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시작되자 곧 겨울임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습니다. 

발이 시립니다. 

담주에 지리산으로 아이들 데리고 놀러가면 제법 춥겠구나 싶어 쓸데없이 오만원을 꾹꾹 눌러 책을 주문하곤 선택사은품으로 무릎덮개를 눌렀습니다. 

계산까지 다치르고나자 그것 말고도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칩니다. 

엄마는 이맘때면 연탄을 주문하곤 하셨습니다. 

까만 연탄이 삼백장쯤 헛간에 쌓이고 나면 까만 잔해들을 쓸어내고 정리해내며, 연탄들이 쌓여 있는만큼의 안온함이 불도 피기전의 방안에 차오르는 듯 따뜻해 하셨습니다. 

연탄이 쌓이면 배추를 절이고, 아버지는 서둘러 담장밑 그늘에 구덩이를 파내어 장독을 묻으셨지요. 

나는 엄마의뒤끝을 따라다니며, 잔파나 마늘 따위를 다듬고 깠습니다. 

때론 그릇에 담긴 양념들을 쏟아가며 구박을 들어도, 아줌마를 따라온 옆집아이와 눈짓을 주고 받으며 그언저리에서 빙글빙글 돌곤 했습니다. 

남동생을 데리고 나가놀라는 엄마의 성화에도 그언저리에 비비적거리고 있는 것이 마치 나와 동생의 존재가치가 다름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렇게 줄기차게 어른들을 성가시게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온가족이 혹은 온 동네가 며칠이고 따로 혹은 같이 준비한 겨울은 비슷비슷한 추위로 다가오곤 했습니다. 

여렷이 함께 보내는 겨울은 체감온도를 조금은 누그려뜨려 주었을까요? 

지금 생각하면 그 미지근한 연탄불로 데운 방의 온기가 퍽이나 따끈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어느새 갑천변의 나무들이 이파리를 제법 떨구었습니다. 

조만간 첫눈도 내리겠지요.

대관령 어디쯤에는 오늘내일 중으로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습니다. 

아래윗집이 누군지도 모르는 아파트생활이 십수년째, 

올해도 별수없이 두툼한 양말을 사러 나가야 하겠습니다. 

나간김에 아이들이과 애들아빠의 내의도 좀 골라야겠습니다. 

겨울이 반갑잖은 불청객처럼 벌써 대문밖 어딘가에 다가와 있는 것 같습니다.  

겨울이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누구와 나누지 못하는 겨울 추위가 아쉽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드문드문 천변옆을 달리는 차들의 불빛이 눈에 들어오는 시간입니다.  

알라딘에 들어온지도 오랜만이고, 글을 쓴지는 더 오래되어서 이제 낯가림조차 생긴 모양입니다. 

다들 안녕하신지요? 

대전에 내려온지 그새 2년이 후딱지나 건우는 어느새 징그러운 느낌도 뭉글뭉글 피어나는 육학년이 되었습니다.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착실한 에프엠 아들내미입니다. 

축구에 목숨거는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축구선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진작에 깨달아, 엄마와의 갈등을 요령있게 피해가곤 하지요. 

세월은 건우에게나 제게나 공평히 흘러갔을 것인데, 제가 느끼는 시간은 저에게만 두배쯤 흘러거버린 것 같습니다. 

가끔 일산으로, 서울로 출장을 가다보면 경부선 저너머에 우리 가족이 십년가까이 살던 집이 보입니다. 

판교의 새건물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너머에 우리동네는 납작 엎드려 있습니다. 

그 아스라한 거리 너머에 남아있는 기억들을 더듬으며, 그 기억만큼 나이든 내 손등과 얼굴을 비빕니다. 

그러노라면, 추억은 때로 내나이를 일깨우고, 아직은 어린 아이들과 함께 걸어가야할 많은 길이 남아 있음을 일깨워주는 씁쓸한 그 무엇이 되기도 합니다. 

올해들어 부쩍 발밑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날들이 이어지는 것은 내 이웃같았던, 혹은 덜 낯선 전직대통령 두분이 유명을 달리하셨기 때문일런지 모르겠습니다. 

창창했던 젊은날엔 두려운줄 모르고 데모뒷자락을 밟기도 했었습니다. 

