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눈물 -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제임스 엘킨스 지음, 정지인 옮김 / 아트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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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눈물』(제임스 엘킨스 , 정지인 옮김, 아트북스)

그림을 보고 울어 본 적 있는지?

이 책은 그림을 보고 울어 본 적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나는 한 번도 눈물을 보고 울어본 적은 없다. 그림이라는 실체보다 문학적 상상력이 바탕되고 상상속에서 이미지들이 일어나 활동할 때야 눈물을 흘린다. 책을 보면서 운 적은 있다는 이야기다. 그림을 보고 왜 울까? 우는 심경은 각양각색이다. 그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그림을 보면 울게 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미술사학자의 글이 바로 『그림과 눈물』(제임스 앨킨스 , 정지인 옮김 , 아트북스 , 2007)이다.

요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미술사학자들은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한다고 설파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술사학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눈물을 흘린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시간과 관련된 경우가 첫째이다고 그림 속의 존재감 때문에 우는 것이 두 번째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존재의 부재 혹은 종교의 부재 때문에 울게 된다고 제임스 앨킨스는 이야기한다.

위의 언급된 사실 때문에 울게 되는 것이 명확하지만 르네상스를 지나오면서 회화가 예술의 지위로 격상되었고, 보고 느끼고 감동받는 대상이 아니라 분석하고 탐구해야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림은 눈물을 흘려야 하는 감상의 대상에서 추방된다. 지적인 영역으로 유폐된다. 지적인 영역에서는 눈물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림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

그림을 본다는 행위는 그림과 대화를 하고 소통을 한다는 의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술 작품을 한 번 스쳐가면서 보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오랜 시간 그림 앞에서 그림을 감상한다는 행위가 그림을 오래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술사가나 화가들이 설명해둔 것들 혹은 미술 이론들을 대입해서 확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림을 보면서 보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후반부에 종교의 부재를 설명하는데 시간과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임스 앨킨스의 견해에 동의를 할 수 있지만 부재를 설명하면서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와 연관하는 것은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은 그림을 볼 때 울지 못한다는 이야기로 확대 해석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보고 눈물 흘리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소토잉라고 의역해 본다면 눈물을 흘리길 원한다면 몇 가지 방법을 추천 할 수 있다. 젱미스 앨킨스는 여덟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 미술관에 혼자 가라
둘째 , 모든 것을 보려고 노력하지 마라
셋째 , 집중력 분산을 최소화하라
넷째 ,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라
다섯째 , 완전한 주의를 기울여라
여섯째 , 스스로 생각하라
일곱째 , 진정으로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보라
여덟째 , 충실하라

그림과 대화하는 방법인데 가만히 보니 연애를 하라는 것과 같아 보인다. 그림과 연애를 하면 위에 언급 된 그림을 보고 우는 세 가지 이유가 아니어도 다양한 이유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굳이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흐릴 필요는 없다 눈물이 나면 흘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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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해항로 민음의 시 161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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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해항로』(장석주 , 민음사 , 2010) 에 대해서 말하기




내가 아는 장석주 씨는 『강철로 된 책들』의 저자 장석주 씨다. 시인 장석주이 글보다 수필가 장석주 혹은 서평가 장석주의 글에 더 익숙하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장석주가 시인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몽해 항로』(장석주 , 민음사, 2010)라는 시집이다.




그의 시집 첫머리에 스스로 ‘한 줄의 기적에 닿지 못하고 사산되는 문장들이 태반이다. 이 시집은 불임과 사산으로 사라진 문장들을 기리는 레퀴엠’이라고 썼다. 생각 속에서 언어 기호의 겉옷을 입지 못하고 생각 속에서 생몰(生沒)하는 것은 말을 할 수가 없다. 태어나지 못하고 떠도는 영가는 만신의 도움을 받아야만 세상에 목소리라도 전할 수 있다. 시의 몸을 입지 못한 것은 시인의 손끝에서 시의 몸을 갖출 수 있길 바래보는 것 밖에 도리가 없다. 이런 의미로 시인들은 언어의 만신이다. 만신은 시와 세계를 잇는다. 제 몸이 부서지고 헐거워져 쓰일 수 없을 때까지 감내한다.




