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어디에 있나 1
김신용 지음 / 천년의시작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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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제 고통을 노래로 부를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불혹이란, 그만큼 노회해진 정신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일생을 통한 방황, 그 어둠의 질곡 속에서 고통을 노래로 부를 줄 알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자의 본능적인 테크닉쯤은 이미 터득하고 있으므로...

  내 자신의 젊음의 기억 속에도 가슴 속에 살고 있는 비명을 이기지 못해 달리는 차에 몽유병자처럼 기어든 순간도 있었다. 사창굴의 음침한 골방에서 물 한 모금 없이 세코날 서른 알을 침만으로 씹어 삼킨 적이 있었다. 혁대로 만든 올가미로 감방의 뼁끼통의 쇠창살에 목을 매달고 내 엉덩이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저울질해 본 순간도 있었다.

  그 이후(내 생의 숱한 고통의 순례 이후), 나는 비명을 노래로 부를줄 아는 생존 본능, 아니 테크닉, 그 비슷한 슬기를 배웠다. 비록 비굴하고 치사하더라도, 나는 생존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사실 슬기란, 배워서 얻는 지식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지혜가 가져다 주는 마음의 부드러운 열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슬기란, 체험이라는 뿌리가 피워내는 꽃이라고 비유할 수도 있다. 생존 본능에서 개화한 이 꽃은 순전히 살고 싶은, 동물적인 너무나 동물적인 욕망이 이끌어낸 기교였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비굴하고 구역질이 나는 것이라도 나는 살고 싶었다. 살아봐야 별볼일 없겠지만

  -김신용, "달은 어디에 있나1", 천년의시작, 15쪽.

 

  아침부터 어디를 가야 해서 긴 글은 못 쓰겠다(하기야 여기다 긴 글을 쓴 적도 별로 없다). 그러나 이 한 마디는 하고 싶은 게, 이 책은 빨리 읽으면 안 된다.

  나는 며칠 전에 구입한 이 책을 오늘 처음으로 펼쳐, 앞부분 서른 페이지를 읽고는 곧바로 덮었다. 재미가 없어서 덮었나? 아니다. 내 생각에 이 소설은 재미가 있다고 호가 난 소설들(특히 순문학)의 모가지를 간단히 비틀어버릴 정도로 흡인력이 넘친다. 의미가 없어서 덮었나? 천만에, 이 소설이 의미가 없다면 다른 소설들은 그야말로 맹탕일 것이다.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외관만을 빌렸을 뿐 기실 에세이나 마찬가지다. 한 인간이 살아온 가시밭길이 핍진하게 펼쳐진다. 때문에 한 인간이 살아온 (남들은 상상도 하기 힘들) 고난을 이해하려면, 이 책은 빨리 읽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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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1-2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 정말입니까 !!!!!!!!!!!!!!
시바, 안 되겠다. 일단 사고 봐야겠습니다.

수다맨 2013-11-29 17:12   좋아요 0 | URL
첫 문장이 이렇습니다. "내 이름은 시부랑탕이다(11쪽)" ㅎㅎㅎ

오, 이건 굉장히 강렬하네요. 최근에 본 책 중에서 도입부가 이렇게 흥미로운 소설은 처음입니다. 아마 "버려진 사람들"을 산문으로 풀어 쓰면 이렇게 나올 것 같은데 말이죠 ㅎㅎ 웬만해선 칭찬을 잘 안 하는 장정일조차도 '한국문학사에서 전무후무한 소설이 나왔다'며 뒤에서 극찬을 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1-29 20:37   좋아요 0 | URL
오, 장정일이 책 보는 눈은 있거든요. 평론가보다 장정일 서평을 저는 믿습니다.
이야, 이거... 내 이름은 시부랑탕이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시작부터 왠지 찰스부코스키 필이 나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거 얼릉 절판되기 전에 사두어야겠습니다...

수다맨 2013-11-29 22:40   좋아요 0 | URL
장정일 서평은 날카롭고 듬직하죠. 적어도 누구한테 아부 떨며 주례사 쓰는 사람은 아니라서 참 호감이 갑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책은 빨리 구매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설책 만원 훌쩍 넘긴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이 가격에 파는 것을 보면 조만간 출판사에서 판형을 바꾸든가, 아니면 절판시킬 확률이 높으니까요.
 
