 편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