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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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시급합니다>에서 ‘울분을 느낄 때’ 항목(?)에서 봤다. 갖고 있은 지는 아주 오래 됐고. 어떤 계기로 쌓았는지 잊었을 정도.

길지 않기도 하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니 놓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환하게 시작하는데 이야기가 뭔가 조금씩 삐걱거리면서 슬금슬금 무서워지는 스릴러 아니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도 그새 오소소 돋은 소름이 가라앉지 않는 이야기. 사이코패스 살인자 아들을 둔 엄마의 이야기 인 영화 <케빈에 대하여>와 뮤지컬 <위키드>의 대사 (“사람들은 사악하게 태어나는 걸까요? 아니면 사악함이 그들을 덮친 걸까요? Are people born Wicked? Or do they have Wickedness thrust upon them?”)를 자꾸만 떠올리게도 하고.

<이 책이 시급합니다>의 저자는 이 책에 대해 우선 미혼이나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하는 여성에게는 권하지 않는다고 썼다. 과연 내가 십 년 전에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더 무서웠을 것 같다. 그 때는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지금의 나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해서 덜 무서운 것도 아니다. 어찌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사악함은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상상만 해도 떨린다.

나는 결혼을 하면 아이를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들 생각하는 것이 늘 이상했다. 당신 닮은 예쁜 딸, 잘 생긴 아들을 갖고 싶다, 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특히. 그건 뭔가, 예쁜 커튼이나 멋진 정원 같은, 집과 가정을 그럴 듯하게 만드는, 그런 걸 원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아이는 결코 내가 꿈꾸는 가정에 어울리는 것(!)을 내 마음대로 골라서 데려올 수 있는, 혹은 그렇게 빚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는 내 유전자를 받아서 내가 뱃속에서 품고 키우기는 하겠지만 일단 세상으로 나오면 나와는 별개의 존재다.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에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노력하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는, 그저 다른 사람.

이 소설의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책임감 있는 부모, 대여섯은 되는 아이들이 커다란 집에서 화목하게 지내는 가정을 갖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부부다. 그래서 (내켜하진 않았지만) 남편의 (부유한 여자와 재혼해서 부자가 된) 아버지의 도움으로 런던 교외에 커다란 집을 사고, 한두 해 터울로 다섯 명의 아이를 낳는다. 물론 그렇게 어린 아이들을 한꺼번에 다 키울 수 없으니 아내의 홀로 된 어머니가 거의 함께 살게 된다. 네 번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교외의 큰 집으로 부부의 친척(남편의 이혼한 부모와 각각의 배우자들, 누이, 아내의 자매들과 그 남편들과 아이들, 기타 등등)이 명절마다 큰 집에 모여 대가족의 화목함을 즐기고 부부는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다섯 번째,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난폭하고 사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아들이 태어난다... 해리엇은 남편이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이 아이를 두려워하지만 결코 버릴 수는 없었는데 그녀의 이 결정 때문에(!) 결국 가족은 뿔뿔히 흩어지고 가족애도 희미해진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조차도.

이것은 물론, 아무리 이상한 자식이라도 어미라면 모성애로, 눈물로 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어머니를 정죄하는 이야기가 아니다(아니어야 한다!?). 자기들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화목한 대가족이라는 이상에 사로잡혀 아이를 마구 낳기만 한 부부가 벌을 받는 이야기도 아니다(아니어야 한다?!). 이것은 ‘이상’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계획과 실행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렇게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다섯째 아이 벤은 너무나도 이상하고 무서운 존재다. 해리엇은 마치 지금의 인류가 갈라져 나오기 전 원시인류의 유전자로 만들어진 아이같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외모도 행동도 옛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 같은 아이. 정말 ‘사람’인가 싶은 아이. <케빈에 대하여>의 케빈처럼 사이코패스인 것이 아니라 아예 호모사피엔스가 아닌 것 같은 존재. 이런 아이를 낳았다는 건 뭐 계획이 어긋날 수도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천재지변이다. 이런 아이가 태어나야 할 어떤 필연도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조물주(작가!)가 이 행복한 가정에 그냥 심술을 부린 건지도 모른다. 이래서야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도 다 부질없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의미보다 괴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인데 번역은... 영어는 잘 하지만 한국어로는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의 번역인 듯 까끌거린다. 뒤에 붙은 작품 해설은 괜찮은데.

#books #theFifthChild #DorisLes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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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폭스 갬빗 - 나인폭스 갬빗 3부작
이윤하 지음, 조호근 옮김 / 허블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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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8 ~ 2020-12-22

한국계(이민 1.5세대) 작가가 쓴 소설로는 휴고상 최종 후보에 오른 첫 SF라는데 흥미를 느껴 작년 여름 번역본이 출간되자마자 집어들었다. 스타워즈 영화들을 몽땅 좋아하니까 나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좋아한다, 그러니 이것도 재밌을 거야, 기대하면서. (왜 은하영웅전설의 실패는 떠올리지 못했단 말이냐...)

