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번역을 하면서도 편집과 디자인을 해보고 싶었고, 편집디자인 회사에 다니면서는 영업을 해보고 싶었다. 1인 출판사를 만들어 기어이 그 모든 일을 다 해보고 지쳐 나가떨어졌을 때 마주한 책이 『모든 것이 되는 법』이었다.

이 책의 저자 에밀리 와프닉은 한 가지 일을 계속하기보다는 다양한 일에 흥미를 갖고 새로운 걸 배우고 도전하기를 즐기는 사람을 다능인(多能人, multipotentialite)이라고 정의했다. 내가 평균적인 인간에서 벗어난 돌연변이가 아니라 다능인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안도감이란. 내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아주는 다능인이라는 고유명사가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었다. 나를 표현하는 명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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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뜨려던 건 아니었는데’ 1편의 주인공은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조카를 위해 뜬 돌고래 스웨터였다. 표현하고 싶었던 건 푸른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는 돌고래였건만, 돌고래와 바다의 경계를 이루는 부분에서 장력 조절에 실패해 쭈글쭈글한 스웨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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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영하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한 뒤 역자 후기에서 작품을 이렇게 요약했다. "표적을 벗어난 화살이 끝내 명중한 자리들."* 김영하의 말을 빌려 나는 망한 뜨개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예상을 벗어난 바늘이 끝내 빚어낸 이야기라고.




* 「표적을 벗어난 화살이 끝내 명중한 곳에 대하여」, 문학동네, 2009, 242쪽.

같은 도구와 방법으로 같은 일을 수십만 번 한다는 게 어떤 일일지 상상해보자.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이어가야겠기에, 그 지루함을 어떻게든 극복해야겠기에 찾아낸 방법이 문어발인 것이다. 그러니까 문어발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포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지루함을 줄이려는 노력이다. 마라토너는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하기 위해 페이스메이커를 두고 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페이스를 유지한다. 페이스메이커가 없다면 42.195킬로미터는 훨씬 고된 길이 될 것이다. 뜨개인은 문어발이라는 페이스메이커의 도움으로 더 많은 것을 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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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인은 예외 없이 정직한 이 결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한 코가 옷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챔 없이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그 과정에 온전히 책임지는 사람이다. 뜨개인은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왜 뜨는지 알고 그 결과물도 머릿속에 그릴 줄 안다. 어떤 실로 어떻게 뜰지를 스스로 정하고 잘못 떴을 때도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일은 없다. 잘못된 코를 수정하기 위해 유를 무로 돌릴지언정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도안이라는 원문을 실이라는 수단으로 옮겨내는 일. 한 코 한 코 짚어가며 뜨다 보면 어느새 코 막음을 하게 되는 일. 그래서 완성한 옷의 첫 코부터 마지막 코까지 통째로 이야기가 되는 일. 내가 생각하는 뜨개는 이런 것이고 그래서 뜨개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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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뜨개 작가이자 뜨개 커뮤니티의 운영자인 스테파니 펄 맥피는 뜨개가 중독의 대상인지 아닌지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뜨개인마다 체질과 능력과 경험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떤 사람이 뜨개 중독인지를 보려면 그에게서 실을 빼앗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봐야 하는데, 그건 뜨개인으로서 차마 못 할 짓이라고(그는 진정한 뜨개인이다). 대신 뜨개에 ‘관여’된 정도를 네 단계로 나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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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고 덜컥 수세미부터 시작할 게 아니었다. 코바늘 기초부터 알아야 했다. 코바늘 기초를 검색하니 목록 맨 위에 김라희가 있었다. 자네 코바늘 한번 모질게 배워보지 않겠냐는 유튜버 김라희의 권유로 사슬뜨기부터 시작했다. 자기 키만큼 사슬뜨기를 하고, 다시 자기 키만큼 짧은뜨기를 하고 다시 자기 키만큼 한길긴뜨기를 하라는 김라희의 자코빡(‘자네 코바늘 한번 빡세게 배워보겠는가’) 영상은 다시 봐도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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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편한 사람이 되는 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서점가에 심리 치유 에세이가 쏟아지고 그 많은 사람이 심리상담사를 찾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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