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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날개 달린 것
영혼의 횃대에 걸터앉아,
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네
결코 그칠 줄 모르고,
모진 바람이 불 때 더욱 감미롭고,
참으로 매서운 폭풍만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따뜻이 감싸 주었던
그 작은 새를 당황하게 할 수 있을 뿐.
나는 아주 추운 땅에서도,
아주 낯선 바다에서도 그 노래를 들었네,
허나, 아무리 절박해도, 희망은 결코,
내게 빵 한 조각 청하지 않았네.
- 에밀리 엘리자베스 디킨슨의 희망은 날개 달린 것 -
나무를 버팀목 삼아 살아 가던 나뭇잎들이 땅 위에 떨어져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늘에서 눈으로 내려오더니 막상 세상에 떨어질 때 모양새는 비가 되었다.
계절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곳에 집이 있다는 것은 도시에 살면서 우연히 얻어지는 축복이다. 삭막한 아파트 단지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산이 있다는 것에 언제부터인가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면서 세월과 나이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산으로 떨어진 눈은 비가 되지 않고 본디 모습대로 눈이 되어 산에 쌓인다. 산은 무엇이든지 본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지켜주는 넓은 아량을 지녔다. 하루종일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진 산을 바라보며 아련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낮은 곳에 서서 그 산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봄 날....어느 새벽녁
불면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 시간, 창문을 열면 온 세상에 아카시아 향이 춤을 춘다. 벚꽃이 꽃비를 뿌리며 지나간 자리에는 아카시아 향이 너울거리며 퍼져 나간다.
그리고 봄이 지나 여름이 오면 산은 누구보다 열정적인 모습으로 마음껏 자기를 내세워 보인다. 마치 이제 대학에 입학한 재기발랄한 신입생을 보는 듯하다.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무언가에 몰입한 20대의 모습을 나는 여름 산에서 만난다.
그 열정이 지나간 자리에는 허무와 깊은 성찰이 남는다. 하지만 가을 산은 쓸쓸하면서도 포근하며 성숙의 단계를 거치면서 깊어지고 아름다워진다. 가을산이 그러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겨울 산 앞에 마주섰다.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틈히 꺼내 읽었다.
"언어를 바꾸면서 나는 내 인생의 한 시절과 결별했다" 모국어인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사유한 모든 것을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옮겨놓은 샤르트르 이후 프랑스 최고의 지성이라는 작가 소개가 눈에 띈다. 가을에 이 책을 몇 장 뒤적거리다가 그대로 책꽂이 버려두었는데 오늘 이 책이 갑자기 내 눈에 들어왔다.
특히 목차와 상관없이 마음에 와 닿는 제목을 찾아 읽으면 된다.
순서를 정해 읽어야 하는 것보다는 자유로움이 느껴져서 좋다.
고통을 자제하면서 억지로 좋은 인상을 남기려 하는 사람들은 혐오스럽다. 눈물이 뜨거운 것은 고독 속에서 뿐이다. 죽는 순간 친구들에게 둘러싸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마지막 순간을 과감히 맞이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눈물이 뜨거운 것은)
-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13쪽에서 -
고통이란 외부의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정신적 고독의 상태이므로 비교는 아무런 의마가 없다. 그러나 고통을 혼자 겪는다는 사실에는 큰 장점이 있다. 만약 인간의 정신적 고통이 얼굴에 충실하게 나타난다면, 즉 내부의 괴로움이 외부로 옮겨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 그래도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는가 ?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고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 만일 감정의 강도가 표정에서 그대로 읽힌다면,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고통의 척도)
-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20쪽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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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로 인해 가까운 사람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에밀 시오랑은 책에서 고통의 크고 작음을 나누는 일은 불가능하며, 인간은 각자가 절대적이고 끝없다고 믿는 자신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각자가 느끼는 고통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짐작할 뿐이다.
아주 작은 상처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져 우리 존재 전체를 피투성이로 만들 때, 그때서야 고통이란 혼자 겪는 것이기 때문에 밖으로 들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 쌓여 있는 고통의 독성이 화산처럼 분출한다면 온 세상을 중독시킬 만큼 충분하지 않겠는가 ?
-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21쪽에서 -
결국 상처 받을 수 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더 큰 아픔과 상처는 막을 수 있었을텐데...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깨닫게 된다.
슬픔은 넘쳐 흐르는 상태가 아니라, 서서히 가라앉아 사그라지는 상태이다. 대개 슬픔 한숨이라고 말하지 슬픈 고함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열정을 지나치게 소비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깊은 허탈감이 각인된 체념과 상실감만이 남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성취하고 나면 우리는 슬퍼진다. 얻었다기보다는 잃었다는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슬픔은 삶이 탕진될 때마다 생긴다. 잃는 것이 클수록 슬픔의 정도가 심하다.
-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72쪽에서 -
깊은 심연 속에 갇혔다가 다시 나온 기분이랄까 ?
시간 속에서 모든 일들이 과거의 기억이 된다면 지금 받은 상처의 빛깔은 좀 더 옅어지게 될까 ?
차분하게 읽으며 생각을 정리하기 좋은 책이다. 하지만 죽음, 우울, 슬픔, 절망, 좌절 등 대체적으로 어두운 감정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라서 읽고나면 좀 더 슬퍼진다.
하긴 슬플 때 차라리 슬픈 영화를 보며 한바탕 울고나면 속이 후련해지듯이...오히려 이런 책들이 마음의 평화를 주는데는 더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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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의 국내 번역 책을 구입하는 중이다.
소립자, 공공의 적들, 어느 섬의 가능성, 투쟁 영역의 확장, 지도와 영토... 분량상 가장 가벼워 보이는 투쟁 영역의 확장에 먼저 도전해 본다.
마음은 소립자를 먼저 읽고 싶으나, 우엘벡의 첫 번째 소설이라고 하니 먼저 투쟁 영역의 확장을 읽어 보기로 했다. 소립자를 읽기 전에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늘 생각하지만 작가들은 계속 책을 쓰고, 출판사들은 계속 책을 만들어 내고...독자들은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책들 중에 좋은 책을 찾아서 읽어야 하는 즐거운 고통에 빠져 산다.
당분간은 조용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
고통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책에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