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에 진령군이라는 무녀가 있었다.
중전 민씨는 1982년에 군란이 발생하자 궁궐을 탈출해 장호원(지금의 이천 일대)으로 피난을 갔다. 흥선대원군이 권좌에 복귀하고 그의 추종 세력들이 정계로 되돌아 왔기에 민씨의 안전은 중대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 시기에, 민씨는 관우를 신으로 모신다는 한 무녀를 만나게 된다. 무녀는 민씨에게 장차 궁궐로 돌아갈 수 있으니 안심해도 좋다는 예언을 한다. 민씨는 구식 군인들의 난이 일어난지 두 달이 지나서, 청국의 도움에 힘입어 궁궐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다. 무녀는 정확한 점괘(?)를 내려준 덕에 조선 왕조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녀의 신분으로 진령군이라는 군호를 얻는 특전을 누린다.
이때부터 진령군은 벼슬을 얻으려는 이들에게 뇌물을 받고, 자신의 뜻대로 국사를 농단하고 전횡하는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다. 진령군이 관우를 섬기려 지었던 사당(관제묘)에는 그녀의 눈도장을 받고자 온갖 선물을 가져온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궁중에선 진령군이 날마다 굿판을 벌여서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었고, 전국의 사찰에는 진령군이 보낸 무당과 광대가 모여서 왕실의 영원 번영과 세자의 무병 장수를 바라는 굿을 했다. 그 결과 국가 재정은 체제 정비와 내정 개혁이 아닌, 전국 각지에서 진령군이 벌이는 무당굿에 상당 부분 소용되었다. 고종과 민씨는 진령군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조병식, 이유인, 이범진, 홍계훈 같은 고관대신들은 조선의 최고 권세가인 진령군과 의가족(義家族)을 맺으려고 했다. 진령군의 아들 김창렬은 무관(無冠)의 처지임에도 정3품 당상관 관복을 입고 조정에 나갔으며, 그에게 아첨하고 친분을 맺으려는 대신들이 적지 않았다.
무녀가 조선의 최고 권세가가 되어서 재정을 탕진하고 국정의 질서와 기강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사간원 정원 안효제, 장령 지석영(종두법을 소개한 그분 맞다) 등이 사직의 보존과 안정을 위하여 진령군을 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직언을 한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위리안치(가시로 울타리를 친 집에 가두는 형벌)라는 유배형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고종은 목숨 걸고 진언을 올린 지석영을 가리켜 '흉물스런 저 지석영'이라며 모욕을 서슴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술세도(巫術勢道)의 시대였다.
진령군의 세상은 12년 동안 이어졌다. 그녀의 세도에 치명상을 가했던 이들은 (고종도, 민씨도 아니라) 일본이 추진한 갑오개혁의 주도 세력으로 정계에 부상한, 개화파 정부였다.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 세력은 만악의 근원인 진령군을 잡아가두고 그녀가 머물던 신당을 때려부수었다. 진령군은 그동안 모았던 모든 재산을 바치고서 목숨을 구했지만 남은 여생을 초라한 오막살이에서 보내야 했다.
무녀의 손에 놀아나서 재정과 국정이 붕괴된 지난날 구한말 조정과, 최순실이라는 사람의 입김에 좌지우지되는 오늘날 한국 행정부는 그다지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
각하, 더이상 추한꼴 보이지 마시고 최소한의 염치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내려 오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