장석주의 시편들을 읽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의 시를 통시적으로 살펴 볼 수는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한 권 속에서 드러나는 생각의 편린들을 겨우 전전긍긍하며 따라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시를 읽는 것은 독자들의 몫인 듯하다. 이 언사는 매번 시집을 읽을 때마다 거르지 않고 하는 말이다. 이 말을 언제가 되어서야 그만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나는 그만큼 시에 대해서 남루하고 비루해지는 내 자신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나 안타까운 마음도 고만고만하다.




『몽해항로』의 시편은 대체적으로 짧다. 짧으면서도 노력한다. 자서(自序)에서 밝혔듯이 ‘한 줄로 압축할 것 한 줄은 전대미문의 문장으로 표현할 것’이라고 쓴 것처럼 짧은 문장 안에 긴 성찰이 들어가 있는 시편들이 제법 눈에 띤다. 생경한 표현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둘 것인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 당신이 내게 기르라고 맡기고 내가 젖동냥해서 기른 그믐 (그믐 눈썹)’이 가까워 오면 피 냄새가 훅 하고 끼치고 ‘내 몸이 그믐이다. 가득찬 슬픔으로 가득하다.“(그믐)고 쓴다. 바다를 보고는 ’아련한 가을비 속에 죽은 고모 이마보다 찬 바다‘(협재 바다)라고 쓴다. ’구름은 만삭이다. 양수가 터진다.‘(소나기)라고 쓴다. 사막을 보고는 ’유엔 난민 지위를 얻은 /모래들의 취락 , / 고요라는 짐승들의 집단 서식지. / 뼈들의 명상센터 / 시간의 블랙홀‘(사막) 이라고 써서 가려진 사막의 이면을 끄집어낸다. 아들에게 ’세상은 꽃놀이패가 아니(바둑 시편)’라고 말하고 임산부의 둥근 몸을 보고 ‘ 한 몸 안에 두 생명이 동거하는 / 저 이쁜 몸 , 저 무덤이 피안으로 가는 출구’(저 여자!) 라고 쓴다. 소리에 대해서도 ‘침묵은 소리의 극명한 태초 / 소리의 피안이다./ 저 침묵에 귀의함으로써 / 소리는 소리의 생을 다한다.’(소리박물관) 고 쓴다. 어떤가? 의미는 소멸되지 않고 문장 속에 영면했는지 모르겠다. 혹자는 그러하지 못하다고 할 것이고 혹자는 영면했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물론 후자다.




이렇게 쓰다 보니 시인은 속세에서 피안을 살핀다. 피안이라는 염원을 가진 시인은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미 세상이 피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슬픈 사람이다. 피안인지 속세인지도 구별하지 못하고 죽을동살동 모르게 사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세상의 진실을 말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시인은 글을 써 사람들에게 전할 뿐이다. 자신이 천형(天刑)으로 짊어진 책무를 우선 해 두는 것이다. 가수는 노래를 부른 다음에야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고 , 시인은 시를 쓴 다음에야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다.




시인이 보는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살기 좋은 곳도 아니다. ‘다리 밑에서 동네 남정네들이 모여/ 개를 잡고 있다. / 무자비했다. 개 비명이 우레 같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구나!’(초복) 라고 탄식한다. 마지막으로 뱉는 한마디 ‘이런 세상을 피안인 듯 살았구나!“ 라고 탄식한다. 세상은 복날 개패 듯이 맞아가며 사는 세상이지만 결국 이런 세상도 피안 (너머의 세계 , 현실이 아닌 세계로 알고 살았다.)으로 알고 살았다고 쓰고 결국 아들에게 ’아들아, 사는 건 / 꽃놀이 패가 아니더구나”(바둑시편) 라고 고백한다. 또한 삶은 무늬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욕망과 어리석음이 얼룩이 되었다. 시인 또한 얼룩이 되었지만 얼룩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얼룩과 무늬 참고 하시길) 쓴다.




10 1 31 유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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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토끼 차상문 -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
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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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토끼 차상문』 (김남길 , 문학동네 , 2010) 에 대해서 말하기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읽을지 말지 생각이 좀 많았다.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 글쎄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작가의 사진을 보는 순간 그냥 읽어야 될 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확신이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확신만큼 맹신을 요구하는 것도 없다. 무조건 읽는다.

