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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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매혹은 있는데 한 방은 없고, 화려함은 있는데 중량감은 없다고 느껴지는 소설이다. 기억을 상실한 흥신소 직원이 소수의 단서만을 가지고 과거를 추적하는데 그렇게 찾아낸 비시 정권 치하에서의 삶이란 무이자, 불확실이자, 안개라는 결과는 묘한 여운이 없지는 않으나, 어딘가 개운찮은 느낌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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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이 시기 김승옥 소설들은 남성주인공들이 '순수한 세계'에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로 진입하는 길목에 여성들이 걸림돌처럼 놓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 시절 그녀들은 착하고 고우며 총명한 누이이거나 친구였지만, 남성연대의 세계에서 여성들은 성적 대상으로 환원되고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는 자본의 교환물이 될 뿐이라는 것을 남성주인공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이때 여성 훼손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바로 '고백'이라는 장치다. 음모의 일원이 되었지만 이들 주인공에게는 한 줌의 죄의식이 남는다. '나는 무진에서 서울로 올라왔고, 다락에 숨어 지내던 폐병 환자에서 거대 제약 회사의 간부가 되었지만 모든 걸 잊고 남성적 힘의 질서에 완전히 동화된 것은 아니다. 나는 무위의 젊은 날을, 무진을, 안개를, 죽은 술집 여자를, 광기를 기억한다.' 남성주인공들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여성을 희생양 삼았다는 죄를 고백하는 주체'라는 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고백하는 내면'이 그의 죄의식 자체에 독자들로 하여금 감정이입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자아낸다. 윤희중은 무력했던 청년에서 성공한 회사 간부가 되었다. 이렇게 극적으로 변화한 외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소설을 관통하면서 변함없이 보이는 주인공의 내면 풍경을 따라가게 되는 것은 그가 자신의 변모에 대해 느끼는 죄의식과 거부감을 '고백'함으로써 일관된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속됨을 바라보는 자이면서 스스로도 또 속절없는 속물이라는 사실 사이에, 힘의 남성연대와 여성으로 대표되는 약자들의 세계 사이에, 즉 무진과 서울 사이에 끼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이 분열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 그 안에 계속 머무르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 분열은 고통스럽지만 또한 남성주인공이 자기동일성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윤희중은 기만적인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가 기대고 있는 분열이라는 조건 자체에 나르시시즘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셈이다."

 

ㅡ 강지윤의 "감수성의 혁명과 반(反)혁명' 중에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은 올해에 나온 책들 중에서 유난히 인상적인 공저이자 다른 한편으로 뒤늦게 이곳에 도착한 저서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적, 젠더적인 독법으로 한국 문학 다시 읽기라는 과업은 (적어도 대중적인 서점가의 영역에만 한정하자면) 조금 늦게 시작된 감조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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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11-20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그렇습니까 ? 요 책 한 번 사서 봐야겠군요..

수다맨 2018-11-21 13:20   좋아요 0 | URL
여러 여성 연구자들의 글을 모은 공저인데 개인적으로는 수준의 편차가 조금은 있다고 느꼈습니다.
일례로 허윤이라는 연구자는 손창섭의 소설에 나타난 이성애 가족관계의 분열과, 비혈연 공동체에 주목하는 글을 썼는데 논지에는 충분히 공감했지만 단편에(만) 착안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저는 손창섭 소설의 전모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의 장편들(인간교실, 삼부녀 등)을 검토해야 하며 이러한 작품군을 경유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문제의식과 주제 도출의 과정이 좋다고 하더라도) 연구자가 작가의 사상적 근본을 심도 있게 파악하지 못했다고 보거든요
그럼에도 다수의 글들이 ‘한국 문학을 페미니즘적/젠더적 관점에서 재독하고 비평하고 이해하기‘라는 목표를 일관되게 지향하고 있기에 상당한 가치와 의의를 지닌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미동 사람들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2
양귀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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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위적인 형식실험도, 대의를 추구하려는 투사적 의지도, 독특한 주제를 지향하려는 작가적 의도도 없다. 그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과 저마다의 사정이 있으며 삶이란 그러한 것들을 겪으면서 이어나가는 발걸음‘일 뿐이라는, 인생사의 이치를 알아본 사람의 체념적 정조가 문맥마다 아로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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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여름 2018 소설 보다
김봉곤.조남주.김혜진.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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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 믿음의 문제(김혜진)와 가장이 사라진 뒤의 가족 풍경(조남주)을 다루는 작품들은 읽을만 했는데 동성애자의 이성애서사(김봉곤)와 미래라는 말의 의미와 한계를 점검하는 글(정지돈)은 갑갑한 기분으로 읽었다. 나로서는 작가의 성 정체성과, 창작 기법이 도드라진 글은 다소 아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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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파도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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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수맛은 나쁘지 않은데 국수맛이 떠름한 소설이다. 사이비 종교 집단과 핵발전소를 유치하려는 집단을 그려내는 능력은 괜찮은 반면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선을 형상화하는 솜씨는 허전하다. 차라리 로맨스의 비중을 줄이고 사회문제만을 돌올하게 부각시키려고 했다면 더 재미지게 읽혔을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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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10-13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비유 좋은데요. 육수 맛은 나쁘지 않은데 국수 맛은 떠름한 소설...ㅎㅎ

수다맨 2018-10-14 12:32   좋아요 0 | URL
작가가 애초부터 스릴러(만) 쓰기를 목표로 삼았다면 이 작품의 완성도는 상당히 높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초반부가 심심하기는 한데 후반부에서 진실이 밝혀지는 부분은 꽤 재미있었거든요.
그런데 정치 스릴러에 로맨스 서사를 삽입시키니 전체적인 만듦새가 좀 이상한 소설이 되었습니다. 부언하면 특정 도시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와 부정부패의 실상을 밝혀 나가는 과정은 박진감이 넘치는 반면에 주인공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저에게는 별다른 공감과 울림을 주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