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꽃 한국사 인물 동화 1
한국역사논술연구회 지음, 류탁희 그림 / 동네스케치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머니독서회 3월 토론도서가 소설 덕혜옹주인데, 동화로 나온 덕혜옹주 표지가 마음에 끌려 같이 구입했다. 초등생들이 덕혜옹주의 삶을 따라 근현대사를 알아가는 데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옥의 티, 18쪽에 덕혜옹주의 탄생을 1925년이라고 잘못 적었다. 25쪽에는 "1912년 5월 25일, 가장 귀한 신분인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가 세상에 태어났다."고 적었지만... 
  

덕혜의 삶을 통해 힘없는 조선 왕실이 스러져 가는 과정을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으로 가치가 있다. 오류를 신고하느라 토욜 출판사에 전화했더니, 편집자는 없고 잘못된 건 이미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이런~ 아이들이 읽는 역사동화에 중대한 오류가 있으면 바로잡아 내보내야지 그냥 판매하면 어쩌란 말이냐? 2010년 2월 26일 초판이구만... 책임있는 답변을 듣고 싶어 월요일 담당자의 전화통화를 요청한다고 연락처를 남겼다.   

고종은 정비인 명성황후를 비롯한 여덟 명의 부인에게 9남 4녀를 두었지만, 성장한 자식은 순종과 의친왕 이강, 영친왕 이은과 덕혜옹주 뿐이었다. 딸 셋은 모두 일 년이 되기 전에 죽었다. 명성황후를 잃고 마음 붙일 곳 없던 고종이 환갑에 얻은 딸은, 정비가 아닌 후궁에게 났으므로 공주가 아닌 '옹주'다. 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덕혜의 생모를 양귀인으로 봉하고 복녕당이란 당호를 내렸다. 고종을 쏙 빼닯았다는 덕수궁의 꽃이었던 덕혜가 다섯 살이던 1916년 4월 1일 덕수궁 함녕전의 별당인 즉조당에 신식 유치원을 만들었다. 고종은 덕혜의 재롱을 보며 지냈지만, 주권을 상실하고 왕위도 넘겨 아무 힘이 없었다. 일본은 조선의 왕실이 늘어나는 것을 꺼려 덕혜는 왕족에도 오르지 못했고, 이름조차 없어 '아지(이름 짓기 전 아기를 부르는 이름)'라 불렸다. 




조선 왕실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기관인 이왕직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간섭했다. 고종은 아들 이은을 일본의 볼모로 보내고 일본인 며느리를 맞는 치욕을 겪으며, 덕혜만은 꼭 지켜내리라 다짐했다. 고종은 사가에 나가 사는 다섯 째 아들 이강을 은밀히 찾아 독립세력과 줄을 잇고 지시했다. 왕실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을 한 이강은 고종과 엄귀인 사이에 얻은 아들이다. 고종은 덕혜를 일본에 뺏기지 않으려고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을 부마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일본은 김황진을 유배보내 궁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고, 고종마저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레 승하했다.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에 이어 2대 총독이 된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고종의 국장에 맞춘 3.1 만세를 부른 조선 백성을 총칼로 제압했다. 헌병을 경찰로 바꾸며 문화정치를 한다면서 실제로는 일본 병력을 더 늘렸다. 덕혜보다 서른 여덟 살이 많은 순종은 어버이 같은 마음으로 돌봤지만, 이미 기울어진 조선은 덕혜를 지키지 못했다. 1921년 5월 4일, 일본 소학교에 들어가면서 이름을 얻고 공식적으로 '덕혜옹주'라고 불렸지만, 1925년 3월 28일 기모노를 입은 열세 살의 덕혜는 일본으로 떠나야만 했다.  