먼저 가신 분의 장례엔 학교수업 제끼고 건우를 제아빠와 손잡고 참석도 시켰습니다. 

그런데 또 한분이 마저 가니, 슬픔조차 맥이 풀려 망연합니다. 

세상은 진보하는 걸까요? 

누군가의 거짓말은 아닐까요? 

가슴이 쉬 뜨거워지지 않는 지난 일주일, 나는 더이상 눈물조차 뜨겁게 흘러내리지 않는 내가 가엾습니다. 

거기 누구라도 혹 지금 저같은 이가 있으신가요? 

나만 이렇게 망연한지,  

나만 이렇게 지나간 세월의 끝에서 넋을 놓고 있는지, 

조금도 겸손해보이지 않는 집권여당의 모습에 분노조차 더 이상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지....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인 2009-08-2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나선형으로 회전한다고 했던가요.
느리지만 착실히 나아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비록 지금은 캄캄해도, 우리 희망을 버리지 말아요.

배꽃 2009-08-25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랫만에 님 글 보니 반가워요.
그저 맥 놓고 있을뿐..모두 공감할거에요.

건우와 연우 2009-08-25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세월을 견디는 것이 지금 제 몫일까요?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작아 슬프네요.
그래도 쉬 잠들지 않고, 두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기라도 해야겠지요...
조선인님, 배꽃님 고마워요.

프레이야 2009-08-25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연우님 오랜만에 반가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고 생각한 고인이
참으로 큰 그릇이다싶어요.

건우와 연우 2009-08-31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닉넴을 바꾸셨구나...
나이를 먹으면 저도 인생을 관조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나날이 불안만 늘어갑니다.
실천하지 않는 양심이 되어버린 탓은 아닌지, 자꾸 뒤를 돌아보게하네요...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집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정운영 선생의 글을 읽는 재미의 반쯤은 말그대로 선생의 `글`에서 비롯된다.  

그의 글에는 동굴에서 나는 묵직한 저음의 울림이 있다. 

난체하지 않고, 자분자분 얘기해주는 묵직한 저음은 읽는이까지 그 소리에 젖어들게 한다. 

언젠가 생전에 빵집에서 만난 선생의 모습은 그만둔지 한참이나 더 된 백분토론을 진행하던 그대로였다. 

간혹 주워들은 선생에 대한 주위의 이러저러한 말들 탓이었을까? 

동네에서 마주쳤던 생전의 선생은 퍽 쓸쓸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 다시 보는 책표지의 선생의 얼굴은 여전히 그러하다.   

 

   이책은 칼럼집이다. 

그저 수필이라고 하기엔 무겁고, 그뜻이 딱히 적확할지는 모르겠으나 책머리에 있는 칼럼이라는 말은 비교적 어울리는듯하다.   

책의 구석구석에는 온전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그리하여 불우라 말할라치면 민망하지만 그와 유사한 삶을 살았던 학자의 넋두리가 있다. 

과거 그의 글들에서 보여졌던 날카로움은 이제는 때로 회한으로 읽힌다. 

그러나 나는 선생의 그전 글들만큼이나 넋두리처럼 느껴지는 이 글들을 좋아한다. 

대학에서, 혹은 언론사에서 그가 무슨 연유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그 내막이야 내가 알길은 없으나 회한속에서도 마지막까지 버릴수 없는 선생의 진보에 대한 열정은 가슴시리다.  

그리하여 그에게 왼쪽에서 뛰는 심장은 죽을때까지 멍에고 족쇄였을 것이다.  

 

   한국경제의 등에이야기라는 글에서의 장하준교수에 대한 글을 읽고 있으면 장하준이라는 이름위에 정운영이라는 이름이 같이 겹쳐진다. 

케임브릿지라는 세계유수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지만, 국내 모대학에서는 강의를 하지 못한다는 장하준 교수의 언급에서, 나는 우리 사회 주류들의 끝없는 견제속에서 결국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정운영선생의 회한을 읽었다.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사회는 황폐하다. 

생물학적으로 근친상간은 결국은 해당종을 퇴화시킨다. 

학문이든, 문화든, 혹은 경제든 한방향으로의 일방통행은 근친상간에 다름아니다. 

돌똘 뭉쳐진 그들만의 리그에서 겉돌았던 선생의 고뇌는 우울한 삽질의 시대에 돌이켜 봄직하다. 

