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위로 내려 앉은 어둠을 털어내며 집안으로 들어설라치면 얼굴보다 먼저 연우의 목소리가 냉큼 달려나온다
<엄마, 배고파요>
이제 곧 열세살이 될 연우는 어지간해서는 제 손으로 저녁 요기를 하는 법이 없다.
방학이면 종종 혼자 점심을 차려먹기도 하건만 저녁은 마치 쌀 떨어진 흥부네 자식마냥 손가락을 빨고 기다릴 뿐이다.
어느날인가는 인사보다 먼저 나오는 배고프다는 말에 울컥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날은 아마 짜증이 턱밑까지 차 올랐던 날이었을 것이다.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나온 연우의 얼굴에서 시장끼를 읽은 순간 갑자기 삶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그 무게를 털어내기라도 하듯 열두살짜리 아이를 밀쳐내며 말했다.
<연우야, 너는 내가 엄마가 아니라 밥으로 보이니?>
짧은 순간 미안함이 아이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며 괜히 어깃장을 부리는 노인네처럼 심술궂은 마음이 되었다,
피곤은 때로 열두살 아이를 상대로도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고약해지는 심사를 숨기지 못하게 하곤 한다.
채 다스리지 못한 피곤에 얼굴을 쌩하게 하고는 주방으로 갔다.
덜그럭거리며 아침에 덜 씻은 그릇들을 헹구어 내고 압력밥솥에 두컵이 조금 넘게 쌀을 씻어 가스불에 올린 후 베란다에 걸려 있는 빨래들을 거둬 들이려니 어느집에선가 김치찌개며 생선굽는 냄새가 솔솔 올라온다.
연우가 베란다가 가까운 거실에서 책을 읽었던 것일까? 아이가 읽다가 둔 듯한 책이 거실 한켠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물끄러미 책을 보고 있자니 연우가 냉큼 달려와 책을 정리하며 씨익 웃는다. 아이는 아마도 여기쯤에서 이웃집의 찌개 끓는 냄새며, 생선이 익어가는 냄새를 맡고 있었으리라.
어둑어둑해져가는 창밖을 보며 연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창너머 이웃집의 음식이 익어가는 냄새에 배가 고프다고 느꼈던건 허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열두살 연우도 세상이 주는 생채기에 혹시 위로가 필요한건 아니었을까?
연인과 이별한 여자가 입술을 앙다물고 눈물을 찔금거릴때 그 여자의 선배가 사주는 국밥을 먹으며 받은 위로에 대해 써 놓은 글을 읽으며 나도 누군가의 밥일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구차한 설명을 주고 받지 않고 그저 숟가락을 쥐어 주며, 밥먹으라는 눈짓을 보낼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해 보이던지...
맨밥은 목이 메이니 국물과 함께 먹으라는 말을 덧붙인 구절에서 국밥이 참으로 그럴싸한 음식으로 보여 이왕이면 나도 국밥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책일 뿐이다.
우아한 골드미스의 단출한 생활의 레시피가 어찌 애 둘딸린 아줌마의 생활과 일치하겠는가마는 열두살 딸래미의 허기도 다 채워주지 못하면서 짐짓 누구의 허기를 채워주고 싶다고 생각하였던 것일까?
<연우야, 우리 무국에 밥 말아 먹을까?>
부모자식지간 이어서일까? 언제 무안했냐는듯 말개진 얼굴을 한 연우가 얼른 대답을 했다.
<네. 생선도 구워요, 엄마>
숟가락, 젓가락을 챙겨 놓으며 부지런을 떠는 아이를 앉히고 막 뜸이 든 밥과 김이 나는 무국을 챙겨 식탁에 마주 앉았다.
갈치를 튀겨 아이앞에 밀어주니 연우는 잘 먹지 않던 김치에도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며 열심히 생선을 발라 내었다.
<목 메니까 국물도 떠 먹어.>
<네, 근데 좀 뜨거워요.>
막 끓여낸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 먹으며, 아이가 연신 후후 하고 입바람을 불었다.
아이가 떠 먹는 국물은 그저 무국이 아닐수도 있으리라. 한술의 따끈한 위로가 되어 밥과 섞여 위 속으로 넘어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위로가 살이 되고 뼈가 되고 때로는 무국의 뽀얀 김처럼 추억이 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국을 끓이고 밥을 할 일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의 살아가는 힘이 되기를, 내가 너의 밥이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