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나의 삶을 결정지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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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을 한다. 인터넷 창을 켜놓고 스마트폰으로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검색한다. 유명한 곳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유명한 물건은 한 번쯤은 사서 써 보고 싶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최저시급 6천원을 받는다고 가정한다면, 4만원짜리 틴트 하나를 사기 위해서는 적어도 7시간이나 8시간 정도를 일해야 한다. 그런데 어디 화장품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틴트 하나가지고 되나? 그럼에도 산다. 틴트 하나 정도는 뭐 어때. 이런 소소한 사치는 낭비라고 하기에는 좀 오버스럽지 않을까 하면서.

이렇게 물건을 사는 것이, 내 안에 들어온 물건이 곧 내가 된다. 소비하는 순간, 그리고 그 물건이 내 소유가 되는 순간 비로소 살아있다고 느낀다.





2
이러한 소유는 물건이 아니라 모든 일상에 녹아 있다. 여가시간에, 그러니까 휴일에, 또는 휴가에 우리는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근사한 곳에서 식사를 하거나 혹은 스포츠를 즐긴다거나, 연극이나 영화, 뮤지컬이나 콘서트. 취미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내보이기 위해서인 경우.

생각해보면 정말 지치고 바쁠 때일수록, 나 자신을 잃어버릴 때일수록 상실에서 오는 텅 빈 허전함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소유의 생활방식이 심지어 종교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는 이들,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은 ‘선택’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종교는 소유하는 물건과도 같은 것이다.




3
소유냐 존재냐. 소비하지 않는 인간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소비를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소비하는 것이 또한 소유하는 것이 나 자신을 결정할 수는 없다. 소비가 계층을 구별해주는 것이라고 해도, 이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

내가 산 물건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으며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나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나의 삶을 결정지을 수 없다.

1-1
요약하면,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다. 아마도 현대 "잉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소유형태일 것이다. 소비는 이중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써버린 것은 빼앗길 염려가 없으므로 일단 불안을 감소시켜준다. 그런 한편, 점점 더 많은 소비를 조장한다. 왜냐하면 일단 써버린 것은 곧 충족감을 주기를 중단해버리기 때문이다. 현대 소비자는 나=내가 가진 것=내가 소비하는 것이라는 등식에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는지도 모른다. (p50)

소유적 실존양식에서는 나와 나의 소유물 사이에 살아 있는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소유물은 물론 나도 사물이 되며, 내게 그것을 소유할 가능성이 주어졌기 때문에 지금 나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관계도 있을 수 있어서, 그것이 나를 소유하기도 한다. (p116)



2-1
존재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깊이 아는 것인 반면, 소유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많이 아는 것이다. (p68)

일단 신이 우상화되어버리면, 흔히 말하는 신의 특성들은 소외된 정치적 강령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경험과는 무관하게 된다. 우상은 자비의 신으로 칭송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에 못지않게 신의 이름으로 온갖 잔학한 행위를 저지를 수도 있다. 인간적 연대감이라는 명분을 내건 소외된 믿음이 극도로 비인간적인 행위를 의심 없이 자행했던 수많은 예에서 보듯이 말이다. 소유양식으로서의 신앙은 스스로의 모색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확신을 원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절름발이 인간들을 위한 목발이 된다. (p70)

안식일에만은 모두가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듯, 존재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 듯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자신의 본질적인 힘을 쓰기 위해서 사는 것 - 오로지 기도하고 연구하며,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사랑하는 것이다.
(p82)



3-1
중요한 것은 지나친 사치와 빈곤을 근절시키는 일이다. 물질적 자산을 마지막 한 조각까지 양적(量的)으로 똑같이 분배했다고 해서 그것이 평등을 의미할 수는 없다. 평등이란 사회계층이 다르다고 해서 판이한 생활경험을 가져올 정도로 극도로 극심한 소득차이를 없애는 것이다. (p126)


새로운 인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세계를 지배하며, 그래서 결국 자기 소유물의 노예가 되는, 그런 소유에의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믿음과 관계에의 욕구, 관심, 사랑, 주변세계와의 연대감을 바탕으로 한 안정감, 자아 체험, 자신감.
-나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어떤 사물도 나의 삶에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p244)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패배하고 좌절한, 가엾은 인간에 불과하며 그릇된 생활방식의 산 증거물에 불과할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잃을 수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응당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언제이고 잃을 세라 줄곧 조바심 내기 마련이다. (p160)

존재적 실존양식은 우리가 소유적 실존양식 내지는 비존재적 실존양식을 제거하는 데에 비례해서(다시 말하면, 우리가 소유에 매달림으로써 그것에 "안주하고" 자아와 가진 것에 집착함으로써 안정을 추구하고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감소시키는 정도에 따라서) 관철될 수 있다.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중심주의와 아집을 버려야 하며, 신비주의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텅 비워야" 한다. (p131)

존재적 실존양식에서 나의 안정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나 자신의 내부에 있다. 삶에 대한 믿음과 나의 생산적 힘에 대한 신념의 결여에, 퇴보적 성향에, 내면적 게으름에, 나의 삶에 대한 결정을 타인에게 떠맡기려는 것에 등. 그러나 이러한 위험들은 존재에 반드시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상실의 위험은 소유에 항상 내재한다.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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