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 신정판
권정생 지음, 이철수 그림 / 분도출판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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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서른 살 무렵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마을에 정착하여 예배당 종지기로 살았던 권정생 선생님의 자전적 이야기다. 1985년에 초판된 책이라 '마흔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간 종지기 아저씨'로 나오는데, 외롭고 쓸쓸했을 선생님의 일상이 손에 잡힐 듯 애잔하다. 더불어 사는 생쥐, 개구리, 토끼 등을 말동무 삼아, 작가로서 하고픈 말을 다 담아냈다. 생쥐의 입을 통한 자조적인 넋두리에 웃음도 나오지만 그 이면의 날선 비판도 간과할 수 없다. 85년이면 광주를 희생제물로 삼아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제5공화국 시절이라, 입도 뻥긋할 수 없었던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가 많았을 선생님, 이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었을 것 같다. 

"좀 더 꾸잖고 고것만으로 깨 버리면 어떡하니?"
"하지만 나도 무척 섭섭했어요. 아저씨한테 미안하고."
아저씨가 꽥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머나! 아저씨 화났다."
"화 안 나게 생겼냐?"
"그래도 한 5분 동안은 즐거우셨잖아요?"
"한 5분간 즐겁게 해 놓고 끝이 나쁜 건 정치 사기꾼이다."
"내가 어디 대통령예요?"
"대통령이 아니니까 참고 있잖니."
" 참지 않으면 데모라도 하시겠어요?"
"자꾸 화나게 하지마. 지금 세상에 데모할 자유는 있니?"
"자유가 없으니까 데모하는 것 아녜요."
"이제 보니 너, 사상이 의심스럽다."
"아이구머니나! 정말 세상 다 됐다."
"엇쭈, 한술 더 뜬다."
"한집안 식구끼리도 못 믿는 세상이잖아요?" (15쪽)

첫 챕터 '장가 가던 꿈 이야기'에 나오는 생쥐와의 대화다. 종지기 아저씨가 장가 가는 꿈을 꾼 생쥐가 제주도로 신혼여행 가서 호텔 엘리베이터를 타고 806호 방으로 들어가고 꿈을 깨버렸다고 하자, 그만 어깨가 처진 종지기 아저씨가 화를 내면서 나눈 대화는 그냥 웃어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이렇게 한 식구로 한 이불 속에 사는 생쥐를 동무 삼아 시국에 대한 비판도 역사에 대한 날선 비판도 마다 하지 않는다. 

"너도 알잖니? 뭐 36년 동안 죽이고, 가두고, 찌르고, 패고, 다 빼앗아 가고, 만신창이가 되도록 혼까지 빼놓고도 '유감이다', 한마디면 다 되거든."
"참말 그렇구나.
그런 걸로 다 통한다면 그런 것들은 생쥐 아니라 빈대 새끼보다도 못한 거야."
"아무렴. 생쥐가 이래 봬도 옳고 그른 것은 헤아릴 줄 안다고. 뭐."
"그렇다니까. 엎드려 절받기 식으로 현해탄인지 편리탄인지 건너가서까지 '유감이다' 한 마디 듣고 잰체하지도 않고... "
"꼭 제2의 이 아무개 같다니까." (145~146쪽)

이렇게 가슴에 품은 말을 뱉어내는 선생님은 그래서 감시받는 관리대상이 되기도 했으니, 세상에 하고 싶은 말씀을 어찌 다 하고 사셨겠는가! 그저 안으로 안으로 쌓아두다 보면 마음이 아프고 결국 아픈 몸이 더 아팠겠구나, 짐작하며 안타까움이 더했다. 세상의 빛이 되고 구원이 돼야 할 종교조차도 장삿속으로 병들어 가는 걸 보며 냉정한 비판과 더불어 얼마나 마음 아파 하셨을지 가늠이 된다.  

생쥐와 꿈속을 날아 하느님을 만나러 갔더니, 사람들의 심부름꾼인 천사가 어떤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지 묻는다. 인간이 만든 하느님이 수천 수만이라 어떤 하느님을 원하는지 콕 집어서 말해야 만나게 해 줄 수 있다고.ㅜㅜ  

"사람들은 창세 이후부터 하느님을 만들기 시작했지요. 나뭇조각으로 만든 허수아비로부터 돌담이나 쇠붙이나 종잇조각까지, 수없이 만들어 모신 거지요."
"그럼, 천사님,
 이 우주 안에 하느님은 안 계시는 겁니까?"
아저씨는 말소리가 떨렸습니다.
"없다고 해야 하겠지요. 사람들은 하느님이 있다고 말할 때, 벌써 한 개의 하느님을 만들어 버렸으니까요."
"...... "
"그러니까 지금까지, 인간의 사고력과 상상력이 움트고부터 각자가 만든 하느님은 그 사람들의 숫자만큼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그렇게 만들어지겠지요." (119~120쪽)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신랄하게 질타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도 들리고, 미국과 소련의 힘겨루기에 정신없이 놀아난 한반도의 분단과 동족살륙의 6.25 전쟁에 대해서도 반성을 부르는 음성이 들린다. 권정생 선생님의 분신인 종지기 아저씨는 세상에 전쟁없는 평화와 자유를 꿈꾸며 날마다 새벽을 깨우는 종을 울린다.

이 책은 동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우리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는 날선 비판과 성찰을 담아낸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우리들의 하느님>으로 읽힌다. 책을 읽으며 간간히 나오는 이철수 판화가의 삽화를 감상하는 것도 행운의 보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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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1-05-31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무슨 영화 보러 가셨을까요? ㅎㅎ

순오기 2011-06-01 16:19   좋아요 0 | URL
간밤엔 캐러비안의 해적 봤고
오늘 심야엔 써니 보려고 예약했고요~ ^^

수퍼남매맘 2011-06-0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아직 못 봤는데 순오기님 리뷰를 보니 꼭 읽어봐야 하겠는걸요.

순오기 2011-06-01 20:26   좋아요 0 | URL
이 책은 꼭 읽어보시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