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 개정판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7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유독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

   일독하고 난 뒤에도 계속 기억에 남아 지하철을 탈 때나 혹은 길을 다닐 때에도

   수시로 떠오르곤 하던 장면.

   '어둠의 사육제' 에서 치이고 치여 결국 독해져버린 주인공이

   여대생을 후려치던 아줌마를 보며

   '얼마나 당했으면 저렇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던 장면인데

   순간 이게 한강의 시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2. 상처입은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

   한강 씨의 작품을 볼 때면 늘 그 생각이 들곤 한다.

   그녀가 상처입은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 꽤 인상적이라는 것.

   그녀는 그냥 놓아둔다.

   감히 내가 뭐라 할 수 없는 사안이라는 듯.

 

3. 놓아둔다. 이 말을 적으며 떠오른 것은 우울증 환자에게 보여선 안 되는 반응들이었다.

   아마 진료시간을 기다리다가 지루해서 집어든 홍보용 전단에서 본 것이라 추측해본다.

   (그게 아니면 인터넷을 돌다가 본 것일 거다)

   거기에는 이런 사항이 적혀 있었다. 물론 정확성은 장담할 수 없다.

 

   '힘 내' - 환자는 이미 탈진한 상태입니다.

                힘 내 라는 말은 더 고통스러워하란 말 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힘들어' - 환자는 절대 본인'만' 힘들어 병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말은 환자를 '본인만 보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자책하게 하므로 절대 해선 안 됩니다.

 

   그 외 기억나는 것은

   그럼 우울증 환자에게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일상적인 태도를 보이되 그의 얘기를 잘 들어주어야 한다 는 내용의 대답.

   한강 씨가 글에서 보여주는 '상처 입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타인의 상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반인륜적인 사건이라면야

   형사조치건 뭐건 행동의 영역이 있겠지만

   대화와 관계로 인한 상처일 경우.

   더구나 그 상처란 것이 정말 찰과상에 지나칠 정도로 미미한 것이 쌓여

   결국 딱지가 져버린 것일 때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치유해주겠다는 말도 우스운 거고 너의 상처는 우습다는 말도 우스운 거다.

   그러니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곤 거리두기 뿐인 거다.

   결국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어진 내가 택한 방법이다.

 

5. 요즘 들어 종종 이렇게 살다간 땅을 치고 후회할 거란 생각을 하곤 한다.

    지금이야 부모님이 계시고 가족이 있다지만 그 다음은?

    아무리 혼자인 게 익숙하고 적당한 거리가 편하다지만

    정말 혼자가 되어버리고 어찌할 수 없는 범법적인 상황에 놓여버리면 그 땐?

 

6. 그렇지만 아직은 사람이 힘들다.

    타인의 고민과 상처를 듣기만 해도 지쳐버린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지쳐버린 걸까 자문해보지만

    답을 찾기 전에 지친다는 생각만 들어 결국 다시 방에 숨어버린다.

 

7. 글에서 느껴지는 작가 한강처럼 배려깊은 사람이었음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일상적으로 대하면서도 이야기에 귀기울일 수 있는 거리

    그 적정거리를 알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8. 그 때쯤 되면 숨통이 좀 트일려나.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경을 시각의 전환이든 아니면 문학적 승화든 어쨌든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좀 더 진지했으면 했다. 여호와에 대한 의문과 의심 제기 라기보단 본격 디스 란 느낌이 더 강한 것이 뭔가 책에 대한 인상을 흐리는 듯. 유머로 집어넣은 것이 적잖이 거슬렸다.(대표적인 예가 미슐랭 가이드)

그리고 가장 아쉬었던 건
성서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기 위해 카인을 차용했다는 것. 때문에 `아우를 죽인 카인` 에 더 관심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리직톤의 초상 이승우 컬렉션 1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

   책에 나오는 종교와 철학에 대한 부분은 전혀 이해하지 못 했다.

 

2. 너무 이해가 되지 않은 나머지

   에리직톤과 나무, 종교와 신을 '목표' 로 치환하여 읽기 시작했다.

 

3. 목표. 삶의 목표. 꿈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는 것.

   목표를 떠올리면 청소년기가 떠오른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청소년이던 시절은 뚜렷한 목표가 있는 아이들이 드문 편이었다.

   막연히 대학은 가야지 하는 생각만 갖고 '어느 대학' 을 갈지조차 정해두지 않았다가

   막판에 벼락치기로 공부하여 나온 성적에 맞춰 갈 수 있는 곳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을 선택하여 가는(전공은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지금은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4. 물론 목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쫓을 자유가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모 잡지사에서 개최하는 공모전에 당선된 적이 있었다.