그런데 생각보다 진입장벽이 높았다. 이전에 본 적이 없었던 세계에 대한 초반부 설명은 언제나 지루한데 이 소설의 경우는 ‘본 적이 없는’의 정도가 아주 높아서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어야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은 느낌적 느낌으로 겨우 다음 단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거기다가 주인공이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이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것이 강조된 해설이나 후기들이 꽤 있는데 이 세계에서 성별이란 아예 중요하지 않다. ‘주인공을 여자로 내세우다니 괜찮은데!’라고 생각하는 건 박공주가 대통령 후보이던 시절 그이가 ‘여성’이니까 대통령으로 뽑아줘야 한다던 어떤 여성계 논객의 주장만큼이나 무의미하다(결말에 가서는 아예 남성으로 바뀌었다고 본다. 이 ‘남성’도 머리카락 색깔 정도의 의미밖에 없지만). 자의로 주입받은 그넘의 ‘켈 진형본능’도 답답한데 두 번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제다오를 결박하여 ‘한 몸 두 정신’ 상태에서는 뭐 자기가 하는 게 없다(이것도 그넘의 ‘켈 진영본능’의 책임이 크다). 차라리 그저 모든 면에서(성품이든 능력이든) 뛰어나기만 해서 지루했던 아너 해링턴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나중에 보니 초반 60 페이지까지 읽는데 걸리는 시간과 나머지 430 페이지의 시간이 거의 비슷하다는 얘기가 있던데 나는 100여 페이지에서 멈춰버렸다.

그러다 얼마 전 2부와 3부(최종)가 한꺼번에 번역 출간 되었고 이번에는 ‘덕질에 진심인 편집자의 안내서’를 붙여줬다. 2부와 3부도 연속해서 휴고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하고(그 중의 두 번은 <부서진 대지> 시리즈에 밀렸지). 그래서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마지막 <석조 하늘>을 읽고 이 책에 재도전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설정’을 두 번째로 읽는 것이기도 하고 그보다 <덕질에 진심인 편집자의 안내서>가 큰 도움이 되어 처음보단 수월하게 페이지를 넘겼지만...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60 페이지까지는 역시 그냥 그랬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무능력과 무기력(‘켈 진형본능!’)이 짜증났다. 그 다음에는 그넘의 하•게•체. 400년 묵은 전술천재 망령이 20대인지 30대인지 아무튼 새파란 청년에게 얘기를 하는 거니 (번역할 때) 하게체를 선택했겠지만 이게 시종일관 이러니 아주 보기가 싫었다. 그러다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는 뭐야 뭐야, 이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페이지가 쓱쓱 넘어갔다. 그렇게 300여 페이지를 순식간에 읽었다.

결론은 재밌게 잘 읽었다, 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석조 하늘>(<부서진 대지> 시리즈 최종편)을 읽고 난 직후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감은 잡았다. 전투의 세부적 상황에 들어가면 제대로 이해한 부분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주인공의 수학 실력이 플롯상에서도 중요한 재능으로 여러 번 언급이 되지만, 심지어 작가는 스탠퍼드에서 수학교육 박사 학위도 받았다는데, 본격적인 수학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저 수시로 ‘복잡한 계산을 했다’, ‘숫자로 바뀌었다’, 등의 언급이 있을 뿐이다. 써도 어차피 독자들은 잘 알아먹지 못하는데 책만 길어질까봐 그랬는지? 내 생각에는 자세히는 몰라도 SF의 ‘S’ 부분이 강화되면서 좀더 폼났을 것 같은데.

한국계 작가의 작품으로 구미호 설화부터 한국적인 요소가 토대가 되는 SF라는 것도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강조되는데 그건 잘 모르겠다. 도대체 ‘한국적’이라는 게 뭐냐 하는 생각부터 든다...

일단 구미호. 내가 아는 구미호는 꼬리가 아홉 개인 여우인데 온갖 신묘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희한하게도)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사람이 되는 방법은 사람 간 백 개를 먹는 것. 그래서 아름다운 여자로 둔갑한 다음 남자를 꼬여서 그 간을 빼먹는다... 이 소설에서 구미호는 남자다(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소설에서는 인물의 성별 따위는 머리카락 색깔만큼도 중요하지 않지만). 남자니까 여자를 꼬인 건 아니고 여자인 주인공이 필요해서 스스로 이 ‘구미호’와의 결박을 선택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여자가 간을 뜯어먹히냐고...? 진짜 스포일러니까 말할 수 없다. 다만 다 읽고 나면 ‘나인폭스 갬빗 Ninefox Gambit’이라는 제목이 확 이해가 된다.

