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사랑할 때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애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자 끝사랑이며, 단 한 번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계속 짝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내 사랑을 눈치채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늘 시치미를 떼고 힐끔,바라볼 뿐입니다. 물론 나도 바람을 핀 적은 있죠.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거나 그 짧은 설렘, 긴장, 썸이랄까, 그런 것들을 즐기고. 또 마지막 순간에는 항상 후회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녀에게로. 
  


나는 결국 죽을 때까지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깨닫는 데 삼십 년이 걸렸습니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겨울 휴관)

(콩밥을 나누고 에이즈 환자 모임에 가야 한다 해도 /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밖에 / 너와 헤어진 다음 날 그를 사랑했어 -말할 수 없는 애인)
  
  



  
그런 점에서 시인은 누구보다도 열렬히 자신을 사랑하고, 경멸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더! 더! 더! / 우린 외롭게 무리 지어 겁을 먹고 망설입니다 / 얼리고 녹이고 불태우고 / 절대로 유년 시절을 쓰고 싶지 않거든요 -사생아들)

(어두운 날들 밤의 물결이여 / 모두 나를 지나쳐 어디로 흘러갔나 / 왜 일부는 나에게 있나-거기 누구 없어요)

(미완성으로 끝내는 것이다 / 포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재능이 좋다 / 나무들은 최선을 다해 헐벗었고 / 새 떼가 죽을힘껏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반대로 -12월)

(네가 놀라지 않는 것에 / 내일은 더 무서운 자극이 필요할 거다 / 봐라, 네 식욕은 상상력은 아무것도 아니잖니 -너무 놀라지 마라)

(나는 나를 받아치고 / 숨 가쁘게 떠나보내며/ 나를 그리워한다 / 두려움에 떨며 나를 기다린다 -크라잉게임)

(딸 하나 전도 못 해 대단히 자존심을 다쳤던 무능한 전도사. 과민한 결벽증에 시달렸던 독거노인, 그녀가 내 첫번째 엄마다. 영원한 적수이자 연인, 기타 등등이다.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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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는 무작정 신을 믿고 싶어진다.

 

 

어렸을 적 나는 교회에 다녔었다. 아무 의식도 없이 그저 친구를 따라 다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중학생쯤이었나. 교회 안에서는 권력층이 존재했고 그것은 세분화되어 있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나갔다는 사실도 중요했고 온 가족이 믿느냐는 사실도 중요했다. 어느 목사님, 혹은 전도사님 집사님 권사님 등등 알 수 없는 직위가 많았다.목사가 꿈이라던 착한 언니가 화장실에서 자기 친구 욕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란.

 

 


공부 핑계로 중학교 이후부터는 아예 가지 않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가끔. 나는 무작정 신을 믿고 싶어진다. 종교가 아니라 신을 믿고 싶어진다. 그러면서도 냉소적으로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늘에 계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왜 이 땅 위에서 꿋꿋하게 계속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굳이 몇 년 며칠을 약이나 수술로 연명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고. 이 땅 위에서 저 하늘에 계신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애초에 어불성설이 아닐까 하고. 이 땅 위에서 믿음은 저 위 당신에 대한 배반이 아닐까 라고.

 

 


당신이 나에게 강요를 하지 않는다면, 나도 당신의 종교를 인정해줄 수는 있으니까.

(확장되는 천국 / 촌스럽게 전도하지 마 / 따라가기 싫어 -쌍둥이)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은 그 모습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창조와 종말을 함께 배우는 것은 탄생과 죽음을 함께 배우는 것과 같다.

(창세기를 여러 번 읽어도 나는 가위에 눌렸다 /난간에 심은 바람에 대해 변명하지 못했다 / 신앙과 종말을 함께 배워 불안하진 않았다 -口)

 

 


나의 종말이 달콤하기를.

(그녀가 현관 밖에 사 일 동안 서 있고 나는 현관 안에서 죽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왜 만날 나만 잔다 하시니) 살았다 어제. 어떠한 신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린 서로 믿지 않는다// 나의 구멍이 도넛 같다면 얼마나 달콤하게 죽을 수 있을까 헤드폰을 껴도 밀려오는 반투명의 소리들을 모른 척하고 달콤한 입체를 찾는다 긴 이름들이 비뚤어진다 // 여섯 번째 일들이 오고 있다 -6)

 

 


또한 나의 불안이, 나의 불신이 모두 숨겨지기를.

(내게서 발현되는 붉음이 당신에 대한 쿠데타같이 보여 숨기려 했지만, 내가 붉고 네모난 색을 떠올렸을 때 건물은 무너졌다 붉은 먼지가 보도블록 틈까지 붉게, 앉았다 -흰 버티컬을 올리면 하얀)

 

 


마지막 날에, 혹은 심판이 내려진다고 하는 날에,나의 마지막은 외롭지 않기를.

