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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폭스 갬빗 - 나인폭스 갬빗 3부작
이윤하 지음, 조호근 옮김 / 허블 / 2019년 7월
평점 :
2020-12-18 ~ 2020-12-22
한국계(이민 1.5세대) 작가가 쓴 소설로는 휴고상 최종 후보에 오른 첫 SF라는데 흥미를 느껴 작년 여름 번역본이 출간되자마자 집어들었다. 스타워즈 영화들을 몽땅 좋아하니까 나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좋아한다, 그러니 이것도 재밌을 거야, 기대하면서. (왜 은하영웅전설의 실패는 떠올리지 못했단 말이냐...)
그런데 생각보다 진입장벽이 높았다. 이전에 본 적이 없었던 세계에 대한 초반부 설명은 언제나 지루한데 이 소설의 경우는 ‘본 적이 없는’의 정도가 아주 높아서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어야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은 느낌적 느낌으로 겨우 다음 단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거기다가 주인공이 별로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이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것이 강조된 해설이나 후기들이 꽤 있는데 이 세계에서 성별이란 아예 중요하지 않다. ‘주인공을 여자로 내세우다니 괜찮은데!’라고 생각하는 건 박공주가 대통령 후보이던 시절 그이가 ‘여성’이니까 대통령으로 뽑아줘야 한다던 어떤 여성계 논객의 주장만큼이나 무의미하다(결말에 가서는 아예 남성으로 바뀌었다고 본다. 이 ‘남성’도 머리카락 색깔 정도의 의미밖에 없지만). 자의로 주입받은 그넘의 ‘켈 진형본능’도 답답한데 두 번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제다오를 결박하여 ‘한 몸 두 정신’ 상태에서는 뭐 자기가 하는 게 없다(이것도 그넘의 ‘켈 진영본능’의 책임이 크다). 차라리 그저 모든 면에서(성품이든 능력이든) 뛰어나기만 해서 지루했던 아너 해링턴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나중에 보니 초반 60 페이지까지 읽는데 걸리는 시간과 나머지 430 페이지의 시간이 거의 비슷하다는 얘기가 있던데 나는 100여 페이지에서 멈춰버렸다.
그러다 얼마 전 2부와 3부(최종)가 한꺼번에 번역 출간 되었고 이번에는 ‘덕질에 진심인 편집자의 안내서’를 붙여줬다. 2부와 3부도 연속해서 휴고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하고(그 중의 두 번은 <부서진 대지> 시리즈에 밀렸지). 그래서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마지막 <석조 하늘>을 읽고 이 책에 재도전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설정’을 두 번째로 읽는 것이기도 하고 그보다 <덕질에 진심인 편집자의 안내서>가 큰 도움이 되어 처음보단 수월하게 페이지를 넘겼지만...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60 페이지까지는 역시 그냥 그랬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무능력과 무기력(‘켈 진형본능!’)이 짜증났다. 그 다음에는 그넘의 하•게•체. 400년 묵은 전술천재 망령이 20대인지 30대인지 아무튼 새파란 청년에게 얘기를 하는 거니 (번역할 때) 하게체를 선택했겠지만 이게 시종일관 이러니 아주 보기가 싫었다. 그러다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는 뭐야 뭐야, 이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페이지가 쓱쓱 넘어갔다. 그렇게 300여 페이지를 순식간에 읽었다.
결론은 재밌게 잘 읽었다, 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석조 하늘>(<부서진 대지> 시리즈 최종편)을 읽고 난 직후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감은 잡았다. 전투의 세부적 상황에 들어가면 제대로 이해한 부분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주인공의 수학 실력이 플롯상에서도 중요한 재능으로 여러 번 언급이 되지만, 심지어 작가는 스탠퍼드에서 수학교육 박사 학위도 받았다는데, 본격적인 수학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저 수시로 ‘복잡한 계산을 했다’, ‘숫자로 바뀌었다’, 등의 언급이 있을 뿐이다. 써도 어차피 독자들은 잘 알아먹지 못하는데 책만 길어질까봐 그랬는지? 내 생각에는 자세히는 몰라도 SF의 ‘S’ 부분이 강화되면서 좀더 폼났을 것 같은데.
한국계 작가의 작품으로 구미호 설화부터 한국적인 요소가 토대가 되는 SF라는 것도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강조되는데 그건 잘 모르겠다. 도대체 ‘한국적’이라는 게 뭐냐 하는 생각부터 든다...
일단 구미호. 내가 아는 구미호는 꼬리가 아홉 개인 여우인데 온갖 신묘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희한하게도)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사람이 되는 방법은 사람 간 백 개를 먹는 것. 그래서 아름다운 여자로 둔갑한 다음 남자를 꼬여서 그 간을 빼먹는다... 이 소설에서 구미호는 남자다(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소설에서는 인물의 성별 따위는 머리카락 색깔만큼도 중요하지 않지만). 남자니까 여자를 꼬인 건 아니고 여자인 주인공이 필요해서 스스로 이 ‘구미호’와의 결박을 선택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여자가 간을 뜯어먹히냐고...? 진짜 스포일러니까 말할 수 없다. 다만 다 읽고 나면 ‘나인폭스 갬빗 Ninefox Gambit’이라는 제목이 확 이해가 된다.
다음으로 ‘켈(이 소설의 육두 정부를 구성하는 한 부파의 이름) 진형본능’. 이것은 전쟁에서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상급자와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뇌에 입력하는 것이다. 물론 하겠다는 사람들에게만. 켈의 진형본능은 소속감과 연대감과 안전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꽝인 듯한 명령을 거부하려고 하면 엄청난 고통이 찾아온다. 배신은 곧 추락이다. 나는 이게 묘하게 (특히 이 코로나19 시국에 방역을 그럭저럭 < 잘 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보는 서구인의 시선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보기에 우리에겐 켈 진형본능 비슷한 게 있어서 정부의 방역시책에 이렇게 협조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주인공이 켈이니까 많은 켈들이 등장하는데 작가가 이들을 보는 시선은 약간 모자라지만 정 많은 동생을 보는 듯한 느낌?
물론 여기까지 길게 구구절절 떠들었던 건 사실 이 세계의 아주 지엽적이면서도 그냥 나의 취향을 건드린 부분일 뿐이고. 결국은 독재와 민주주의의 대결로 갈 것 같다. 독재가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생존을 미끼로 어떤 것들을 요구하는지 샅샅이 보여준 뒤 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나지 않을까?
바로 2탄으로 간다.
“슈오스라면 아마도 이렇게 답할 걸세. 게임의 진정한 의미는 행동 교정에 있다고 말이야. 게임은 규칙을 통해 어떤 행동엔 제약을, 반대로 어떤 행동엔 이점을 제공하지. 물론 속임수를 써서 규칙을 흩트려 놓는 경우도 있지만, 거기에도 대가가 존재하는 법이니까. 이 또한 중요한 행동 교정의 요소라 할 수 있지.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현실 세계에선 아무 의미도 없는 카드, 토큰, 기호가 게임 세계에선 엄청난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게 되지 않나? 이 또한 게임 규칙 때문이지. 이에 비추어봤을 때, 모든 역법 전쟁은 서로 다른 규칙들이 경쟁하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 걸 세. 그리고 그런 역법들의 원동력은 사람들의 신념 체계인 것이고. 역법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이런 식으로 게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네.”
- pp. 302-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