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5.17 권정생선생님 2주기
-
-
권정생 - 동화나라에 사는 종지기 아저씨 ㅣ 청소년인물박물관 8
이원준 지음 / 작은씨앗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5월은 가정의 달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까지 기쁜 날도 많지만, 우리가 추모할 분들이 많아서 우울하고 슬프게 보낼지도 모른다. 5일은 박경리 선생 2주기, 17일은 권정생 선생 3주기, 23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2008년 6월에 마노아님께 생일선물로 받은 책을 이제야 읽었다. 그것도 <개똥이네집> 5월호에 실을 권정생님 원고 덕분에... 이 책은 여기저기서 몇 번은 귀동냥 했을 권정생 선생님의 삶과 작품세계를 그러모아 친절하게 들려주는 꼼꼼한 평전이다.
권정생 선생님을 생각하면 늘 명치끝이 아리다. 그분의 자발적 가난한 삶이 아니라 평생 병마로 고통스럽게 사셨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프면 늘 찡그린 얼굴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어서, 누가 찾아오는 것도 당신이 누구를 만나는 것도 자제하셨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를 생각하셨고, 세계의 평화와 우리의 통일을 염원하셨다.
권정생 선생님은 당신이 쓰신 <강아지똥>처럼 몸과 마음을 온전히 녹여 거름이 되셨다. 누가 이 분만큼 철저하게 가난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겠는가! 소위 지도자라는 이들의 말과 삶이 다른 이중성을 수없이 봐온 우리는, 철저하게 당신의 말씀과 삶이 일치되게 사신 분을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권정생 선생님은 1937년 9월 10일, 일본 시부야 혼마치 빈민가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청소부였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셨다. 아버지는 쓰레기 더미에서 헌책을 가려 뒷간 구석에 쌓아두었다가 고물로 팔았는데, 어린 정생은 그 책더미에서 자신이 볼만한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골라 읽었다. 6~7세에 혼자 글을 익혀 책을 읽으며 감동받고, 세상을 배웠던 환경이 훗날 글을 쓰게 만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1946년 아버지의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가난했다. 월사금이 없어 초등학교를 열여섯에 졸업하고, 나무장수와 고구마장수 및 점원으로 전전하였다. 또한 서너달은 오로지 구걸로 연명하기도 했는데, 열아홉에 객지에서 얻은 폐결핵을 평생 떨치지 못했다. 1967년 조탑마을 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살다가, 1983년 동네 청년들이 지어준 흙집으로 이사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안동시 조탑면 일직리에서 사셨다.
선생은 그 오두막에서 앉은뱅이 책상에서 글을 쓰고 읽었으며, 옆방에도 한 몸 누일만큼의 공간만 두고 책을 쌓아 두셨다. 다른 건 다 아끼고 절약했지만 당신이 보고 싶은 책을 사는 건 스스로 용납하셨다. 누군가의 과분한 선물이나 이웃들이 손수 만들어 주는 음식 외에는 절대 받지 않으셨다. 공직자들이 이 분의 삶을 십분의 일이라도 본받으면, 뇌물수수 사건으로 줄줄이 엮여 들어가는 뉴스를 우리는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리라.
이오덕 선생님과의 만남은 권정생 선생의 삶에 비친 한줄기 햇살처럼 축복이었다. 이오덕 선생에게 원고료에서 생활비를 미리 보내 달라고도 하셨고, 이오덕 선생은 당신이 받은 월급에서 생활비와 책값을 보내기도 하셨다. 열두 살의 나이차에도 평생 서로 존경하며 지내셨지만, 이오덕 선생이 자신의 책에 권정생 선생이 허락지 않은 편지를 인용한 것과, 훗날 이오덕 선생이 국가에서 주는 훈장을 받은 것은 못마땅해 하셨다고 한다.
위 사진에 나온 것처럼 권정생 선생은 방문 위에 권정생이란 문패를 써서 붙였는데, 내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한 유일한 욕심이었다고 한다. 또한 같이 살았던 개 뺑덕이 집에도 '이뺑덕'이란 문패를 붙여준 걸 보면, 짖궂은 소년다움과 유머 센스가 엿보여 살포시 웃음이 났다.
선생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경험을 담아 낸 함께 사는 세상과,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작품이 많다. 어떤 작품을 읽어도 선생의 정신과 철학을 짐작케 되며, 선생이 살아 온 세월의 아픔과 더불어 추구한 세계가 엿보인다. <몽실언니>가 분단의 아픔을 그린 작품이라면, <무명저고리 엄마>는 민족 수난의 일대기가 엄마의 무명저고리에 다 배어 있어 눈물겹다. <사과나무밭 달님>에 실린 12편은 권정생의 삶과 문학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엑기스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따뜻한 눈맞춤으로 쓴 <하느님의 눈물>은 어떤 걸 읽어도 따뜻한 감동이 스민다. 마지막 작품이 된 <랑랑별 때때롱>에서는 선생님이 꿈꾼 이상향을 엿볼 수 있다. <우리들의 하느님>에 드러난 날선 비판과 그 분의 삶은 우리들 스스로 부끄럽게 한다.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 어른들에게도 읽히게 된 것은 아마 한국인이면 누구나 체험한 고난을 주제로 썼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동화에다 무리한 설교조의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 있는데, 과연 그런 동화가 우리 인간에게 얼마만큼 유익한지 알 수 없다.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것은 훈시나 설교가 아니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 문명 속의 인간보다 잘 보존된 자연 속의 인간이 훤씬 인간답다. 설교를 듣는 것보다, 한 권의 도덕 교과서를 보는 것도다 푸른 하늘과 별과 그리고 나무와 숲과 들꽃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130쪽)
선생은 돌아가실 때, 10억여 원의 인세 수익금을 남기면서도 극빈의 삶을 사셨다. 살아생전에도 가슴 먹먹해지는 이야기로 옳고 그림을 알려주셨지만, 유언에서도 아름다움과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셨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소중하다고 하셨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선생님이 떠리는 손으로 쓴 마지막 글을 새기며 깨달아야 할 숙제일 듯하다.
정호경 신부님은 <비나리 달이네집>의 실제 모델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유서는 여기, http://blog.aladin.co.kr/714960143/2848250
정호경 신부님.
마지막 글입니다. 제가 숨이 지거든 각각 적어놓은 대로 부탁드립니다.
제 시체는 아랫마을 이태희 군에게 맡겨 주십시오. 화장해서 해찬이와 함께 뒷산에 뿌려 달라고 해 주십시오. 지금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3월 12일부터 갑자기 콩팥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뭉퉁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계속되었습니다. 지난날에도 가끔 피고름이 쏟아지고 늘 고통스러웠지만 이번에는 아주 다릅니다. 1초도 참기 힘들어 끝이 났으면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재작년 어린이 날 몇 자 적어 놓은 글이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 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 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2007넌 3월 31일 오후 6시 10분 권정생
권정생 선생은 이 편지를 쓰고, 4월 힘없이 쓰러져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한 열흘쯤 치료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포도나무를 살피며 잘 자랄 수 있겠다며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5월 16일 병원에서 의식을 잃어 응급수술에 들어갔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셨다.
5월 17일 권정생 선생의 3주기를 맞으며, 그 분의 삶과 뜻을 헤아리고 생활 속에서 작은 실천이라도 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다짐하는 자기 성찰의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