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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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오늘날 기생의 이야기를, 전근대적 신파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해묵은 신파에는 그만한 깊이와 눈물이 있다. 길차고 유려한 문장과 디테일의 충실한 뒷받침, 저자의 극진한 시선이 어우러져 한 편의 멋진 작품을 만들어냈다. 혼불의 최명희 이후에, 간만에 제대로인 조선(!) 소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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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1-28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거 신기생뎐 드라마 원작 아닙니까. 원작자가 드라마 보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고 하던....
ㅎㅎㅎㅎㅎㅎ. 하긴 눈에서 레이져 나가고 했으니, 속에서 열통이 터졌을 겁니다.

수다맨 2013-11-28 12:2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는 이 드라마는 잘 안 봐서요. 임혁이 장군이나 할머니로 빙의했다고만 들었습니다.

저는 깊이가 있는 신파를 참으로 좋아하는데, 이 책에는 그게 있더라구요. 괜히 모던한 척, 쿨한 척 돋보이려는 작가들 보다는 이렇게 신파를 모두가 깊게 공감할 수 있는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작가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자료에 대한 꼼꼼한 조사와 (최명희나 김주영을 떠올리게 하는) 구수하고 아름다운 문장도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홀로서기 - 서정윤 시집, 개정판
서정윤 지음 / 문학수첩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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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장이 지나치게 수려하거나 허세가 보이는 시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수사들은 대체로 시인의 빈핍한 내면을 가리기 위해 동원된 위장막에 지나지 않는다. 좋은 시는 수사나 은유의 도움에 섣불리 기대지 않고, 그 자체의 결곡한 진술로 밀고 나간다. 때문에, 나는 이 시가 가라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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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1-27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가만 보면 힙합 구성과 비슷합니다.
수사가 화려하다는 것은 결국 라임이 잘 맞는다는 소리이거드뇨.

라임에 신경을 쓰면 역으로
플로우 ( 자연스러운 흐름 ) 이 죽습니다.

요즘 시인들이 영혼이 없는 말장난을 시에 자주 사용하잖아요.
그 말장난이 바로 라임이죠. 라임을 강조하니 플로우가 죽는.....

래퍼들은 라임을 강조하는 노래보다 플로우가 자연스러운 곡을 으뜸으로 치더라고요...

수다맨 2013-11-27 15:37   좋아요 0 | URL
예전에도 곰곰발님에게 들었던 말이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곱씹게 되네요.
라임이 강하기 보다는 흐름이 자연스런 곡이 으뜸이라니 ㅎㅎ 그러고 보면 음악이나 문학이나 서로 맞닿는 면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시집 뿐만이 아니라 최근에 나온 한강 소설가의 시집도 읽다가 짜증이 나더라구요. 곰곰발님 말씀처럼 '영혼 없는 말장난'까지는 아니더라도 '테크닉과 감수성에 의존해 적당히 빚어낸 시'정도에 불과한데, 출판사의 책 소개에 기름기가 덕지덕지 끼어 있어서 느끼한 식용유 한 접시 삼킨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11-27 21:17   좋아요 0 | URL
한강 이번에 나온 시집 못 읽겠다고 덮은 분만 저 한 3분 보았습니다.
그 정도인가요 ? 하긴... 소설가가 느닷없이 시집을 내다니...
시인이 소설 쓰면 망하고 ( 김신용도 소설 쓰다 망한 케이스인가 보더라고요 )
소설가도 시집 내면 거의 망하더라고요.
확실히 두 장르는 다릅니다......

수다맨 2013-11-28 01:00   좋아요 0 | URL
곰곰발님이 예전에 함부로 '쓰리콤보' 하면 안 된다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네요 ㅎㅎ

김신용 소설이 그렇게 나쁜가요? 저는 오늘 김신용 소설(달은 어디에 있나)도 샀는데 그 말씀 들으니 살짝 후회감이 드네요 ㅎㅎㅎㅎ

저는 개인적으로 한강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예전에 그녀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채식주의자" 연작을 읽었는데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기를 먹는 남편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면서, 채식주의자인 아내를 가리켜 순수와 순정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는 것이 꼴사납더군요. 이러한 이분법적 시선도 문제였지만 일종의 주의/주장을 오로지 순수하게 그려내려는 태도가 상당히 후져보이더라구요.

