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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동 원령전 ㅣ 상상의힘 아동문고 4
김남중 지음, 오승민 그림 / 상상의힘 / 2012년 8월
평점 :
아~ 5월 광주의 진실을 이렇게 풀어 낼수도 있구나!
책을 덮으며 무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2008년 4월의 봄날이 떠올랐다.
"엄마, 정말 놀랄 일이 있어.
3월에 전국 대학생 시위에 참가한 우리과 학생은 제주, 마산에서 온 친구와 나... 이렇게 딱 셋이었어!"
제 생일을 맞아 두 달만에 집에 오는 큰딸이, 늦은 밤 광주고속터미널에서 만나자마자 들려준 첫 말이었다.
나는 딸의 얘기를 들으며 머리 끝이 쭈뼛 전율이 일었다.
제주, 마산, 광주가 어떤 땅인가!
제주 4.3사태, 부마사태, 광주사태... 오랜동안 '사태'라 불렸던 핍박의 땅에서 자란 아이들만이 시위에 참가했다니
그 아이들을 키워낸 땅의 역사 인식이 유전자에 새겨진 것 같아 눈물겹게 고마웠고,
아이들이 어떤 환경과 토양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걸 무섭게 체감했다.
80년 5월 인천에 살면서 몰랐던 사실과 진실을 88년 신혼여행길에 들른 망월묘역에서 뒤늦게 깨달았고,
89년 광주로 이사와 지금까지 스물네 해를 살면서 광주에 빚진 '산자의 죄의식과 부채감'을 잊지 않았다.
2000년부터 시작된 독서회 엄마들과 해마다 5월이면 그해 5월을 증언하는 책을 읽으며,
우리 아이들에게 진실을 증언하는데 게으르지 말고, 광주의 진실을 잊지말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5월 광주에 빚진 산자들은 진실을 외면하기 일쑤였고, 서서히 기억에서도 지워갔다.
그렇게 기억에서 지워버린 광주에 빚진 자들은 <연이동 원령전>을 읽으며 기억을 되찾아야 하리라.
학살자 전두환을 떠받드는 추종자들은 그를 '장군님'으로 부르고, 그가 사는 연희동을 '연이동'으로 명명했다.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다리다 지친 5월 원령들은 직접 살인자의 목숨을 거두러 오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세상은 지옥이 되므로 그것을 막으려는 자들과의 대결구도가 펼쳐진다.
"죽어도 잊히지않는 고통을 아는가? 우리는 이땅에 자식들을 남겼고 이제 그 자식의 자식들이 자라고 있다. 여전히 힘센 장군과 그 부하들 앞에 우리 자식들은 기가 죽어 있지. 그 꼴을 그냥 지켜보라고?..."
"이 땅의 법과 정의는 치매에 걸렸다. 이 아이들조차 장군이 겨우 몇십년 전에 저지를 짓을 모르지 않는가. 우린 그를 데려가야겠다. 장군이 결국 죗값으로 심판 받았다고 세상이 알게 해야겠다.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다. 결국 세상을 위해서다..... "(174쪽)
"우리가 그날 어떤 꼴로 죽임을 당했는지 모르는가? 죽음도 씻지 못할 한을 저승까지 품고 갔는데 환생이나 제대로 할 것이며, 환생한들 어떻게 인간이 될 것인가?..."
"덧없는 욕심 때문에 수만 번 죽어도 씻지 못할 업보를 쌓은 장군을 단 한 순간이라도 공포에 떨게 할 테다."(175쪽)
맑은 영과 눈으로 '무릎에서 피가 줄줄 흐르며 절뚝이는 다리로 연이동 골목을 걷는 남자'를 보게 된 무진이와 용도는 영들의 대결에 동참한다. 밤마다 만나 정이 든 친구 영지를 위해서도... 주인공 이름인 '무진'은 광주의 옛이름이다. 공지영의 '도가니'에서도 사건의 배경이 된 도시를 '무진시'로 명명했고.
"반성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를 말한다 말이냐?"
"이승의 법에 따라 죗값을 치르지 않는다면 장군 같은 자가 또 나타나겠지. 공짜라고 생각하면 뭐든 저지르른 것이 인간이야. 세상 사람들이 장군 같은 인간에게 또 당하게 내 버려둘 수는 없어." (190쪽)
<연이동 원령전>은 강풀 만화 <26년>의 어린이 버전으로 읽힌다.
만화 <26년>은 80년 5월 이후 26년이 흐르고 희생자의 자녀들이 살인자를 처단하기 위해 총구를 겨눈다면,
<연이동 원령전>은 장군으로 지칭되는 그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이들에게 진실을 알게 한다.
80년 5월 광주에서 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알았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정말 장군이 저지른 일을 몰랐니?"
"지금은 알아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정말 우리를 기억해 줄 테냐? 장군을 기억할 테냐?"
"원령들이 적군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할게요. 장군과 군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꼭 이야기할게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때까지 그럴게요. (195쪽)
광주에 빚진 산자들은 모두 치매에 걸렸다. 모두 5월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광주 민주화 운동 32주년이 되는 올해, 내가 출강하는 중학교에서는 그날 진로체험의 날 행사를 가졌다.
복도에 떨어진 행사 안내문을 주워든 나는 정말 경악했었다. 어떻게 광주에서 이럴 수가 있는가?
우리 딸 대학교 1학년 때 모둠별로,
연간 중요 행사에 맞춘 커리큘럼을 짜는데 누구도 5.18 기념일을 말하지 않아서 놀랐다고...
소위 초등 선생님이 될 친구들의 인식이 이런 정도라 당혹스러워 하던 딸의 말도 기억한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도청 진압작전이 행해지기 전날 밤새 거리를 돌면서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절규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밤새 그 절규를 들으면서도 숨죽여야 했던 광주시민들과
영화를 보는 내내 한없이 울었던 산자의 부끄러움을 우린 정녕 잊고 살 것인가?
29만원 밖에 없다던 그 인간은 오늘도 출타하려면 교통신호 통제기를 조작하여 논스톱으로 달리는 권세를 누리는데...
"나는 할아버지가 옛날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요."
"나도 알아요. 부하들 시켜서 사람 죽인 거 다 봤어요."
우리 아이들에게 5월 광주의 진실을 알게 하는 것,
이런 오욕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도 광주에 빚진 우리들의 몫이다.
만약 광주에 빚진 우리가 증언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소리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