   이를 가족들에게 말했을 때 내가 들을 수 있었던 말은 

   "그래서 어느 회사에 취직된다니?" 가 전부였다.

 

5. 어쩌다보니 이야기가 신세한탄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한탄을 하고자 함은 아니다.

   난 꿈이 없는 청소년기를 보냈고, '뭘'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보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붙잡은 것이 '그림' 이었고 '창작' 이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붙든 나의 '목표' 는 서서히 나에게 침투하여

   나의 정서 전반부터 시작하여 성격과 말투, 인간관계, 심지어 식성까지 바꿔버렸다.

   목표가, 꿈이 나를 잡아먹어 버린 셈이다.

 

6. 우울증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서야 꿈이 나를 잡아먹었다는 것을 인정했더랬다.

   물론 가족의 영향도 있겠고 회사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 기반에는 나의 꿈, 나의 목표가 깔려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바로 그 점이 아이러니 하다는 거다.

   그냥 되는 대로 살아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목표를 찾고 꿈을 찾았는데

   도리어 그 꿈이란 것이 나를 잠식하고 잡아먹어 버리다니.

 

7. 여기까지가 에리직톤의 초상을 보면서 내내 떠오른 생각이었다.

   간결하고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 해 아쉽지만

   내 이해력이 미치는 범위가 여기까지 인 것을 어쩌겠는다.

 

8. 다만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형석의 우울의 이유이다.

   물론 '에리직톤의 초상' 이 씌여졌을 그 시기에는

   그런 류의 우울한 사람이 많았겠노라고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지금 20대들은 어쩐지 우울과 권태에 빠질 틈도 없어 보이는지라

   형석의 이유가 뚜렷하지 않은 채 넘어가는 점이 적잖이 눈에 거슬린다.

  지금의 20대들이 과연 형석의 우울을 인정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난 모르겠다.

 

9. '생의 이면' 이나 '지상의 노래' 만큼 좋지는 않다.

   (많은 부분에서 흐릿하고 추상적이기에)

   허나 이 책이 작가의 원형처럼 느껴지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p.s. 이것 참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미약한 리뷰로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 마이너스
손아람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인지 아닌지부터 헷갈리는 소설.

소설 자체로만 보면 괜찮은 편이지만

이후 스치듯이 본 해당 출판사 관련 기사 때문에 썩 마음은 좋지 않았더랬다.

결국 이도 저도 다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 같지만.

 

요즘 들어 종종 하는 생각이 있다.

과연 사람의 속성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하는 것.

그러니까 시비를 거는 사람에게 대거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의 속성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고

누구에게나 적당히 친한 척을 하며 좋게 지낼 수 있는 속성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늘 화를 내는 저 사람의 속성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것.

그리고 그런 생각의 끝은 늘 나에 대한 생각으로 끝나게 된다.

나. 나의 속성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극단적으로 사람을 만나지 않은 2015년(사적으로 만난 사람이 1명이니 말 다했지) 동안

내가 스스로에게 느낀 속성은 '아무 것도 없다' 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어떤 이야기를 그려도

결국 들은 것을 그럴싸하게 재조합해서 내는 것 뿐이고

이제 와 하늘 아래 무엇이 새로운 게 있을까 싶기도 하고

아무 것도 없기에 직장과 나를 더욱 분리할 수 있는가 싶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소설에 그려진 것 같은 유형의 사람을 보면 꽤나 생경한 것이다.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언가.

내가 끝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본인 스스로가 더 잘 알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줄기차게 운동권의 속성을 이어가는 이유는 대체 무얼까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또 어떻게 만들어진 속성이고

그렇지 못 한 사람은 또 무얼까

 

어느 쪽이 되었든간에 잘못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사람이 안에서부터 겉까지 일관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원래가 다면적인 게 인간이니 말이다

 

헌데 기왕지사 그렇게 일관되지 못 할 거라면

본문 중 등장하는 문장처럼 뻔뻔하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일이다.

 

하루를 마감할 때마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되짚으며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게 말이다.


 

p.s.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80~90년대의 이야기라면

      디마이너스는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쯤으로 넘어온 듯 싶다.

      (아닐 수도 있다. 날짜감각이 없는 인간이라)

      과연 이 시기 이후에는 어떤 모습이 그려질지가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츠이치 팬 될 듯.
자세한 감상은 재독 이후로 아껴두기로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