아버지 고종을 여의고 울지 않고 강해지리라 마음 먹었던 덕혜는, 더 강하고 단단해져 저들의 의도대로 살지 않으며, 조선황실의 옹주로 살아남으리라 마음을 다잡는다. 일년 뒤 덕혜는 순종이 위독해서 돌아왔지만, 1926년 4월 25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조선 백성의 마음이 덕혜에게 쏠릴 것을 염려한 일본은 순종의 장례도 참예치 못하게 일본으로 내몰았다. 일본으로 간 덕혜는 달라졌다. 독살당할까 두려워 보온병에 마실 물을 가지고 다녔고, 동무들이 주는 음식도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일본에 있는 이은 부부는 극진히 돌봤으나 덕혜는 점점 생기를 잃어 갔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의 죽음으로 조선에 왔으나 장례식 이틀 후인 6월 7일, 다시 일본으로 가야 했다. 덕혜는 여학교에서 처음으로 동무가 된 유카키의 "임금의 딸이라면 나라를 빼앗겼는데 왜 싸우지 않아? 앞장서서 싸워야 되는 거 아닌가?" 라는 물음에 충격을 받았다. 둘이 나눈 말이 새어나가 학교는 유카키를 전학 보냈고, 덕혜는 아무도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 큰 상처를 안고 살던 덕혜는 조발성 치매란 정신분열증에 걸렸다. 이은 부부는 가엾은 덕혜를 조선으로 돌려보내 안정을 찾게 해주고 싶었지만, 일본은 1930년 10월 소 다케유키와 덕혜의 결혼을 정해버렸다. 

1931년 5월, 덕혜의 나이 만 열아홉에 일본식으로 혼인을 했고, 옹주가 백작부인이 되자 조선 백성들은 덕혜를 잊었다. 아니 어쩌면 배신감에 애써 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덕혜는 조선과 일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자유를 느끼며 잠시 행복했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1932년 8월 14일 딸 마사에를 낳았지만 정신분열증의 아내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전쟁에 나갔던 남편은 일년 삼개월만에 돌아왔지만, 패망한 일본은 귀족의 신분제를 폐지하고 지원금을 끊어버려 그들의 살림도 피폐해졌다. 딸 마사에는 조선의 피가 흐르는 것을 끔찍히 여기며 자꾸 엇나갔다고, 상처 입은 덕혜는 입을 닫았다. 이은 부부는 덕혜를 해방된 조선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1946년 일본의 공립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새로 생긴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인 남자와 혼인한 덕혜를 외면했고, 이조가문에서는 조선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제명처리해 한동안 어머니 성을 따라 양덕혜가 되어야 했다. 정신병원에 들어간지 10년, 이은 부부는 덕혜의 병이 더 이상 호전되지 않자 다케유키와의 25년 결혼을 끝냈다. 다케유키는 조선 황실에서 보낸 혼례물품을 모두 돌려보냈고, 이은 부부는 덕혜의 혼례물품들을 마땅히 둘 곳이 없어 1956년 1월 분카여자대학의 복식박물관에 기증했다. 덕혜의 이혼으로 다케유키는 한국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나쁘지 않은 남편이었던 거 같다. 덕혜의 딸 마사에는 1955년 스물 세 살에 결혼했으나 1957년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취를 감췄다. 덕혜옹주의 불행한 삶은 그 딸에게도 치명적인 불행이었다. 

종군기자로 활동하던 김을한은 덕혜와 혼인하기로 했던 김장한의 형으로, 덕혜를 조선으로 데려오기 위해 애썼다. 이승만이 물러나고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은과 덕혜의 귀국에 우호적이었다. 드디어 1962년 마흔아홉의 덕혜는, 꽃다운 열세 살에 일본으로 끌려 간지 36년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혼자는 걷지도 못하는 덕혜를 마중 나온, 덕혜가 태어나면서부터 돌봤던 유모 변복동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유... 유... 모....... 나, 왔어....  나... 조.... 선.... 에.... 왔.... 어." 




덕혜는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고, 살아보겠다는 강한 의지와 열정으로 병은 호전되었다. 덕혜는 어릴 적 추억이 가득한 낙선재에서 이방자 여사와 함께 살았다. 1970년 오라버니 이은의 죽음을 알렸지만 덕혜의 정신은 가물거렸다. 덕혜의 곁을 지키던 유모도 세상을 떠났고 주변이 쓸쓸했지만, 가끔 정신이 돌아오면 덕혜는 홀로 조선말로 글자를 썼다.  

