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는 세월』 (박진규 , 2010 , 문학동네) 에 대해서 말하기 나는 『내가 없는 세월』을 읽는다. 내용을 읽기도 전에 ‘나’와 ‘세월’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주체자로 가명하고 명징하게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다. 모든 것이 나로 인해서 시작되고 나라는 명명이 없으면 세상은 인식의 범주에 들지도 못한다. 나의 존재가 있어야 세상이 존재한다. ‘나’라는 낱말이 가지는 아우라는 거대하기만 하다. 거대한 우주는 사람의 눈을 통해 전체를 파악할 수 없고 너무 작은 나노의 세계도 사람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극대와 극소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엉켜서 서로의 꼬리를 무는데 그런 존재를 명명하는 것이 ‘나’라는 단음절 낱말이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이야기했던 것으로 혹은 노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월은 거대한 것이 집적되어 만들어진 것이지만 타율성을 벗어날 수 없는 천형을 옷으로 해입은 낱말이다. 세월은 시간의 집적(集積)이다 시간은 거대하고 항구적이기도 하고 영속성을 가지기도 한 것이다. 인간이 멸종되더라도 시간은 살아남아서 유유히 흐를 것인데 이렇게 시간이 뒤로 내놓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나가 살아온 세월이 되는 것이다. 한 세월은 시간을 사려 넣고 있지만 살아지는 것에 불과한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는 낱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젖어드는 상념은 낙엽처럼 마르기만 하다. 지금은 2010년이다. 1988년부터 시작된 열살된 아이의 삶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고 그 아이와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명옥 , 신혜 미령 , 윤희의 삶들이 나열되고 교차된다. 지금 이 순간이 2010을 지나 2023년까지 이어진다. 가보지 못한 미래는 디스토피아적이다. 던적스럽고 참담하기는 하지만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은 겨우겨우 견디는 것이고 오지 않은 미래는 견디지 못해 주저 않은 것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어쩌면 오지 않은 미래가 지금 현재보다 좀 더 극명하고 명징하고 솔직한 미래다. 박진규가 가지고 있는 환상성은 ‘수상한 식모’에 이어 ‘최씨 집안의 특이한 가계 유전’이라는 설정으로 환상성을 이어가는데 바구미 여사가 그랬고 신혜와 윤희가 그러하다. 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지난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직 오지 않을 미래를 동원하여 서술된다. 어떤 문장으로 박진규의 『내가 없는 세월』을 설명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명징한 문장을 하나 발견했는데 ‘1988년부터 2023년까지 이어지는 그녀들의 살모가 욕망 그리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카피다. 이 보다 적당한 말을 찾으려고 해봐도 귀찮아지는 일이다. 간명하게 모든 것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문장이다. 내가 없는 세월은 미령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들의 이야기다. 미령의 삶은 그녀들의 삶에 녹아들어 희석되는데 그녀들의 삶을 좆아보면 미령의 삶을 시간별로 구성할 수 있다. 내가 없는 세월이란 나는 잘 모르겠지만 타인의 삶 속에 녹아든 개인의 삶이라고 해두면 너무 이상한가? 그럼 이렇게 말해보기로 한다. 미령이 출연한 ‘눈물의 에이프런’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이 관련된 일에 불과하다. 처해진 상황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냥 소설을 이야기로 좀 읽으면 안 되나 몹쓸 습관은 그저 즐겨도 좋은 읽기에 딴지를 걸듯 글을 쓴다. 치매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