다음으로 ‘켈(이 소설의 육두 정부를 구성하는 한 부파의 이름) 진형본능’. 이것은 전쟁에서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상급자와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뇌에 입력하는 것이다. 물론 하겠다는 사람들에게만. 켈의 진형본능은 소속감과 연대감과 안전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꽝인 듯한 명령을 거부하려고 하면 엄청난 고통이 찾아온다. 배신은 곧 추락이다. 나는 이게 묘하게 (특히 이 코로나19 시국에 방역을 그럭저럭 < 잘 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보는 서구인의 시선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보기에 우리에겐 켈 진형본능 비슷한 게 있어서 정부의 방역시책에 이렇게 협조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주인공이 켈이니까 많은 켈들이 등장하는데 작가가 이들을 보는 시선은 약간 모자라지만 정 많은 동생을 보는 듯한 느낌?

물론 여기까지 길게 구구절절 떠들었던 건 사실 이 세계의 아주 지엽적이면서도 그냥 나의 취향을 건드린 부분일 뿐이고. 결국은 독재와 민주주의의 대결로 갈 것 같다. 독재가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생존을 미끼로 어떤 것들을 요구하는지 샅샅이 보여준 뒤 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나지 않을까?

바로 2탄으로 간다.

“슈오스라면 아마도 이렇게 답할 걸세. 게임의 진정한 의미는 행동 교정에 있다고 말이야. 게임은 규칙을 통해 어떤 행동엔 제약을, 반대로 어떤 행동엔 이점을 제공하지. 물론 속임수를 써서 규칙을 흩트려 놓는 경우도 있지만, 거기에도 대가가 존재하는 법이니까. 이 또한 중요한 행동 교정의 요소라 할 수 있지.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현실 세계에선 아무 의미도 없는 카드, 토큰, 기호가 게임 세계에선 엄청난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게 되지 않나? 이 또한 게임 규칙 때문이지. 이에 비추어봤을 때, 모든 역법 전쟁은 서로 다른 규칙들이 경쟁하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 걸 세. 그리고 그런 역법들의 원동력은 사람들의 신념 체계인 것이고. 역법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이런 식으로 게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네.”
- pp. 30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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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하늘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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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부서진 대지 3부작이 끝났다. 시리즈 전체가 휴고상을, 그것도 3년 연속 수상한 첫 번째 작품(한 번 받기도 어렵고, 두 번 받기는 더 어렵고, 그것도 연속해서 받기는 더더 어렵고, 시리즈물이 연속해서 받은 경우는 이전에 엔더 시리즈의 첫 두 권 뿐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 작가는 3년 연속 그것도 하나의 이야기로 받은 것)이니 읽을 만한 가치는 차고 넘친다고 생각한다. 영어를 쉽게 했으면 이런 소설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던 작년 봄에 끝을 봤을 텐데. 대략 10개월마다 번역본이 나와서 그 정도 간격을 두고 3부까지 읽느라 전편의 내용이 이미 희미한 상태에서 따라가려니 참. 1부와 2부를 복습하고 읽었어야 하는데.

아무튼, 그래서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는 대충 알겠다. ‘마법’은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고 마법과 조산력이 어떻게 다른 건지는 모르겠다. 스톤이터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겠는데 수호자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이건 정말 소설 속에서 풀어주지 않은 것 같은데. 특히 최후의 전투(!) -전투라 해봤자 겉보기에는 엄마와 딸의 마법+조산력 싸움-의 서술과 묘사는 뭐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으면서도 너무 장황하다는 느낌.

그런데 이 소설이 묘한 것이, 작가의 묘사에 맞춰 열심히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그려 보려 하다가 잘 되지 않으면 내 빈약한 이해력 또는 감수성을 탓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장이 매우 밀도 높고 아름다워서(번역문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자의 수고에 갈채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끼면서도 한 문장 한 문장 지치지 않고 따라가게 된다.

결론은,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박해(지배 계급이 교묘하게 조장한 것)가 쌓이고 쌓여서 결국 소수자들이 각성하게 되면 다 죽이고-죽는 파국이 올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을 멈추는 길을 보여주는 인물은 카스트리마의 야생 오로진 향장인 이카이다. 에쑨이 카스트리마를 겪지 않았으면 아마도 나쑨과 똑같은 선택을 했겠지. 다 쓸어버리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조산술을 가진 오로진들이 어째서 권력을 잡거나 소중한 존재로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도구로 핍박을 당하느냐 하는 것이다. <시녀 이야기>의 길리어드에서 임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특권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마블 우주의 메타휴먼들은 인간들의 보호자로 많은 것을 누리는데(이들도 토니 스타크 정도를 빼면 평소에 숨어 살기는 하는구나) 말이다.

