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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온다 리쿠는 여러 장르의 소설을 썼다. 청춘소설, 성장소설, 미스터리, 판타지, SF, 로맨스, 호러. 그 중에는 특정 장르에 넣기 애매한 글들이 많다. 미스터리 구조를 띤 성장소설, 호러 냄새가 풍기는 판타지식으로 여러 장르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온다 리쿠의 글을 다 읽은 것은 아니니 단정적으로 말하는 건 무리지만, 어쨌든 내가 읽은 그녀의 소설은 그랬다.
그런 다양한 작품들의 공통점은 미스터리다. 어떤 쟝르의 글이건 미스터리 냄새를 풍긴다. 나는 온다 리쿠의 매력은 이 미스터리 구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격 추리라 부를 수 있는 작품을 쓰기를 바랐다. 탐정이 관련자들을 모아놓고 '네가 범인이지?' 라고 소리치는 유형의 고전적인 추리물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수수께끼 풀이에 집중하는 글을 보고 싶었다. 형사처럼 진짜 탐정이라 불릴 만한 사람이 등장해서 진실을 찾아내는 글을 읽고 싶었다.
유지니아는 2006년 제59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다. 상의 성격상 본격추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헌데 온다 리쿠는 역시 온다 리쿠였다. 기대와 달리 유지니아는 수수께끼풀이형 추리물은 아니었다. 물론 사회파도 아니었다. 유지니아에서 범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글을 따라 읽어가며 즐기느라 누가 범인인지 궁리하지 않아서 그렇지 범인을 추리하며 읽었다면 범인의 정체는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범인의 정체를 두고 독자와 머리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다. 글이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범인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다. 중요한 건 누가가 아니라 왜와 어떻게인 것이다.
유지니아는 할머니의 생일 잔치에 배달된 술과 쥬스를 마신 일가족이 몰살하고, 놀러온 동네 주민과 아이까지 독살당한 희대의 사건이 배경이다. 이 글은 인터뷰 형식의 글이다. 사건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누가 관련자들을 인터뷰 하면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나가는 형식을 띠고 있다. 헌데 화자의 정체가 불분명하고,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본 이야기가 중간에 끼어 들어가 있는 등 구조가 복잡하다. 여러 사람이 들려주는, 미묘하게 엇갈리는 과거 회상이 글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여름 만큼이나 꿉꿉하면서 동시에 매혹적이다. 35도가 넘는 한낮에 읽어서 그런지 끈적한 느낌이다.
온다 리쿠의 매력이 잘 묻어나는 글이었다.
덧.
난 기(奇)가 일본문화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숨은 맛이라고 생각해요. 일그러진 것, 기분 나쁘고 섬뜩한 것을 한 발짝 물러나서 감상하는 거예요. 아아, 기분 나빠, 불쾌해 하고 눈길을 돌리지 않고, 냉정하게 관찰하고 미의 하나로 즐겨요. 재미있어 해요. 흥미로운 심리죠. 기 라는 글자에는 괴이하다, 흔치 않다는 뜻이 있지만, 난 이 글자에서 그로테스크한 유머가 느껴지더군요. 자학적인 해석, 너무나도 싸늘하고 무관심한 시선 같은 것이.
유지니아에서 인용했습니다.
저는 일본 소설에서 종종 느껴지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병적인 분위기? 음습한 분위기? 변태스런 분위기?
정상이 아닌 것 같고, 배배 꼬인 변태스런 어떤 것들이 불편했습니다.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을 가끔 했었는데 유지니아의 저 구절에서 그 답의 일부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유지니아가 병적이라는 말이 아니고, 저 구절이 인상 깊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삶의 통찰 같은게 느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