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꽃이 불편하다 창비시선 221
박영근 지음 / 창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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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비

 

                박영근

 

  1


  그 겨울엔 유난히 눈이 없었고, 정신병동에서 나는 흰 벽만 바라보고 살았어요
  흰 벽 위에서 새까맣게 고물거리던 무슨 글씨 같은 것들이 생각나요 지겹도록 약을 먹어댔고, 그리고 허기와 잠...... 머리통을 짓밟고 지나가던 개새끼 같은 쌍소리들
  음악이 없었으면 어쩌면 난 죽어버렸을지도 몰라요 단순하게 살게 해달라고 매일매일 나에게 애걸했어요
  해동을 하는 나무처럼 목도 팔도 다리도 잘라버리고 싶었으니까요

  그리고 내 마음이 붙잡고 있던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
  다섯살 무렵 어머니 치마꼬리를 붙들고 삐죽하고 웃고 있는, 그 애의 작은 손과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 막 생겨날 듯한 볼우물, 아직은 살아갈 날들이 비어 있는
  그때 당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기억이, 기억이 나질 않아요

  2

  어디서 본 그림이었을까, 맹목조라는 그림, 조롱 속에서 어둑하게 허공을 보고 있는 눈먼 새, 몸은 자꾸만 말라가고, 제 울음소리도 잊은 채로 머지않아 죽어갈...... 돌아갈 집도 밥상머리에 함께 둘러앉을 식구들도 나에겐 없었는데, 문득, 문득 돌아갈 자리를 찾곤 했던가 봐요

  그래요, 뜨거운 물방울들이 내 몸 속으로 아주 힘겹게 떨어지는, 그런 때가 자주 찾아오곤 했어요  

  당신과 내가 십오년 넘게 끌고 다닌 그 단칸방들이었어요. 시궁쥐들이 와서 조합신문을 쏠고, 쪽방 불빛을 가리고 학습을 하고, 짠지와 막걸리 잔으로 서로 건네주던 먼 지역의 소식들, 그리고 늦은 잔업에서 돌아오면 마당에서 눈을 맞고 있던 빨래들...... 그런데 그 단칸방에, 십여 년이 흘렀는데 내가 다시 그 방에, 아파트를 돌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내가 걸레쪽 같은 몸을 끌고 돌아와 흰 벽을 바라보고 있는 거야 분명 그 방들을 떠난 지 오랜데, 그 텅 빈 방에 주저앉아 한웅큼씩 안정제를 먹고, 나가게 해달라고 쌍소리질을 하고 있는 거야 정말이지 그 방을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어 세상에, 나이 마흔을 넘긴 여자가

  생각나요? 살아갈 날이 너무 힘들어서 내가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 했을 때 당신이 울면서 했던 말, 아이를 낳아서 기르자는 말...... 그 애는 지금 어디 있나요

  3

  누군가는 시간강사 노릇을 마치고 전임이 되었고 누군가는
  출판사에 들어가 주간이 되었고 또 누군가는 대기업에 들어가 딸라장사를 하였고
  누군가는 이혼을 했고
  누군가는
  폐인이 되어 떠돌기도 하였고, 밤 12시나 1시, 고등부학원 수업이 끝나면 집에 들어와 당신은 늘 소주를 마셨어요 18평짜리 임대아파트였지요 아,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내가 왜 다시 그때 일을 떠올려야 할까 그 지루한 헛소리, 다시 현장에 들어가 살아야겠다 이건 온통 사기다 북한에 한번 갔다와야겠다 세상 보는 눈이 넓어질 텐데 아니야 자본주의를 더 깊게 보고 파들어가야 해 아직 껍데기만 보고 있어, 그렇게 쓰러져 잠든 모습은 수의도 없는 시체 같았어요 깨어 일어나 대낮부터 멍하니 앉아 TV 채널을 돌리던 그 무표정한 얼굴 그런 중에도 살을 섞기도 했으니, 그때 내 모습은 어땠을까

  등에 얼음이 박힌다는 말 알아요?
  어디에도 나는 없었어요

 

  4

  나 때로 한밤중 고속도로 갓길 같은 곳에 차를 세워
  놓고, 술을 마시고 홀로 잠들기도 하였다

  돌이킬 수 없이 달려온, 또 살기 위해 달려갈

  길 위에서, 길을 잃으며

  저를 찾고 있는
  망가진 사내 하나를 보았다

  온몸 환하게 얼어가는 겨울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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