어쨌거나 한강의 시집은 참 별로였습니다ㅎㅎ 저는 이 작가가 (말씨는 부드러울지 몰라도) 다분히 꼰대적인 기질이 있을 거라는 혐의를 갖고 있거든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1-28 12:10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김신용 소설 안 읽었습니다. 소설에 대해서는 별 반응이 없길래 그리 말한 겁니다.


그나저나 한강 싫어하시는군요. 제가 김연수 싫어하는 것처럼....
김연수가 징징거리는 서사라면
한강은 뭐랄까. 지나치게 카탈스럽달까요.
한강이야말로 계룡산 꼳대기에 올라가서 아래 내다보는....
나는 너희 세계와는 다르단다... 이런 마인드 ?!

한강보다는 공선옥이 좋죠. 공선옥이 워낙 투박하게 써서 평론가들에게 인기가 없지 공선옥 나중에는 제대로 된 평가 받을 날이 올겁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11-2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리콤보 하니깐 권혁웅 생각이 갑자기 나네요. 이번에는 동물 사전인가 뭔가....
바쁘세요. 시 쓰라, 미래파 지지하는 비평 쓰라, 아이들 가르치랴, 에세이 쓰랴.....
명함이 시인이라면 새벽 3시에 시 쓸 궁리를 해야지......

미래파'라는 지시도 웃깁니다. 미래파 뭡니까.

수다맨 2013-11-28 12:55   좋아요 0 | URL
2000년도 초반에 등장한 젊고 실험적인 시를 쓰는 일군의 시인들(김경주, 황병승, 김민정 등)을 지칭하는 말로 알고 있습니다. 이들의 경향을 몇 마디 말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감각과 미학의 혁신을 최대한도로 꾀하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사실 저는 이들의 시를 무조건적으로 싫어하진 않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어떤 새로운 지점-감각의 측면에서건 시를 바라보는 관점의 측면에서건-을 보여준 측면은 있거든요. 하지만 이들의 언어가 점점 '자폐적 유희'나 '유아적 망상'으로 치닫는 경향이 강해지고, 이런 지점을 냉정히 지적하기보단 오히려 이것을 특정한 성취로 해석하려는 비평가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감각의 혁신이 사회적 시각을 진보적으로 바꾸는 것에도 도움이 된다'와 같은 논리를 내세우는 거지요. 권혁웅도 그 중에 한 명이고요. 어쨌거나 이 바닥도 참 탈도 많고 가라도 많은 듯합니다 ㅎㅎㅎ

공선옥 선생은 그래도 몇 년 전부터 괜찮은 평가를 받고 있지요. 인지도도 꽤나 있는 편이구요. 저는 사실 이 작가의 근작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초중기작인 "내 생의 알리바이"나 "유랑 가족"은 굉장히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12-07 14:58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문학을 거의 모릅니다.
수다 님에게 많이 배웁니다.

수다맨 2013-12-07 16:21   좋아요 0 | URL
원 별 말씀을요 ㅎㅎ 제가 곰곰발님께 늘 배우는 처지인 걸요 ㅎㅎㅎ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시마 유키오.기무라 오사무 외 지음, 김항 옮김 / 새물결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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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토론을 읽고 나서 미시마나 전공투나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본디 관념이나 행동이 극단에 다다른 자들은 종국에는 우스꽝스럽거나 추레한 모습으로 변질된다. 미시마가 (그의 문화적 천황주의를 지키기 위해) 할복한 사실이 우스꽝스럽다면, 2부에 이어지는 늙은 전공투의 자화자찬은 꼴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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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1-27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시마와 다자이 오사무가 토론을 했으면 더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수다맨 2013-11-27 15:59   좋아요 0 | URL
실제로 미시마는 다자이를 굉장히 싫어했다고 들었습니다. 다자이가 쓴 몇몇 소설(인간실격이나 사양)에 대해서는 나름의 경의를 표했지만 이 사람의 성향과 얼굴(!)에 대해서는 대놓고 불만을 표했죠 ㅎㅎ

그런데 의외로 당대의 일본 문단과 대립각을 세웠던 사람은 다자이라고 합니다. 미시마는 극우적 성향에 마초적 인상을 강하게 드러내긴 했지만 어찌 보면 쇼스타퍼
(showstopper)에 가까운 느낌이 드는데 반해, 다자이는 (그 유약한 인상과는 다르게) 사카구치 안고와 더불어 무뢰파라고 불렸다고 하네요. 심지어 문단의 거목이자 "설국"의 작가인 가와바타에게 대들고, 그보다 더 선배였던 '소설의 신' 시가 나오야에게는 대놓고 '말대가리'라며 일갈했다고 합니다. 이런 점은 또 미시마와 묘하게 비교가 되네요.

