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시선 296
김경미 지음 / 창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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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생 김경미 시인, '고통을 달래는 순서'라는 제목에 끌렸다. 같은 연배여서 그런지 수록된 시가 대체로 공감되었다. 고통을 달래는 순서라기에 뭔가 비법이 있을까 기대했는데 순서는 없고 그냥 견디는 거란다.ㅜㅜ 하긴 나이테가 늘어나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지천명이요, 모든 걸 견디는 게 삶이라는 것도 알겠더라.^^ 

 

고통을 달래는 순서  

토란잎과 연잎은 종이 한장 차이다 토련(土련)이라고도 한다 

큰 도화지에 갈매기와 기러기르 그린다 역시 거기서 거기다 

누워서 구름의 면전에 유리창을 대고 침을 뱉어도 볼고 침으로 닦아도 본다 

약국과 제과점 가서 포도잼과 붉은 요오드딩크를 사다가 반씩 섞어 목이나 겨드랑이에 바른다 

저녁 해 회색삭발 시작할 때 함께 머리카락에 가위를 대거나 한송이 꽃을 꽂는다 미친 쑥부쟁이나 엉겅퀴 

가로등 스위치를 찾아 죄다 한줌씩 불빛 낮춰버린다 

바다에게 가서 강 얘기 하고 강에 가서 기차 얘기 한다 

뒤져보면 모래 끼얹은 날 더 많았다 순서란 없다 

견딘다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했던가? '다 쓴 이쑤시개처럼 봄 햇빛들 쏟아지는 오후'라니~ 시인들은 참 묘사도 잘한다. 세상을 살면서 단 하나쯤은 질을 헤아린다는 '질'에 특히 공감됐다.   

 

질 

어머니는, 옷은 떨어진 걸 입어도 구두만큼은
비싼 걸 신어야 한다 아버지는, 소고기는 몰라도 좨지
고기만큼은 최고 비싼 질을 먹어야 한다
그렇다 화장하다 만 듯 사는 친구도, 생리대만은
최고급이다 먹는 입 하찮아도 칫솔에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누구는 귀를 잘라 팔지언정 음악만은 기어이 좋은 걸 산다
다들 세상의 단 하나쯤은 질을 헤아리니 

그렇다 라일락꽃들의 불립문자 탁발의 봄밤 혹은 청색
다도해의 저녁 일몰이야말로 아니다 연애야말로 삼각
관계야말로 진정 질이 전부이다 고난이야말로 매혹의
우단 벨벳 검은 미망인 기품으로 잘 지어 입혀야 한다
몸이야말로 시계를 꺼낼 수 없는 곳 영혼이든가?
그렇다! 품종이 좋은 하늘을 써야 한다 관건은, 가장 비싼 것 하나쯤엔 서슴없이 값을 치르니
귀함이 곧 가장 싼 셈, 목숨만큼은 정말 제대로 값을 치르라고 

다 쓴 이쑤시개처럼 봄 햇빛들 쏟아지는 오후
싸구려 플라스틱용품들 한없이 늘어놓아진 봄길에
값이여, 말 너무 많이 하지 말아라
   


하하~ 나는 먹는 것 입는 것은 질을 찾지 않지만 문화적 혜택이나 책을 사는 건 질을 헤아리고 아까워하지 않는다. 내 곁에도 책은 빌려봐도 유기농으로 최상의 것을 먹는 이웃이 있고, 책은 안 사도 옷치레엔 아끼지 않고 돈을 쓰는 이웃도 있다. 다들 무엇인가 자신을 만족시켜 줄 것엔 최상의 질을 찾는다. 촌철살인의 유독 짧은 시도 눈에 띈다. 

  

변덕 

촛불에 컵 덮듯 탁, 물 부어버렸다가 

젖은 촛불 들고 나가 종일 바람에 말리다가 

 

불참 

너무 허름한 기분일 때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미안하다 오후 여섯시여, 오늘 나는 참석지 못한다
 

 

첫눈 

하고 싶은 말 다 해버린 어제가 쓰라리다 

줄곧 평지만 보일 때 다리가 가장 아팠다 

생각을 안했으면 좋겠다 

 

 

이 시집은 해설이나 발문 없이 시인 자신이 쓴 '부재에 홀리다'란 산문이 실렸다. 난해한 비평용어나 시보다 어려운 해설도 없고, 시인이 네번째 시집을 작업하기 위해 직장을 접고 온전히 전업시인이 되어 2008년 8월,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국제창작프로그램을 위한 게스트하우스에 들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천창이 유리로 되어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 하지만 천둥 번개와 밤새 쏟아지는 빗소리에 공포에 질렸던 이야기는 어찌나 웃음 나던지... '시란 무엇이고,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토론답변을 쓰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했지만, 다른 작가들은 솔직하게 '왜 쓰느냐고 묻지 마라, 무슨 대단한 답을 기대하지 마라, 그냥 쓸 뿐이다...글을 잘 쓰기 위해선 별 방법이 없단다. 그냥 많이 읽고 많이 써라... 시인도 이 경험으로 크게 깨닫고 시도 솔직하게 쓴 것 같다.^^ 

나이 먹은 이들의 장점이란 솔직해진다는 거, 시인도 예외는 아니듯 어머니와 모텔이냐 교회냐를 놓고 벌이는 갈등을 소재로 쓴 '나의 노파'는 심각한대도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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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8-22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기언니, 순서 없고 그냥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이라구요? ^^
처음부터 끝까지요. 그렇구나..

순오기 2009-08-23 15:21   좋아요 0 | URL
더위를 견디듯이 사는 일도 견디는 것이더라고요.

같은하늘 2009-08-2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서 없이 받아들이고 견뎌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순오기 2009-08-27 08:19   좋아요 0 | URL
하하~ 그 나이에 벌써 아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