책의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책의 주인공은 토끼 영장류‘차상문’이다. 뭐 그냥 간단히 토끼의 모습을 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상한 나라 엘리스에 등장하는 그 토끼보다야 못하지 않은 수학에 상당한 조예가 깊은 ‘천재’라는 명사의 수식을 받는 토끼 인간 ‘차상문’이다.

천재들은 고독하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여기 등장하는 차상문도 조금 고독하다. 약간 미쳐버린 것 같기도 한- 범인(凡人)이 보면 비범(非凡)한 자들이 미쳐 보이거나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먼저 전재로 생각할 필요는 당연히 있다. - 모습이다. 세속을 벗어나 탈속적인 물음을 연구한다. 차상문의 예를 보라 유학을 가고 최연소 교수가 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어느 순간 문명 속에서 사라진다. 다른 작은 문제들을 풀고 난 후 마지막 물음일지도 모르는 차상문이 풀어야 하고 우리 인간에게도 던져야 할 질문인데 인간이라는 동물이 진화의 최종 단계인가 하는 물음인데 , 차상문의 존재가 이미 인간의 진화 최종단계를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흔히 우리가 보고 열광하는 X맨들이나 뮤턴트X - 미국에서 방송되거나 영화화된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다 - 의 개별화되고 특화된 능력을 상기해볼 때 인간 이후의 존재가 없으리라는 속단은 내리기 힘들다.

차상문이 고민하는 것은 과거의 것도 아니고 현재의 것도 아니다. 오로지 가까운 미래이든 먼 미래이든 미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물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수학의 천재적 재능은 철학의 논리로 변하여 생각을 논리화하고 철학의 결론을 도출하는 메커니즘으로 사용된다. 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가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논리적 가설이 되기 위해서는 증명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진화의 마지막인가? 나는 인간이니까 아직 그 답을 섣불리 내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토끼 영장류 같은 것을 인정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토끼 영장류를 들고 나와 이야기한 것을 문학가들의 비유와 은유로 둘러쳐진 경고라고 생각해볼 수는 있다. 도태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영장류의 등장은 어쩌면 인간의 도태를 말해볼 수도 있겠다. 약육강식의 간단한지만 자명한 생존의 법칙을 생각해보라 새로운 영장류가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나 악어 사자 기타 등등의 육식의 습성을 가진 족속들이라면 인간도 그들에 의해 사육되고 음식화 되어 먹히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 자명하지 않을까 싶다. 너무 비관적인 상상력의 작동인가?

그렇다면 고민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영장류가 출현하지 않게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함께’라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싶다.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공존이라는 것은 서로가 일정부분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보면 쉽다. 하기사 인간이라는 족속이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싶다. 생각해보자 하느님의 독생자를 믿는다는 종교도 , 하느님을 믿는다는 저 사막의 한 종교도 서로의 이익을 위해 충돌하고 멸절을 목표로 칼을 들이대면서 성전을 선포하지 않았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자를 따르는 자들은 그나마 그 정도가 심하지 - 심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내 기억으로는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리를 들어 본 기억은 없으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먼지만큼도 아니기 때문이다. - 않다 난데없이 종교 이야기가 나온 것은 차상문의 만행의 연원을 살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 바람 때문이다.

가끔 소설을 읽다가 보면 소설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소설의 이면이 틀림없을 것이지만 알 수 없는 이명증에 시달리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참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자꾸 그 들리는 소리에 현혹되어 되지도 않는 말을 꾸며 웅얼거리니 비오는 날 중이 염불하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 말하면서도 득의만면하게 확신의 실타래 끝머리라도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허공에 대고 웅얼거리고 있어서 미친 것이 되어가지 않나 싶은 문득 겁나지만 이것을 멈출 수 없어 나는 슬프다.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시베리아 샤먼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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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인생
이청준 지음, 한향란 사진 / 열림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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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인생』 (이청준 , 열림원 ,2004)에 대해서 말하기






오늘 아침 반찬으로 숙주나물을 먹었다. 숙주나물은 녹두나물이라는 정식명칭을 가지고 있으면서 신숙주의 일화와 연관되어 숙주나물로 불리는 나물이다. 사실 녹두냐 숙주냐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나물을 무치려면 숙주가 삶겨야 하고 참기름도 좀 들어가야 하고 파라든지 깨소금이라든지 다양한 양념이 들어가서 숙주만이 가지고 있던 맛과는 전혀 다른 맛을 낸다. 인생이란느 것도 처음에는 순정한 것이었겠으나 다양한 양념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맛을 내는 나물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생뚱맞은 숙주나물 이야기를 끌고 왔다. 물을 마시지 않으려는 말을 물가로 끌고 오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다.