어쨌건 미시마와 다자이가 붙었다면 (위의 책에서 나오는 극좌와 극우가 싸우는 것보다) 더 불꽃을 튀겼을 듯합니다 ㅎㅎ 원래 동업자들끼리 싸우는 게 더 볼만하기도 하구요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11-27 21:21   좋아요 0 | URL
다자이가 아마 문단 사람들에게 쌍욕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시발놈들아, 그래 어디 너히들 잘사나봐자.. 막 이런 식으로...ㅎㅎㅎㅎㅎㅎㅎㅎ 뭐라고 ? 안 들려.. 조까, 조까.. 무조건 반사 ~~~ 반사..

막 이랬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고의 타락론 보면.. 아닌가. 하여튼 어디서 읽었는데 안고가 다자이 일화를 소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지이 유약해 보이지만 문단 권력과 존나 싸운 인물이에요. 무시무시합니다... 손창섭과 다자이 가만 보면 닮은 구석이 많아요....

수다맨 2013-11-28 00:43   좋아요 0 | URL
손창섭은 싸우려고 하기 보다는 무시로 일관했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너그 같이 더러운 애들이랑은 안 논다' 뭐 이런 식으로요ㅎㅎ

저는 개인적으로 김승옥/이청준 같은 4.19세대 보다는 손창섭의 소설이 단수가 더 높다고 봅니다. 물론 이청준 같은 경우야 평생에 걸쳐 소설을 썼으니 약간 열외로 치고, 김승옥의 초기작은 솔직히 다시 한 번 보려니 읽기가 거북하더군요. 그 세련된 문장과 예민한 감수성을 걷어내고 나니 젊은 지식인의 페이소스랄까, 이것만 오롯이 남더라구요.

반면 손창섭은 뭐랄까,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그 자체의 비극성을 응시하는 것 같습니다. 어둡고 축축한 느낌이 강하게 밀려들면서, 우리는 이렇게 평생 사는 거야, 라고 작가가 끊임없이 되뇌고 있다고 해얄까요 ㅎㅎ 저는 김승옥의 저 미끈한 느낌보다는 이렇게 축축한 소설이 더 마음에 닿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1-28 12:05   좋아요 0 | URL
공감합니다. 사람들 김승옥 김승옥 하는데...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신화적 존재가 될 만큼 매우 훌륭하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전 이 평가가 좀 의아스러웠어요.
세련된 맛이야 굉장하다는 생각은 하는데 고거 빼면 별로 못 느끼겠어요.
하여튼 손창섭이 짱임........

김승옥도 보면 라임에 목숨을 걸어서 플로우가 자연스럽지 못한 느낌이 듭니다.

수다맨 2013-11-28 12:34   좋아요 0 | URL
음.. 아무래도 4.19세대, 더 정확히 말하면 김현(평론가)의 문학적 욕심이 작용했겠지요. 아버지 세대(김동리, 황순원)나 선배 세대(장용학, 손창섭)를 이기려면 자신들이 내세울 작가가 반드시 필요하리라 판단했을 터이고, 그 결과 낙점된 작가가 최인훈과 김승옥, 이청준이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저도 이십대지만) 이십대가 아무리 좋은 소설을 쓰더라도 중장년층이 쓴 작품의 무게를 사실 감당하지 못해요 ㅎㅎㅎ 그래서 김승옥 소설이 손창섭 소설보다 문장이나 구성 짜는 능력이 더 나아 보여도, 시선의 깊이나 인식의 깊이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저 꽃이 불편하다 창비시선 221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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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비

 

                박영근

 

