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해항로 민음의 시 161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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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해항로』(장석주 , 민음사 , 2010) 에 대해서 말하기




내가 아는 장석주 씨는 『강철로 된 책들』의 저자 장석주 씨다. 시인 장석주이 글보다 수필가 장석주 혹은 서평가 장석주의 글에 더 익숙하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장석주가 시인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몽해 항로』(장석주 , 민음사, 2010)라는 시집이다.




그의 시집 첫머리에 스스로 ‘한 줄의 기적에 닿지 못하고 사산되는 문장들이 태반이다. 이 시집은 불임과 사산으로 사라진 문장들을 기리는 레퀴엠’이라고 썼다. 생각 속에서 언어 기호의 겉옷을 입지 못하고 생각 속에서 생몰(生沒)하는 것은 말을 할 수가 없다. 태어나지 못하고 떠도는 영가는 만신의 도움을 받아야만 세상에 목소리라도 전할 수 있다. 시의 몸을 입지 못한 것은 시인의 손끝에서 시의 몸을 갖출 수 있길 바래보는 것 밖에 도리가 없다. 이런 의미로 시인들은 언어의 만신이다. 만신은 시와 세계를 잇는다. 제 몸이 부서지고 헐거워져 쓰일 수 없을 때까지 감내한다.




장석주의 시편들을 읽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의 시를 통시적으로 살펴 볼 수는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한 권 속에서 드러나는 생각의 편린들을 겨우 전전긍긍하며 따라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시를 읽는 것은 독자들의 몫인 듯하다. 이 언사는 매번 시집을 읽을 때마다 거르지 않고 하는 말이다. 이 말을 언제가 되어서야 그만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나는 그만큼 시에 대해서 남루하고 비루해지는 내 자신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나 안타까운 마음도 고만고만하다.




『몽해항로』의 시편은 대체적으로 짧다. 짧으면서도 노력한다. 자서(自序)에서 밝혔듯이 ‘한 줄로 압축할 것 한 줄은 전대미문의 문장으로 표현할 것’이라고 쓴 것처럼 짧은 문장 안에 긴 성찰이 들어가 있는 시편들이 제법 눈에 띤다. 생경한 표현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둘 것인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 당신이 내게 기르라고 맡기고 내가 젖동냥해서 기른 그믐 (그믐 눈썹)’이 가까워 오면 피 냄새가 훅 하고 끼치고 ‘내 몸이 그믐이다. 가득찬 슬픔으로 가득하다.“(그믐)고 쓴다. 바다를 보고는 ’아련한 가을비 속에 죽은 고모 이마보다 찬 바다‘(협재 바다)라고 쓴다. ’구름은 만삭이다. 양수가 터진다.‘(소나기)라고 쓴다. 사막을 보고는 ’유엔 난민 지위를 얻은 /모래들의 취락 , / 고요라는 짐승들의 집단 서식지. / 뼈들의 명상센터 / 시간의 블랙홀‘(사막) 이라고 써서 가려진 사막의 이면을 끄집어낸다. 아들에게 ’세상은 꽃놀이패가 아니(바둑 시편)’라고 말하고 임산부의 둥근 몸을 보고 ‘ 한 몸 안에 두 생명이 동거하는 / 저 이쁜 몸 , 저 무덤이 피안으로 가는 출구’(저 여자!) 라고 쓴다. 소리에 대해서도 ‘침묵은 소리의 극명한 태초 / 소리의 피안이다./ 저 침묵에 귀의함으로써 / 소리는 소리의 생을 다한다.’(소리박물관) 고 쓴다. 어떤가? 의미는 소멸되지 않고 문장 속에 영면했는지 모르겠다. 혹자는 그러하지 못하다고 할 것이고 혹자는 영면했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물론 후자다.




이렇게 쓰다 보니 시인은 속세에서 피안을 살핀다. 피안이라는 염원을 가진 시인은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미 세상이 피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슬픈 사람이다. 피안인지 속세인지도 구별하지 못하고 죽을동살동 모르게 사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세상의 진실을 말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시인은 글을 써 사람들에게 전할 뿐이다. 자신이 천형(天刑)으로 짊어진 책무를 우선 해 두는 것이다. 가수는 노래를 부른 다음에야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고 , 시인은 시를 쓴 다음에야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다.




시인이 보는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살기 좋은 곳도 아니다. ‘다리 밑에서 동네 남정네들이 모여/ 개를 잡고 있다. / 무자비했다. 개 비명이 우레 같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구나!’(초복) 라고 탄식한다. 마지막으로 뱉는 한마디 ‘이런 세상을 피안인 듯 살았구나!“ 라고 탄식한다. 세상은 복날 개패 듯이 맞아가며 사는 세상이지만 결국 이런 세상도 피안 (너머의 세계 , 현실이 아닌 세계로 알고 살았다.)으로 알고 살았다고 쓰고 결국 아들에게 ’아들아, 사는 건 / 꽃놀이 패가 아니더구나”(바둑시편) 라고 고백한다. 또한 삶은 무늬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욕망과 어리석음이 얼룩이 되었다. 시인 또한 얼룩이 되었지만 얼룩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얼룩과 무늬 참고 하시길) 쓴다.




10 1 31 유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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