(매일 기도한다 / 지상은 춥고 외로운 지대라 믿었다 등고선을 이으며 / 슬픔은 직선으로 왔는데 /그릴 때만 곡선이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독주회)

(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 / 내가 나중에 아주 희박해진다면 / 내가 나중에 아주 희미해진다면 / 화병에 단 한 번 꽃을 꽂아 둘 수 있다면 -리시안셔스)

(너는 작고 나는 포근했다 / 우린 오래오래 안녕이지만 오래오래 사랑한 기분이 든다 - 1226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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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틈을 찾아서

 

 

황인찬의 시는 간결하다. 좋게 말하면 깔끔한 것이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시를 읽으면서 어렴풋하게 드는 생각은 좋은 시란 ‘틈’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읽기가 어렵거나 난해하다는 뜻이 아니라 좋은 시는 잠시 멈춰서 음미할 수 있는 구절이 있고 더 깊이 생각할 ‘틈’을 준다. 그런 면에서 황인찬의 시는 ‘틈’이 없다. 틈이 들어갈 새가 없다.

 

 

구관조 씻기가 표제작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읽었지만 딱히 이렇다 할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스스로 목욕하는 새는 씻길 필요가 없고, 스스로 말하는 시는 멈출 필요가 없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구관조 씻기기)

 

 

나는 질문을 하는데 백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주체인 나는 존재하지만 타인인 너는 존재하지 않는 그 공간. 우리는 마치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관람하는 존재로 너는 너, 나는 나로 밀실에 갇혀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 서 있었다 /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무성한 선인장이 반기는 침실, 나만의 공간에서야 비로소 비참함을 느끼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면역이 되어 있고 완벽한 무균실이기 때문에.

(집에 돌아왔는데, 여기서는 아무도 비참하지 않았다 / 침실에 들어서자 잎이 무성한 선인장이 있었다 -면역)

 

 

그러나 밖은 여전히 얼음 들판이다. 끝이 없는 삭막하고 아름다운 넓은 공간.

(나는 깨달았지만 / 여전히 끝이 없는 얼음 평원이 있었다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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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기 전에 사람.

 

 

사랑에 대해서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는 너에 대해서, 그리고 너라는 주체에 대해서. 사랑이라기 전에 사람이므로.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또 함께 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에게 할 말이 많고 당신에게 들을 이야기가 많다. 당신은 마치 나비처럼 아름답고 가끔 세상은 정지된다.

(나비의 두 날개를 하나로 접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마음이 마음을 안아 겹이라든가 그늘을 새기고 아침마다 다른 빛깔을 펼쳐내던 두 날개, 다 펄럭였다면 눈멀고 숨 멎어 돌이 되었을 거라 하였습니다 -불선여정(不宣餘情))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모든 것을 공유하지는 않으며, 그런 점에서 타이밍이 중요하다.어쩌면 서로에게 상처를 내기도 했던 작은 차이들이 그 시간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네가 나를 베려는 순간 내가 너를 베는 궁극의 타이밍을 일격(一擊)이라 하고 -사랑의 병법)

(낙타를 무릎 꿇게 하는 마지막 한 짐 / 거목을 쓰러뜨리는 마지막 한 도끼 -한 걸음 더)

 

 

나와 당신은 비슷한 점도 있지만, 영화를 보고 같이 웃거나 혹은 같이 울거나. 어떤 면에서 당신과 나는 다르다. 사물을 대하는 방식이, 혹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은는이가)

(못할 게 없는 사람일수록 가진 것도 많고 줄 것도 많거늘 / 나는 늘 가진 것도 없고 줄 것도 없는 /못할 게 많은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곤 했다 / 남편은 못할 게 많은 사람이다 -삼대)

 

 

언젠가 마지막 날 당신이 먼저 혹은 내가 먼저 인사를 하게 된다면 나는 모든 것이 어쩔 수 없었다고 말을 하는 대신에, 고마웠다고.

(죽기 전 더운 피를 뿜어낸 것들의 살은 질기다 피를 쏟아낼 때의 안간힘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육식의 추억)

(고슴도치 같은 고독 때문이었다고, 서로의 곁에 서로를 결빙시켜놓기 위해서였다고, 사랑이라는 허구의 우화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고도 말할 수 없어 -사라가 찰스를 떠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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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죽음, 그리고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해서



클라리사는 파티를 열 준비를 한다. 그녀의 존재를 알려줄 파티. 너는 훌륭한 안주인이 될 거야, 라는 말에 울음을 터뜨리고 오열하는 그녀였지만 그녀는 정말로 훌륭한 안주인이 되었다. 샐리 역시도. 매사에 비판적이고 자유분방하던 샐리도 장성한 아들을 여럿 둔 부자 사모님이 되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삶은 피터가 말했던 것처럼 `영혼의 죽음`일 수도 있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 다른 사람의 개성분방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삶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 



그러나 피터 역시 영혼의 죽음을 상태이다. 나이에 맞지 않는 주머니 칼이나 혹은 사랑이라 불리고 싶은 방종, 또한 정착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삶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모든 죽음이 그렇듯이 자발적으로 혹은 타의적으로 찾아온다. 다만 그 가운데서 누군가는 파티를 열고, 누군가는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치는 것일 뿐.



이 책을 묘사하는 말로 흔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니, 뭐니 이런 말을 쓰는 모양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기가 약간 힘들었던 것은 말하는 사람의 이동이 순식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저기로, 또 갑자기 여기로.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넌 전혀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이 작품은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감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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