  1


  그 겨울엔 유난히 눈이 없었고, 정신병동에서 나는 흰 벽만 바라보고 살았어요
  흰 벽 위에서 새까맣게 고물거리던 무슨 글씨 같은 것들이 생각나요 지겹도록 약을 먹어댔고, 그리고 허기와 잠...... 머리통을 짓밟고 지나가던 개새끼 같은 쌍소리들
  음악이 없었으면 어쩌면 난 죽어버렸을지도 몰라요 단순하게 살게 해달라고 매일매일 나에게 애걸했어요
  해동을 하는 나무처럼 목도 팔도 다리도 잘라버리고 싶었으니까요

  그리고 내 마음이 붙잡고 있던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
  다섯살 무렵 어머니 치마꼬리를 붙들고 삐죽하고 웃고 있는, 그 애의 작은 손과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 막 생겨날 듯한 볼우물, 아직은 살아갈 날들이 비어 있는
  그때 당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기억이, 기억이 나질 않아요

  2

  어디서 본 그림이었을까, 맹목조라는 그림, 조롱 속에서 어둑하게 허공을 보고 있는 눈먼 새, 몸은 자꾸만 말라가고, 제 울음소리도 잊은 채로 머지않아 죽어갈...... 돌아갈 집도 밥상머리에 함께 둘러앉을 식구들도 나에겐 없었는데, 문득, 문득 돌아갈 자리를 찾곤 했던가 봐요

  그래요, 뜨거운 물방울들이 내 몸 속으로 아주 힘겹게 떨어지는, 그런 때가 자주 찾아오곤 했어요  

  당신과 내가 십오년 넘게 끌고 다닌 그 단칸방들이었어요. 시궁쥐들이 와서 조합신문을 쏠고, 쪽방 불빛을 가리고 학습을 하고, 짠지와 막걸리 잔으로 서로 건네주던 먼 지역의 소식들, 그리고 늦은 잔업에서 돌아오면 마당에서 눈을 맞고 있던 빨래들...... 그런데 그 단칸방에, 십여 년이 흘렀는데 내가 다시 그 방에, 아파트를 돌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내가 걸레쪽 같은 몸을 끌고 돌아와 흰 벽을 바라보고 있는 거야 분명 그 방들을 떠난 지 오랜데, 그 텅 빈 방에 주저앉아 한웅큼씩 안정제를 먹고, 나가게 해달라고 쌍소리질을 하고 있는 거야 정말이지 그 방을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어 세상에, 나이 마흔을 넘긴 여자가

  생각나요? 살아갈 날이 너무 힘들어서 내가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을 때 당신이 울면서 했던 말, 아이를 낳아서 기르자는 말...... 그 애는 지금 어디 있나요

  3

  누군가는 시간강사 노릇을 마치고 전임이 되었고 누군가는
  출판사에 들어가 주간이 되었고 또 누군가는 대기업에 들어가 딸라장사를 하였고
  누군가는 이혼을 했고
  누군가는
  폐인이 되어 떠돌기도 하였고, 밤 12시나 1시, 고등부학원 수업이 끝나면 집에 들어와 당신은 늘 소주를 마셨어요 18평짜리 임대아파트였지요 아,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내가 왜 다시 그때 일을 떠올려야 할까 그 지루한 헛소리, 다시 현장에 들어가 살아야겠다 이건 온통 사기다 북한에 한번 갔다와야겠다 세상 보는 눈이 넓어질 텐데 아니야 자본주의를 더 깊게 보고 파들어가야 해 아직 껍데기만 보고 있어, 그렇게 쓰러져 잠든 모습은 수의도 없는 시체 같았어요 깨어 일어나 대낮부터 멍하니 앉아 TV 채널을 돌리던 그 무표정한 얼굴 그런 중에도 살을 섞기도 했으니, 그때 내 모습은 어땠을까

  등에 얼음이 박힌다는 말 알아요?
  어디에도 나는 없었어요

 

  4

  나 때로 한밤중 고속도로 갓길 같은 곳에 차를 세워
  놓고, 술을 마시고 홀로 잠들기도 하였다

  돌이킬 수 없이 달려온, 또 살기 위해 달려갈

  길 위에서, 길을 잃으며

  저를 찾고 있는
  망가진 사내 하나를 보았다

  온몸 환하게 얼어가는 겨울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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