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작가 10주기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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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글은 그가 살아온 시대의 문헌자료로도 손색이 없다. 풍파 속 시대를 붙잡고 살아 온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말이다.' 1931년생인 박완서 작가의 글은 내게 이런 생각을 가져다 주었다. 이 글을 50대, 70대에 읽는다면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와닿을 것 같다. 여전히 살아갈 날이 많은 내게 살아온 날들이 더 많은 작가의 시선을 모조리 이해하고 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노쇄한 어른들이 살아 온 지혜라고 일러주는 것들이 젊고 혈기왕성한 이들에게 터부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옛 것들을 지닌 마음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일본 이름을 써야했던 작가의 학교생활, 한국전쟁 이후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사묻힌 작가의 어머니, 깡시골에서 신여성이 되어야한다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하여 삯바느질로 생을 이어온 이야기들을 읽으며 역사소설을 읽는 것만 같았다. 한 시대가 가한 전쟁이란 폭력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투영되는지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한국의 정서인 '한'의 기원이 어쩌면 이 때부터가 아닐까 싶었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그리운 고향에 대한 이중적 모순을 가지고 있었던 어머니와 자신을 떠올리며 쓴 그의 글에는 실상을 보려한 모습이 느껴졌다.

어머니는 90세의 장수를 누리고 돌아가셨지만 그리던 고향땅을 생전에 밟아보지 못하셨고 물론 고향땅에 묻히시지도 못했다. 이렇게 철천지한을 풀어보지 못하고 죽은 이가 어찌 어머니뿐이랴.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한을 품은 이들은 계속 죽어 갔다. 어떡하든 생전에 한풀이를 하고 싶은 세력이 그만큼 줄어들게 되고, 결국 통일을 지향하는 힘도 줄어 가는구나, 막연하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나서 나는 그런 생각을 고쳐먹을 수가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식 된 자라면 누구나 느끼는 슬픔과 함께 멍에를 벗은 것 같은 홀가분함을 느꼈다면 너무 불효한 것일까. 그러나 솔직한 심정이 그러했다. 더는 모순된 이중의 고향, 두 개의 허상에 짓눌리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박완서 작가는 40대에 문인의 길에 들어섰다. 지금보다 여성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었던 시대였고 성에 따른 역할이 규정되어 있다고 믿었던 때였다. 자녀를 여럿 낳아 기른 여성에게 우연히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모집 공고를 본 후 글을 응모하게 된 것이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였다. 습작을 해왔던 것도 아니었으나, 위의 계기로 무척이나 많은 글을 썼다고 한다. 그는 '내가 하나의 작품을 이룩한 게 작가가 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나 준엄한 각오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중년으로 접어든 여자의 일종의 허기증에서였던 것 같다.'라 썼다. 어떤 일은 가득 차오른 열망과 집요가 아닌 작가가 언급한 허기증, 부재로 인해 행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내가 아직도 소설을 위한 권위 있고 엄숙한 정의를 못 얻어 가진 것도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소박한 생각이 뿌리 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남이야 소설에도 효능이 있다는 걸 의심하건 비웃건 나는 나의 이야기에 옛날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이야기에 거셨던 것 같은 효능의 꿈을 꾸겠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그리하여 특정 시대를 살아가며 그 시기를 자신만의 가치관과 태도로 이해하고 습득한다.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으며 그 시대를 이해해봄과 동시에 시대를 가르지 않는 영원불멸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사람이기에 고민하고 후회하고 성찰했던 숱한 감정과 깨달음은 시대가 가고 새로운 인류가 탄생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글들이 살아남아 계속해서 읽히고 고전으로 자리잡는 거겠지.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내 마지막 몇 달을 철없고 앳된 시절의 감동과 사랑으로 장식하고 싶다. 아름다운 것에 이해관계 없는 순수한 찬탄을 보내고 싶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 여기저기 허둥대며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한꺼번에 많은 아름다운 것을 봐두려고 생각하면 그건 이미 탐욕이다. 탐욕은 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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