전하 비전하 보고 싶어요. 나는 조선이 좋아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대한민국 우리나라 

1989년 4월 21일,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파란만장한 삶은 막을 내렸다. 내가 24시간의 진통을 겪으며 첫딸을 낳은 바로 다음 날이었으니, 불과 21년 전이다. 비운의 조선 역사와 함께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덕혜옹주는 시대를 잘못 만난 희생제물이었다. 그녀의 운명이 안타까워서 너무나 가슴 아팠다. 정신병원으로 덕혜를 찾아간 김을한, 조선땅을 밟은 덕혜를 마중한 유모 변복동, 그들이 옹주의 참혹한 모습에 오열할 때 나도 하염없이 울었다. 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의 파란만장한 삶을 기억하기 위해 꼼꼼히 정리했다. 이젠 편안히 잠들었을지라도 힘없는 조선의 옹주로 슬프게 살다 간 덕혜를 잊지 말고 기억해 주자!  

*리뷰에 첨부한 삽화 이미지는 본 책에 실린 거지만, 덕혜옹주와 유모를 찍은 사진이나 덕혜의 글씨는 KBS에서 방영했던 역사다큐멘터리 '한국사전'을 출판한 한겨레출판 '한국사전'에서 따왔음을 밝힌다. 한국사전을 같이 보면 보다 정확한 역사자료와 관계 사진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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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으로 만나는 덕혜옹주와 만덕
    from 엄마는 독서중 2010-03-21 16:16 
    후애님 페이퍼에서 이 책을 보곤, 울듯한 애잔한 옹주가 눈에 밟혔고, 연두 저고리와 분홍 치마도 아프게 내 마음에 감겨 들었다. 스러져가는 조선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비운의 덕혜옹주를 잊고 있었다는 자책에 더 아팠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없었던 덕혜, 아버지 고종과 어머니 양귀인의 죽음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리라. 마지막 보루였던 서른여덟 살 위인 어버이 같은
  2. 비운의 덕혜옹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
    from 엄마는 독서중 2010-03-29 17:57 
    이 책을 어머니독서회 3월 토론도서로 정한 것은 작가의 말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고종황제의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황녀로서의 귀한 삶을 살지 못했던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흔적도 없이 잊혀져버린 그 삶이 너무 아파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책은 국내에 단 한 권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일본 번역서로 말이죠. 덕혜옹주 집필은 사명감이고 자존심이기
 
 
세실 2010-03-21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 읽고 있으니 눈물이 납니다.
님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잘 기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억해야죠..
다행히 최근소설이 책읽는 청주 선정도서가 되었습니다. 소설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렇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는 생각 듭니다.

순오기 2010-03-21 12:52   좋아요 0 | URL
슬픈 운명을 타고난 비운의 옹주를 기억해주자고요.

blanca 2010-03-2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덕혜옹주 소설은 어떤가요? 사서 읽을만 한지요? 저 한국사전 보고 완전 펑펑 울었잖아요. 노인이 되어 쪼그라든 덕혜옹주 앞에서 유모가 큰 절 올리는 장면 보고 정말 통곡했었답니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넘기지 않고 몸소 지적하여 고치는 순오기님 모습을 저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순오기 2010-03-21 16:58   좋아요 0 | URL
소설은 아직 못 읽었어요. 회원이 빌려가서 화욜에 가져오면 그때부터 읽어야지요. 저도 한국사전 보면서 펑펑 울었는데 동화책을 보면서도 눈이 빨개지도록 울었어요. 정말 비운의 덕혜옹주를 우리가 기억해줘야지요.
제가 좀 오지랍이 넓어요.ㅋㅋ

마노아 2010-03-22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보고도 너무 슬퍼요. 한국사전에서도 얼마나 가엾던지요. 예전에 단막극으로 했던 드라마도 엄청 슬펐어요. 비운의 역사예요.ㅜ.ㅜ

순오기 2010-03-22 18:58   좋아요 0 | URL
덕혜옹주의 삶 자체가 우리의 슬픈 역사에요.ㅜㅜ
한국사전 마노아님도 보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