이나라의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와 책임투자에 대한 언급을 읽으며  2009년 우울한 경제위기의 와중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분배론논문을 썼다 하니 이력서에는 그리 쓰지 말라했다던 선생의 은사의 말이 아직도 유효한 시대에, 고독한 리더가 되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나는 자꾸만 손이 오그라든다.  

 

   오그라든 손을 문지르며 , 나는 지금 누군가를 외롭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고 무자르듯이 내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돌아볼일이다. 

다름을 인정하며, 그속에서 함께 듣고 이야기하는 일이 숨은 천재의 동료인 나의 몫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가 오는구나...

말 그대로 가을을 재촉하는 비다.

 

똑같은 비도 나이를 먹으니 한해가 다르구나.

아직은 끝내기 서운했던 여름의 기세가 만만찮은 날씨였건만, 세차진 않아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빗줄기가  이제 한계절이 지나갔음을 도도히 알린다.

친구야,

불혹이 남의 얘기인줄만 알았더니 이제 내가 그속에 들고 보니 그 나이조차 일분기, 이분기, 삼분기, 사분기하며 자꾸만 촘촘히 나누고 싶어지는구나.

빗소리를 들으며 일을 하다가, 오랫만에 걸려온 네 전화에 집에 남아있는 세간 얘기도 좀 하다가

나는 문득 우리 마음에 깊이 그어진 주름을 보았다.

그리고 그 주름들이 내게 말하더라.

이제 누이의 시대는 끝났어요하고...

 

모두들 나가버린 빈 사무실에서 꺼진 컴퓨터를 보며,

오늘 문득 내 나이를 셈해보니 사십이더구나. 

아이들 모두 학교보낸 빈 거실에서 때로 너는 나와 같지 않은지,

혹은 햇살이 비추다 지나간 베란다끝에서 시든 화분을 보며 문득 나이를 셈하지는 않는지...

 

오늘 너를 만나 술을 마신다면 슬픔이 안개처럼 발목을 적셔 오를까...

반 남아 오른 산굽이에서, 오를수도 내릴수도 없는 막막한 심정으로 나와 같이 잔을 기울여 줄까...

 

친구야,

가을로 접어드는 밤이, 제법 길겠구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8-09-01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비와 친구 먹었나..했습니다. 아니였군요..^^

프레이야 2008-09-01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연우님 9월의 첫날이에요. 잘 지내고 계시죠? ^^
 

두녀석 사교육비 지출이 얼마나되나 곰곰 따져보다가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란다.

인터넷뉴스에서나 보던 한녀석당 기천만원은 아니지만 두녀석을 합하니 일년에 돈천은 가볍게 넘어가는것 같다.

미쳤구나 미쳤어...

내 한달 월급이 얼만데 내가 이러고 살았으니 어깨근육이 뭉쳐 날마다 등짝이 찌릿거렸지...

정신차리자 벼르며 줄일 항목을 찾아보니 들어오는 것마다 이걸 안하면 왠지 안될 것 같은 두려움이 발목을 잡는다.

국제중학교 설립뉴스가 인테넷을 도배하고도 이젠 시큰둥해지기까지 한 이시점에서 없는사람이 자식을 낳는일은 이땅에 빈곤층의 숫자를 늘여놓는것 외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도대체 어떤 놈이냐,

이나라의 빌어먹을 교육정책이 부의 대물림수단이라는 사실을 이리도 통렬히 알려주는 것들이...

 

영어학원에서 삼개월 천만원이 넘는 초등학생어학연수프로그램을 들고와 연신 침을 흘리며 들여다 보는 건우녀석의 뒷통수가 안쓰러워, 수월성교육을 주창해대는 대한민국 특별시 교육감의 인터뷰기사에 대뜸 육두문자가 입속을 맴돈다.

끝나가던 여름에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매미소리가 징그럽고도 덥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8-08-30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사실은...
이제서야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거죠..
싹을 뿌리채 뽑아야 후환이 없다니까요..

건우와 연우 2008-08-31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요....
진즉 잘못된 것들은 회생을 못하게 했어야 하는데...
다늦게 늙은 우리 부모님 투표한 손가락을 원망하자니 때늦은 일이고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