하지만 더 생각해 보면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이들이 권력욕까지 강하다면 이 역시 -어쩌면 더 지독한-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를 만들고 피지배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임계점(임계점은 반드시 있다)을 넘어 이들을 각성시키게 되면 역시 결론은 전쟁과 파국 뿐이겠지. 지금의 세상은 돈이 특별한 재능인 듯하고 이 재능을 지닌 사람들은 -거의- 하나같이 권력욕도 강해서 재능이 없는 사람들을 내리누르려고 한다. 계급이 생기(겼)고 격차는 점점 더 커지고 그만큼 눌리는 압력도 커진다.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등등 수많은 잣대에서의 소수자들도 마찬가지고. 이대로 가면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는가, 인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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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코니 윌리스 소설집
코니 윌리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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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시끄러운 코니 윌리스. 게다가 인물이 처한 물리적인 배경을 크로키처럼 쓱쓱 묘사해내는 능력도 대단하다. 얼마나 수다스러운지 다 읽고 나면 피곤하고 귀까지 얼얼한 느낌도 있고. 온갖 영화와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문학 작품들을 끼워 넣어서 그것들을 다 보고 읽고 나서 이 단편집을 읽었더라면 더 재밌었겠지만 뭐 필수는 아니다. 아무튼 코니 윌리스 여사가 나보다 나이도 훠얼씬 많고 그만큼 보고 읽을 날들도 많았을 테니까. 게다가 문화권도 다르고.

가장 맘에 드는 단편은 표제작인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이 제목도 맘에 드는데 뮤지컬 <코러스 라인>의 대사인가 보다. 원제는 <이브의 모든 것 All about Eve>라는 영화에서 따온 <All about Emily>. 에밀리(로켓 무용단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인공지능 소녀)는 또 손튼 와일더의 희곡 <우리 읍내 Our Town>의 여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이 희곡은 몇 년 전 방송대 영어 교재에서 읽어서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수많은 레퍼런스들 중 접해본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라 반가웠고...

벌써 10년이나 되었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에 뉴욕에 가서 라디오시티홀에서 로켓무용단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 무대와 먼 거리, 2층에서 봐서 무용수들의 얼굴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로켓 무용단은 무용수 개인보다 덩어리 군무가 중요한 것이라 몇몇 장면들이, 점점 희미해져가지만 소중한 추억 속에 남아 있다. 록펠러 센터 앞의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브라이언트 파크의 크리스마스 트리도. 우리나라에선 크리스마스가 (비기독교인들에겐) 그냥 놀고 먹고 상업적으로 이용당하기만 하는 날인 듯하지만 서양 문화권에선 (비기독교인들에게조차도) 우리의 설날이나 추석처럼 뿌리가 마음 속에 있는 축제의 날이구나 느껴지기도 했고. 이 책을 읽으면서 잠시 그때의 추억을 소환할 수 있었다.

다 읽고 문득 표지 사진의 로켓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로켓 무용단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진짜 로켓을 그려놓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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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호스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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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년만에 읽은 한국단편소설(집). 순식간에 읽힌다. 그리고 결론은...

표제작인 <화이트 호스>는 썩 마음에 든다. 주인공 화자가 역시 여자 사람이긴 하지만 ‘여자’보다 ‘사람’으로서 드러난다. 짜임새도 내 취향(!)이고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도 찾아서 듣는다. 기대했던 것보다 괜찮다. 이 한 편만으로도 강화길이란 작가를 읽을 만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단편들은... 취향이 아니라고 말하고 그냥 제껴버리면 안될 것 같을 만큼 현실에 딱 닿아 있는 이야기들. 특히 ‘여자’라면, ‘여자’이기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제 제기를 취향이 아니라고, 즉 불편하다고 별점을 안 줄 수는 없는 소설들이다. 특히 (두 번째... -.-) 앞의 네 편이 그런데 그 중에서도 <손>은 아주 신경을 북북 긁고, 긁힌 상태에서 황망히 끝나버린다. 대체로 폐소공포증을 자극하는 것 같다.

이것(사회문제를 환기하는 것, 그리고 신경을 북북 긁히는 것)은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가 아니다. 차라리 신문 기사나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다룬 책들을 따로 읽는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언제나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피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는 그저 더 큰 우주의 한 점에 불과하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소설들은 여전히 잘 읽지 않을 것이고. 결국 지극히 취향에 관한 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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