‘인생’이라는 낱말은 그 낱말 사이에 많은 주름을 가진 낱말이다. 혹은 서랍이라고 해도 좋다. 주름과 서랍 속에는 한 인간이 인생을 살면서 겪은 사건들이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서 정렬되어 보관된다. 노년의 사람에게 주름이 있는 것은 많은 이야기를 몸에 기억을 하고 있는 때문이다. 이청준의 인생은 많은 사람들과 많은 사건들이 등장한다. 살아온 세월이 많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노년의 작가는 인생을 살면서 만났던 “인생의 갈피마다 선명한 자국을 남긴 사람들”을 기록한다. 많은 이야기들이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 ‘함께 살아가기’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의 자루 안에 다양하게 펼쳐진다. 많지 않은 분량의 글들이 배열되어 있는 행간을 보면서 그저 마구 읽어버리기엔 아쉬운 것들이 행간 사이에 숨어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여백이 있는 글들이다. 여백 속에서 많은 말들을 하고 글로는 최소로 축약해서 이야기한다. 많은 인연들이 거론되고 불려나왔다가 물러갔다. 나는 이러한 인연들을 아직 가져보지 못해 안타까웠고 부끄러웠으나 아직 인생과 세월의 주름 하나도 생기지 않았으므로 조급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나는 조로증 환자처럼 조급하게 이미 늙어버리기를 바라고 있다.




산문집을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말해주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에는 약간의 시간차라고도 할 수 있고 이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 듯하다. 이청준의 인생은 한 권의 수필인데 - 두 가지 의미를 다 읽어보자 이청준이라는 사람의 인생이 한 권의 수필이라는 뜻도 있고 ,『이청준의 인생』이라는 책이 한 권의 수필집이라는 의미도 함께 넣었다 - 예전에 수필을 교술(敎述)이라고 했던 것을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교술은 ‘가르치기 위해서 쓰는 글’이라는 의미 정도만 이해하면 될 듯한데 이청준의 글이 그러하다. 신변잡기의 글이라기보다는 교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글들로 지면을 채웠다.




인상 깊은 구절을 한 구절 쯤 옮겨 보자면




공간과 장소의 서로 다른 의미에 새삼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드링 있다. 이를테면 서울시 당국자들이 도로율을 높이기 위하여 무교동 슬집 ( 도시의 한 명소로서 )들을 마구 부숴댈 때 이들은 서울의 도시계획이 지나친 공간 개념에 집착하여 장소 개념을 소홀히하고 있다는 불평을 하는 따위가 그런 것이다. 이때 말하는 공간이란 대개 시간과 더불어 물체계를 형성시키는 기본 형식으로서의 물리적 개념임에 비해 , 장소는 사람이나 물건이 머물러 있는 곳 , 이를테면 우리 인간들의 생활이나 이해관계가 침투해 들어가 있는 지리학적 개념의 명사라 할 것이다.




되풀이 말하면 공간은 아직 윌의 삶의 의미가 상관되어 있지 않은 물리적 절대 개념의 용어임에 반하여 , 장소는 그 공간을 이용하여 우리의 삶을 관계시키고 영위해 나가는 일종의 상대적 응용 개념의 용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따라서 장소는 바로 우리들 생활과의 관계 용어요 하나의 장소가 이름을 얻어 생겨나기까지는 반드시 그곳에 그만한 삶의 집적(集積)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장소(이제는 아마 명소라고 말해도 상관없을 터이다)가 많을수록 그 장소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생활과 정신이 그만큼 윤택하고 세련되어진다는 것도 바로 그 장소의 그런 생성의 과정 때문일 터이다. 그리고 그래서 그 장소들은 바로 한 민족사회의 문화나 문명의 증거가 될 수도 있을 터이다. 내력 깊은 유적지나 소문난 풍속 소문난 음식의 고장들 , 특산물의 고을들이 모두 그 지방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의 한 양식과 증거가 되고 있지 않은가?




『이청준의 인생』(이청준 , 열림원 , 2004)

더 많은 풍속의 장소를 위하여 중에서 99쪽~101쪽




공간과 장소라는 낱말의 결을 잘 읽어 낸 사유의 결과라고 해도 좋은 문장이다. 공간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지만 장소는 기억이 내려앉아 먼지의 더깨를 감내해야 화학반응을 일으켜 전혀 다른 장소로 태어난다. 공간이 불사조가 부홯할 때처럼 재가 불타 죽음을 맞이하고 그 재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소멸되었다. 깨어난다고 장소가 될 수 있을까? 공간을 소멸과 생성을 거듭해도 그저 공간일 것만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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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는 세월
박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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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는 세월』 (박진규 , 2010 , 문학동네) 에 대해서 말하기

나는 『내가 없는 세월』을 읽는다. 내용을 읽기도 전에 ‘나’와 ‘세월’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주체자로 가명하고 명징하게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다. 모든 것이 나로 인해서 시작되고 나라는 명명이 없으면 세상은 인식의 범주에 들지도 못한다. 나의 존재가 있어야 세상이 존재한다. ‘나’라는 낱말이 가지는 아우라는 거대하기만 하다. 거대한 우주는 사람의 눈을 통해 전체를 파악할 수 없고 너무 작은 나노의 세계도 사람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극대와 극소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엉켜서 서로의 꼬리를 무는데 그런 존재를 명명하는 것이 ‘나’라는 단음절 낱말이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이야기했던 것으로 혹은 노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월은 거대한 것이 집적되어 만들어진 것이지만 타율성을 벗어날 수 없는 천형을 옷으로 해입은 낱말이다. 세월은 시간의 집적(集積)이다 시간은 거대하고 항구적이기도 하고 영속성을 가지기도 한 것이다. 인간이 멸종되더라도 시간은 살아남아서 유유히 흐를 것인데 이렇게 시간이 뒤로 내놓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나가 살아온 세월이 되는 것이다. 한 세월은 시간을 사려 넣고 있지만 살아지는 것에 불과한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는 낱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젖어드는 상념은 낙엽처럼 마르기만 하다.

지금은 2010년이다. 1988년부터 시작된 열살된 아이의 삶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고 그 아이와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명옥 , 신혜 미령 , 윤희의 삶들이 나열되고 교차된다. 지금 이 순간이 2010을 지나 2023년까지 이어진다. 가보지 못한 미래는 디스토피아적이다. 던적스럽고 참담하기는 하지만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은 겨우겨우 견디는 것이고 오지 않은 미래는 견디지 못해 주저 않은 것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어쩌면 오지 않은 미래가 지금 현재보다 좀 더 극명하고 명징하고 솔직한 미래다.

박진규가 가지고 있는 환상성은 ‘수상한 식모’에 이어 ‘최씨 집안의 특이한 가계 유전’이라는 설정으로 환상성을 이어가는데 바구미 여사가 그랬고 신혜와 윤희가 그러하다. 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지난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직 오지 않을 미래를 동원하여 서술된다. 어떤 문장으로 박진규의 『내가 없는 세월』을 설명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명징한 문장을 하나 발견했는데 ‘1988년부터 2023년까지 이어지는 그녀들의 살모가 욕망 그리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카피다. 이 보다 적당한 말을 찾으려고 해봐도 귀찮아지는 일이다. 간명하게 모든 것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문장이다.

내가 없는 세월은 미령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들의 이야기다. 미령의 삶은 그녀들의 삶에 녹아들어 희석되는데 그녀들의 삶을 좆아보면 미령의 삶을 시간별로 구성할 수 있다. 내가 없는 세월이란 나는 잘 모르겠지만 타인의 삶 속에 녹아든 개인의 삶이라고 해두면 너무 이상한가? 그럼 이렇게 말해보기로 한다. 미령이 출연한 ‘눈물의 에이프런’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이 관련된 일에 불과하다. 처해진 상황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냥 소설을 이야기로 좀 읽으면 안 되나 몹쓸 습관은 그저 즐겨도 좋은 읽기에 딴지를 걸듯 글을 쓴다. 치매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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